마태복음 주석 분류
왕국복음의 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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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12월호>
10:1 『주께서 자기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허약함을 치유하는 권세를 주시더라.』제자들이 위임받은 복음이 “천국복음”이기에, 그들도 역시 예수님과 같이 질병을 치유하는 “표적”을 행하게 된다.
10:2-4 『그 열두 사도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즉 첫째,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요, 그의 형제 안드레이며,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요,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라 하는 렙베오, 카나안인 시몬과 유다 이스카리옷이니, 그는 주를 배반한 자더라.』
“사도”라는 말은 ‘아포스톨로스’(αποστολος), 즉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말을 라틴어로 번역하면 ‘미시오’(missio)가 되어 “선교”(mission)라는 단어가 여기서 파생되었다. 성경에 “선교”라는 단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가 기독교 용어로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단어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사”도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고, “선교사”와 “사도”는 언어적으로 같은 말이다. 한 가지 자연스럽지 못한 점은 예수님께서 처음에 임명하신 열두 사도들은 오직 유대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임명된 자들이었는데, 이 시대의 모든 “선교사”들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시대의 어떤 선교사라도 열두 사도들처럼 “천국복음”을 전파한다면 그는 갈라디아서 1:8에 의해서 저주를 받게 된다. 그 복음은 이 시대(은혜시대)에는 주어지지 않았으며, 다른 시대에,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복음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사도”라고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임명받은 열 두 명의 제자들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 “사도”라고 불림받았던 사람이 더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이다. 그는 주님의 지상 사역 이후에 부름을 받았는데, 특별히 이 사도는 열두 사도들과는 다르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목적으로 세우신 사도이다(갈2:8, 롬5:16, 이 말씀과 로마서 15:8을 비교해 볼 것).
또 바울과 더불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바나바도 “사도”라고 불렸다(행14:4,14). 『그때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그 말을 듣고...』(행14:14). 그리고 사도행전 1:26에서 맛디아도 열 한 사도와 함께 계수되었으므로, 그를 포함해서 성경에서 “사도”라고 불리워진 사람은 15명이며, 히브리서 3:1의 예수님까지 합하면 모두 열 여섯 명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도는 예수님의 지상사역 동안 그 분에 의해서 직접 선택된 열두 명의 제자들이며, 이들의 숫자가 “12”라는 것과 더불어 그들의 임무가 지극히 “이스라엘的”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나머지는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은혜의 복음과 더불어 나타난다.
10:5-8 『예수께서 이 열둘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시니라. “가서 전할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 병든 자들을 고쳐 주고, 문둥병자들을 깨끗케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어 쫓으라. 너희가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어라.』
우리는 여기에서 천국복음의 특징을 잘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 유대인에게만 전파된다. 본문에서는 분명히 이방인의 길로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서 유대인에게 주어진 구절들을 교회에다 도둑질해 오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절은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유대인은 그리스도인을 말하며 이방인은 이교도, 또는 불신자들을 말한다.”라고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교회는 분명히 다르며, 이스라엘에게 준 약속과 교회에 준 약속이 다르다는 것은 누차 강조해 왔다(학회지 19호,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참고).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대조를 이루면서 등장한다. 특별히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는’,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 가운데’ 등의 표현에서 쓰여지는 “너희”라는 말은 “이방인이 아닌 너희 이스라엘”이라는 말이다. 만일 여기서 “이방인”이 단지 “불신자”를 가리킨다면, 마태복음 10:5에서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불신자들에게 전도를 하지 말라는 말인가?
결국 이스라엘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이고 이방인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다. 더욱이 우리는 이방인이다. 만약 우리가 전도의 근거를 마태복음 10장에다 둔다면 우리는 이방인이므로 복음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 그래서 “천국복음”을 지금 이 시대에 전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천국복음은 이스라엘에게 한정된다.
둘째, 천국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이 포함되지 않는, 오로지 “천국이 가까이 왔다.”이다. 이 복음에는 거듭남에 대한 내용도 없다. 이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속도 없다. 이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그리스도인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직 이 복음의 내용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이고, 이 천국은 강력한 유대인의 메시야 왕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통치하시는 정치적이고도 물질적이며 가시적이고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며, 그래서 이 천국복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아들이라는 내용 뿐이다.
셋째, 이 복음에는 표적이 뒤따른다. 몇 차례에 걸쳐 언급했지만, 병고침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예언된 천년왕국의 왕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건들이다. 이 복음에 표적이 뒤따른다는 것은 이 복음이 이스라엘에게 전파되는 복음이라는 것을 또한 증명해 주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표적과 더불어 시작된 민족이고(출 4장, 특히 30,31절), 구약에서는 지속적으로 왕국의 표적으로서 병고침을 예언했으며(겔 34:16, 사33:24; 35:6),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고전1:22).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 복음을 전파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도들에게는 당연히 이 표적이 따라와야 한다. 그리고 이 표적은 앞으로 재림 직전에 다시 한번 유대인들에게 천국복음이 전파될 때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이 표적을 마치 자기들에게 주어진 권한처럼 행사하려고 한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구절들을 교회에다 도둑질하듯이 천국복음에 주어진 표적을 은혜의 복음에다 도둑질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병든 자들에게 안수하며, 심지어는 안찰, 족찰(손으로 때리고 바로 차는 것, 기도원에서 종종 행해진다.)까지도 일삼으며 치유의 표적을 행하려 하고,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거짓 표적을 행하기도 한다.
물론 이 시대에도 믿음의 기도로 병든 자가 치유되는 역사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중 누구에게 있는 불치의 병을 믿음의 기도로 고친다고 해도, 그것은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 행하셨던 표적과는 분명하게 그 의미가 다르다. 더욱이 치유의 기적은 무당도, 악령 숭배자들도, 도닦는 사람도, 거짓 선지자도 종종 행할 수 있다(마7:22, 계13:13).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과 마귀가 꾸미는 이적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신유주의자들도 문둥병을 고치지는 못한다. 어떠한 신유주의자들도 죽은 자들을 살리지 못한다. 또 죽은 불신자들의 영혼이 귀신이 된다고 말하며 ‘언제 죽은 누구귀신’을 쫓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사실 마귀의 거짓말에 속는 것 뿐이다. 더욱이 어떠한 신유주의자도 마태복음 10:8처럼 “값없이 주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돈을 받고 이 일들을 행한다. 그러므로 지금 마태복음 10:8의 표적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장이들이다.
10:9 『너희의 돈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어느 대학생 선교단체에서는 전도여행 때마다 이 구절을 실행에 옮기곤 한다.
10:10 『여행을 위하여 자루나 두 벌 겉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
그러나 그들은 배낭은 갖고 다닌다.
10:14 『아무도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나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면 그 집이나 성읍에서 떠날 때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읍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기까지 하여 그 성읍을 저주하는 이 일은 그 성읍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 성읍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른 것인데, 그 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죄이다. 이 죄는 소돔과 고모라 땅의 성적 문란, 성적 변태의 죄보다 더 크다.
이 저주는 마태복음 11:21-24에서 반복되는데, 코라신과 벳새다는 예수님의 왕의 표적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던 죄로 인해 바알숭배 지역인 투로와 시돈보다 더 큰 형벌을 받는다. 이것은 왕국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이 얼마나 커다란 형벌을 받는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왕국복음을 거부함으로 인해 2,000년 동안 국가 없이 방황했다.
그들은 2,000년 동안 온갖 박해와 고통을 받고도 부족해서 앞으로 교회의 휴거 이후에 “야곱의 고난”이라는 대환란을 겪어야만 한다. 그들이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아들였다면 누릴 수 있었던 커다란 축복과 영화와는 얼마나 대조되는 일인가?
10:17-23 『그러나 사람들을 조심하라. 이는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또 그들의 회당에서 너희를 매질할 것임이라. 또 너희들이 나로 인하여 총독들과 왕들 앞에 불려가서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하리라. 또 그들이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시각에 너희에게 말할 바를 주시리라. 말을 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니라. 또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음에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고 일어나 부모를 죽게 하리라. 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들이 이 성읍에서 너희를 박
해하면 다른 성읍으로 피하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인자가 올 때까지 너희가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다 다녀 보지 못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거부한 죄로 고난을 당했던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다시 한 번 대환란을 겪게 되는데, 이때 다시 한 번 천국복음이 전파되게 된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위임하시는 천국복음의 내용 중에는 이러한 환란 기간 동안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가 제시되어 있다. 그래서 위의 구절들은 앞으로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 설정된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제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열두 제자들은 모두가 이러한 경고대로 취급받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가 공회에 넘겨진 것도 아니며, 모두가 총독들과 왕들 앞에 불려간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아니었기에 이방인들에게 천국복음을 증거했다는 기록도 없다.
사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 모순이 있다고 말하며, 성경은 (특히 예언적인 부분에서) 문자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모순아닌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열두 사도는 아니지만 같은 사도인 바울에게 적용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설명은 설득력이 있는데,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공회에 넘겨지기도 했고(행22:30), 매질도 당했으며(행16:2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총독들과 왕들 앞에 불려가서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하기도 했고(행 24, 26장), 한 성읍에서 박해당하여 다른 성읍으로 피하기도 했기 때문이다(행14:5,6).
그러나 바울은 여기 마태복음 10장에 등장하는 “너희”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열두 제자들과 바울의 임무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0장은 말했듯이 “천국복음”의 위임이다. 그런데 바울은 한 번도 “천국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은혜의 복음”만을 전했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전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천국복음에는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히심과 부활’을 이방인들에게 증거했다(고전15:3,4).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바울 사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이 구절이 환란기간에 있을 미래적인 사건이라는 이유는 단순히 이 구절이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열두 사도들에게 적용되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왕이 “거부”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왕국의 도래가 “연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크게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왕으로 오셨으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여, 천국이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마태복음 10장 뿐 아니라, 11장, 13장 및 성경의 여러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침례인 요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구약시대의 예언은 단지 왕국이 메시야 왕과 더불어 온다는 것이었다. 그 예언만으로 초림과 재림을 구분할 수 없었다. 만약 신약성경이 없었다면 지금도 우리는 그 분의 초림과 재림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예언에는 초림과 재림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왕국(천국)이 임할 줄로 기대했었고, 실제로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였다면 구약의 예언이 이천년 전에 모두 이루어져 당시에 천국이 도래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데, 어떻게 당시에 왕국이 도래할 수 있었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물론 구약의 왕국 예언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이 있다(시22편, 사53장 등). 그러나 이 죽음과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임하시는 또 하나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또 구약의 예언에는 메시야의 거부와 그로 인한 대환란과, 또 천국의 도래에 관한 예언이 모두 다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예언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이 예수님의 초림 때에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사도들이 아직 살아서 활동하던 기간이었다.
예언에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시22:16), 그 분의 부활 이후에 사도행전 2장이나 7장에서 베드로와 스테판에 의해서 다시한번 천국복음이 전해질 때 그들이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 왕”으로 받아들였다면(2장에서 거의 될 뻔 하였으나 7장에서 다시 거부되었다), 그때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교회는 휴거되어 어린양의 혼인식을 치루었을 것이고(시45편), 그때 땅에서는 “야곱의 고난의 때”라는 대환란이 시작되어 다니엘서 9장과 요엘서 2장의 예언을 이루었을 것이며, 그후에 메시야 왕께서는 재림하시어 “주의 날”에 대한 예언을 이루시면서(사2:12; 13:9) 민족들, 곧 이방 왕국들을 심판하시고(단2:44), 환란을 끝까지 견딘 유대이늬 남은 자들을 통하여 친히 이사야 11장에 묘사된 “천국”을 세우셨을 것이다.
이때 주님의 초림과 재림은 지금처럼 긴 기간으로 나누어지지 않았을 것이므로 초림과 재림은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함께 이루어지게 된다. 실로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였다면 구약의 예언은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2000년 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맡게 될 열두 사도들에게 이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의 이 구절은 당시에 일어날 수 있었으나 일어나지 않고 그 상황 그대로 미래에 일어날 것이다.
10:22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여, 성도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앙을 굳게 지켜야만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신학에서는 이것을 알미니안주의라고 한다). 실제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요한 웨슬리마저도 이 구절을 해석하지 못하여, 성도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반대하여 칼빈주의자들은 사람이 한 번 구원받으면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지키기 위하여 이 구절을 억지로 해석하는데, (물론 교회시대에 있어서 이 교리는 사실이다.)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락해 나간 사람은 원래부터 올바로 믿은 자가 아니다. 사실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원래 택한 자가 아니었다...”라고 말하곤 한다.
이와 같은 문맥의 구절들이 히브리서 3:6,14; 6:4-6에도 나오는데(『이는 우리가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확고하게 붙들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기 때문이라.』 히 3:14), 이러한 문제들은 이 구절들에서 “끝까지”라는 말을 잘못 해석할 뿐 아니라, 이 구절이 적용되는 시대적인 위치를 잘못 설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다.
여기에서 “끝”이란 한 개인의 삶의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끝까지”라는 말은 어떤 기간의 끝,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메시야 왕이 오시기 직전의 어떤 일정한 기간의 끝을 말한다(단 9:26,27; 8:17-19;7:26; 11:35-40; 12:8-13, 마24:13,14, 히3:6,14). 그 기간은 대환란 기간으로서 교회는 이미 휴거되어 이 땅 위에 남아있지 않는 기간이고, 교회시대의 경륜이 이미 끝나 다시 유대인의 경륜이 시작되어 구약에서 예언되고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복음이 성취되는 기간이다.
이 때는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되는데(「마태복음 연구 8』, 산상설교 II, 94,8월호 참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대적한 많은 민족이 있었고 하나님을 반역한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남은 자들이 있어 안식에 들어갔던 것처럼(히3,4장) 이때에도 많은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의 많은 무리가 죽고 또 떨어져나갈 것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견디는 자들,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끝까지 믿음과 행위를 지키는(계14:12) 유대인의 “남은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사10:20; 11:16).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같은 문맥인 마태복음 24장과 함께 A.D.70년의 예루살렘 파괴에다 적용하고, 심지어는 A.D.70년에 예수님이 영적으로 재림하셨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결코 영적이지 않고(계1:7), 이사야 11장에서 묘사된 문자적인 천국은 A.D.70년 이후에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더우기 A.D.70년이 “끝”이라 할 수 없는 것은 70년까지 견딘 사람 중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고, 70년 이전에 죽은 사람 중에서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또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사람은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들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는 결코 자기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더라.』
대환란 기간 중에는 예수님께서 전파하셨던 것과 똑같은 복음, 열두 사도들에게 위임되었던 것과 똑같은 천국복음이 다시 전파될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것과 똑같은 권세와 “표적”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다시 병고침의 이적을 행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새 방언들을 말할 것이며, 뱀을 집을 것이고,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막16:17,18). 그리고 이때 이들을 영접하고 이들이 전파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겐 화평이 임할 것이고(10:13), 그들은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다.
또 이 기간 중에는 많은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전쟁을 하고 또 핍박할 것이나(지난 2,000년 동안 그랬던 것보다 더 심하게),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민족은 양과 염소로 가르실 때 양으로 분류될 것이다(마25:31-46).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이후로(창12,15,17장)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다. 비록 지금 이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반역으로 떨어져나갔을지라도, 성경 예언에 따라서 다시 위대한 민족으로 재건될 것이다(롬11:26,27).
그리고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그들과 화친했던 나라들이 축복을 받아 번영을 누리고 그들을 저주하고 핍박한 나라들이 패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2,000년 교회사에서 배울 수 있다(창12:3).
앞으로 환란 기간에는 더 엄청나게 이 일이 일어나게 될텐데, 만약 이글을 읽는 독자가 구원받지 못해서 환란 기간 중에 이 땅에 남게 된다면 결코 유대인을 박해서는 안된라. 유대인을 도와주고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마태복음 25:31-46에 따라서 구원받게 될 것이다.
또 만약 독자가 구원받지 못해 환란 중에 남게 될 정치가라면(필자는 독자가 구원받아 이 환란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반드시 유대인 보호정책을 써야 한다. 결코 적그리스도의 세력인 바티칸과 협약을 맺지 말 것이며, UN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합의 할 때 그들과 동조하지 않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고립될 때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 그러면 이 나라는 환란을 겪은 다음에도 마태복음 25:31 -46에 따라서 “양”에 속한 민족으로 구원받아 천년왕국에 참여할 것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누구라도 구원받지 못해 환란 중에 남게 되었을 때(분명히 말하지만 필자는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기를 바란다.) 이 경고를 기억하고 “나는 몰랐다.”고 변명하지 말라. 필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분명히 경고했다. 무지는 결코 변명이 될 수 없다. 오 하나님 도우소서!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