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주석 분류
천국에 합당한 어린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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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1월호>
14장부터 17장까지의 전반적인 내용은 환란시대에 초점을 맞춘다. 이 부분들을 모두 환란시대라고 볼 수만은 없지만, 많은 부분에서 환란시대에 관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14장에서 침례인 요한의 죽음, 오병이어의 기적, 바다를 건너오시는 사건들을 통해 환란의 모습을 알 수 있고(14장 설명 참조), 16장에서는 시대의 표적들, 자신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제자들의 일들, 그리고 17장에서는 환란 중간에 나타나심과 왕국이 임하는 모습을 나타내신다(본 지 과월호들을 볼 것). 이제 18장에서는 “왕국”에 관해서 언급하시는데, 이것은 천국에 관한 직접적인 가르침이다.이것은 마태복음 4장에서 팔레스타인 전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타난 후 5-7장에서 산상설교를 통해 왕국의 법령을 전파하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4장에서는 왕국이 임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됐고, 5-7장에서는 환란시대와 왕국시대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래서 18장은 산상설교와 같은 위치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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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씀드리기를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회심하지 아니하고 또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면 그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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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가를 물었다. 이것은 제자들이 생각하던 천국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20장에서 자기 아들들을 천국에서 오른편과 왼편에 앉혀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이들이 요구한 것은 “욕심”일 수 있으나, 적어도 그들은 이 “천국”을 실제적인 정치적 왕국으로 보았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책망하시지 않았다. 그들은 현대의 신학자들보다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왕의 모습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었고, 그 왕이 통치하는 왕국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지를 한 어린 아이를 통하여 답하고 계신다.
중요한 것은 이 부분이 교회시대에 교리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교회시대에 영적으로 적용하려면 단지 “겸손”이라는 관점과, 하나님께 오기 위해서는 “회심”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적용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들을 교리적으로 적용시켜서, 누군가를 실족시키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져야 한다든지 하는 실제적인 적용을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이 시대에는 죄를 졌다고 마태복음 5장에서처럼 손을 잘라야 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나 이 구절을 교회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구원에 관한 문제이다. 성경은 이 부분에서 어린 아이는 천국에 합당한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2장에 따르면 유대인은 율법으로 판단받고 이방인은 양심으로 판단을 받는데, 그것은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양심에 근거한다(롬 2:12-15). 그러나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는 어린 아이들은 판단받을 근거가 없다. 물론 그 어린 아이가 죄인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죄에 대한 책임을 면했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인 지옥도 면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5:13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로마서 4:15은 『율법은 진노를 일으키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을 분별할 줄 모르는 어린 아기는 죄에 대해 책임이 없고, 따라서 그 아기는 구원받는다.
이러한 예는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명기 1:39은 『또한 너희가 먹이가 되겠다고 말했던 너희의 어린 것들과 그 날에 선악 간에 지식이 없었던 너희 자녀들은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로 그것을 소유하게 하리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카데스 바네아에서 범한 죄 때문에 카나안, 곧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때, 아직 선악을 알지 못하여 그들의 범죄에 참여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안식의 땅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즉 선악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죄의 형벌이 면제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사무엘하 12:23에서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기의 갓난 아이가 죽었을 때, 『내가 그에게로 갈 수는 있어도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말하면서 죽은 아기가 낙원으로 가 있다는 것을 말했다. 다윗은 구원받았고, 그는 거기서 그의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모든 인류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피가 뿌려진 상태이고, 또 그들은 죄의식이 없으므로 판단받지 않고 구원받는다. 그러나 성인들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도 비록 예수님의 피가 뿌려진 상태이나 그들이 선과 악의 분명한 의식 속에서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의 속죄 사역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자기들을 사신 피를 모독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썩어질 세상 것들과 바꾸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므로(롬1:21-25, 벧후2:1), 예수님의 피가 그들에게 뿌려졌을지라도 그들은 그 피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기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할 만큼 어린 상태에서 죽은 아기들은 예수님의 피를 거부하지도 않았고 죄의식도 없기에 비록 죄인일지라도 그 책임을 면제받아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그도 그 책임을 면제받을 수 없는 상태, 즉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면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아이는 무조건 지옥에 간다거나, 부모의 신앙 상태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된다거나, 혹은 선택된 어린 아이들만 구원받는다고 말하며, 로마 카톨릭은 어린 아이들이 “림보”라는 장소에 가 있는다고 말하지만, 이런 이론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비성경적인 이론들이다.
4절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천국에서 가장 큰 자라고 설명하시며, 5절에서는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을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동일시하신다.
물론 이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그리고 이 겸손은 “회심”과 연관된다. 교회시대에도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하고, 또 마음을 예수님께 돌이켜야(회심) 한다. 그러나 죄인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복음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겸손하지 않으며, 교만한 자들도 많다. 그렇다고 그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은 “천국”이고, “겸손”이란 권장의 차원이 아니라 반드시 갖춰져야 할 필수적인 하나의 “행위”로 작용한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어린 아이를 예수님처럼 영접해야 한다. 이것 또한 행위이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교회시대일 수 없다. 그것은 환란시대와 왕국시대를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복음을 위임하실 때 그들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과 유사한 문맥을 볼 수 있다.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또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사람은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들 중 하나에게 마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는 결코 자기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더라』(마10:40-42).
또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에 의인들이 주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여, 언제 우리가 주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실 때에 마실 것을 드렸나이까? 언제 우리가 주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대접해 드렸으며, 헐벗으셨을 때 입을 것을 드렸나이까? 언제 우리가 주께서 병드신 것을 보았으며, 또 감옥에 갇히셨을 때 찾아뵈었나이까?’라고 하리라. 그러나 왕이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하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내 형제 가운데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하리라』(마25:37-40).
그러므로 이 문맥은 마태복음 10장과 25장과 같이 환란 기간 중에 왕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기 위해 “행위”를 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부분이다. 교회시대에 적용하려면 영적으로 “겸손”, 영접을 위한 “회심”, 그리고 어린 아이의 구원에 대해서만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회심”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개인적”으로 예수님께 오는 행위를 말한다. 물론 이스라엘을 민족적으로 회심시키기 위해 침례인 요한은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고, 베드로도, 스테판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파했지만, 실제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개인”들이었다. 마지막에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부활할 것이지만, 그 때에도 믿음과 행위를 지켜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항상 “민족”으로 다루시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으켜서 큰 민족이 되게 하시고 그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통치의 왕국을 이루신다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유대인이라는 이름만으로 구원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께선 마태복음 12:50에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그 사람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개인들”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교회시대에는 더욱더 분명해진다.
회심한 사람의 마음 상태가 겸손하다는 것은 구약성경과 전환기 상태와 신약에서 모두 나타난다. 구약에서는 시편 131편, 시편 24편, 십자가 이전 상황(전환기)에서는 누가복음 10:21, 그리고 신약에서는 로마서 12:16에서 다루고 있다. 특히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성경을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이다.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벧전2:2).
18:6 『그러나 나를 믿는 이런 어린 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그의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으니라.』
이 경고는 마태복음 5,6장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마태복음 5:29-30 『또 만일 너의 오른쪽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던져 버리라. 네 지체 가운데 하나가 손상되는 것이 네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또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잘라 던져 버리라. 네 지체 가운데 하나가 손상되는 것이 네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것은 18:8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잘라서 던져 버리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나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너에게 더 나으니라.』
예수님께서는 왕국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항상 대조적으로 지옥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장에서도 그렇고, 10장에서도 왕국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지옥을 강조하셨다. [영어 성경 RSV는 이 구절에서 “실족하다”(offend)를 “죄짓도록 유혹받는 것”(temptation to sin)으로 변개시켰다. 그러나 “손과 발”이 실족한다는 것은 완전히 “범죄한 것”을 의미한다. 유혹을 받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지, 손과 발이 행한 결과와는 구분된다. 유혹을 받아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엄격한 왕국시대라 해도 유혹만 받았다고 손과 발을 자를 수는 없다.]
18:10 『너희는 이런 어린 아이들 중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항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뵙고 있느니라』
“천사”가 “현현”(appearence)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장에서 이미 공부했다. 성경에서 천사는 항상 남성으로 나타나며, 때때로 천사는 “교회”를 대표한다(계 1장). 다니엘에서는 한 민족을 대표하기도 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이 천사들이 “하늘”에 있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항상 하나님을 뵙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에 많은 천사들이 이 땅에 내려왔고, 앞으로 더 많은 천사들이 다른 천체에서 올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현현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뵙고 있다는 것이다.
현현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현현”, “주의 천사” 만이 아니다. 천사는 나타나고자 하는 자의 현현이다. 그러므로 “주의 천사”라고 하면 “주의 현현”이고, “어린 아이의 천사”는 “어린 아이의 현현”이다.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해서 “수호천사”의 개념이 생겼다. 수호천사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성도들에게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천사들이 따라다닌다고 한다. 물론 이와 같은 간증은 많이 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성도를 돕기도 하신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천사가 와서 도왔고, 바울도 감옥에서, 폭풍우 속에서 천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수호천사를 말하는 근거 중 하나는 히브리서 1:14이다. 『천사들은 모두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섬기는 영들이 아니냐?』 이 구절에는 천사들이 “섬기는 영”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더 자세히 보면 천사가 섬기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이다.
성경에서의 상속은 단지 자식이기 때문에 아무런 조건 없이 부모에게서 받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상속, 또
는 유업(inheritance)이라는 말은 항상행위와 관계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행위를 통해서 상과 유업을 받는다. 그리고 그 구원은 잃어버릴 수 없지만, 상과 유업은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이 생긴다. 이들은 행위를 지켜서 구원받는 자들이다. 환란시대와 천년왕국시대에 행위로 구원받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상속자”들이다. 천사들은 기본적으로 그들을 돕는 임무를 맡는다. 교회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돕는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원리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수호천사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시켜 왜곡시킨 그룹은 로마 카톨릭이다. 그들은 수많은 천사의 이름들을 갖고 있다. 누가 그 이름들을 가르쳐 주었는지 모르지만(마귀들이 타락한 자기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는지), 성경에는 오직 미카엘과 가브리엘이라는 두 천사의 이름만이 언급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