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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암과 니콜라파의 교리”를 퍼뜨린 퍼가모 교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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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9월호>
- 박해의 종식과 밀라노 칙령 -박해의 시대였던 스머나 교회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교회 시대의 막을 올렸던 주인공은 “대제”(大帝)라고 불리는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였다. 열 차례의 박해를 포함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하려는 움직임이 제국 차원에서, 그리고 국지적 차원에서 끊임없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딤후 2:9). 이제 제국 전역에 전염병처럼(행 24:5) 퍼져 버린 “기독교”를 통제하려면 로마로서도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따라서 정치적 셈에 능했던 콘스탄티누스는 차라리 로마를 하나로 통합할 종교를 “기독교”로 하자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었다.
A.D. 313년, 서방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황제였던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확인하고 여러 문제를 논의하는 차원에서 밀라노에서 회동을 가졌다. 그리고 이때 발표한 “밀라노 칙령”에는 “기독교”를 장려하고 “기독교인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돌려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후에도 “기독교”를 향한 로마의 구애는 지속되었다. 가령 A.D. 319년에는 성직자를 납세 등의 의무로부터 제외시켜 주었고, 일부 구역에서는 이교 제사가 금지되기도 했다. A.D. 321년에는 일반 도시의 시민들에게 일요일 휴무령이 반포되었다. 로마,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지에는 제국의 도움으로 커다란 교회들이 세워졌다.
- 에큐메니컬 정책과 그에 대한 반발 -
물론 “기독교”에 대한 호의는 오직 카톨릭 교회라고 불리는 집단에게만 한정되었고, “이단 분파”에 속한 사람들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목적 자체가 “제국의 통합”이었으므로, 기독교 자체가 분열되어 있는 것은 황제에게 전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특히 “도나티스트”라고 불리는 성경대로 믿는 그룹이 골칫거리였는데, 이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 때 믿음으로부터 떨어져나갔던 사람들이 은근슬쩍 다시 감독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들고 “카톨릭” 교회로부터 성별했던 사람들이었다. 도나티스트들은 한술 더 떠서 당대에 이미 많은 교회들에서 수용하고 있었던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교리를 마귀의 교리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으므로, 가히 “기독교계”의 “트러블 메이커”라고 할만 했다.
따라서 황제의 정치적 목적을 고려해 볼 때, 그 “극단적 분리주의자들”은 제거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나티스트들은 A.D. 314년과 316년에 황제로부터 정죄를 받았다. 그들의 교회는 폐쇄되었으며, 박해와 순교가 뒤따랐다. 그렇다고 도나티스트들이 완전히 멸절된 것은 아니었다. 퍼가모 교회 시대를 향한 예언에서도 드러나거니와(계 2:13), 퍼가모 교회 시대에도 신실한 순교자들은 계속해서 존재했다. 이들은 후일 이슬람 세력이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점령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고, 오차드(Orchard)에 따르면 한때는 로마카톨릭 교인들과 그 수가 비슷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 세상과 음행한 교회 -
도나티스트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의 주류는 점차 황제를 등에 업은 “카톨릭” 교회로 굳어져 갔다. 정교분리의 원칙, 즉 교회는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마 22:21) 원칙은 그들 가운데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황제가 공회를 열어 전 세계의 감독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교리”를 정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성경적 기준이 아니라 어느 편이 황제의 정치적 목적에 더 부합하느냐를 기준으로 수행되었고, 공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감독들도 이런 점을 점차 깨달아 그에 맞게 처신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로마의 통합”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정통”으로 승인되었고, 그와 달리 다수의 반대에 부딪힌다면 그 무엇이라도 “이단”으로 취급당했다. 그 더러운 이익 앞에 건전한 교리란 무참히 짓밟힐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딛 1:9).
그렇게 교회 안의 이단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 바깥에서 쥬피터, 다이아나 따위를 섬기던 이교도들까지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교리들이 교회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왔고, 교회는 점차 순수한 양무리가 아닌 이리(행 20:29), 여우(솔 2:15), 그리고 개, 돼지(벧후 2:22)가 득실거리는 동물원으로 변모했다. 회중들 중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으므로 그러한 비성경적 작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감독들을 통해 전파되는 공회의 결정 사항을 맹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영적 음행과 우상 숭배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곧 그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이단”들을 박해하는 대열에 서고 말았다.
세상의 권력과 야합하여 지역 교회를 타락시킨 당대의 감독들을 하나님께서는 “발라암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이었다고 평가하셨다(계 2:14). 그들의 행적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 숭배와 음행에 가담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발라암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던 까닭이다. 바야흐로 그 이름부터 “숱한 결혼”이란 뜻인 영적 음행의 교회 시대, “퍼가모” 교회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행실이 그들의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계획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음행의 영이 그들 가운데 있고 그들이 주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호 5:4).
- 니케아 공회 -
교회사가들은 이때에 교회들이 세속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것 자체는 부정적으로 평하면서도, 황제를 통해 소집된 에큐메니컬 공회를 통해 “기독교”의 교리가 발전되고 정립되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교회사를 통틀어 공회가 긍정적인 역할을 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우리는 피터 럭크만 목사가 <신약교회사>를 통해 지적했던 대로,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공회”에 대한 언급은 진리를 억압하는 데 헌신했던 성경을 거부하는 그룹을 지칭한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행 6:12).
흔히들 “삼위일체”의 교리를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하는 니케아 공회(A.D. 325)에서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는 예수님을 피조된 신이라고 생각했던 아리우스주의자들, 그들을 논박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를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카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이도 저도 아닌 다수들, 이렇게 세 부류가 모여 있었다. 니케아 공회에서 난 결론은 후자의 두 부류를 만족시키는 것이었고, 아리우스주의는 정죄되었다.
그러나 애당초 셋 중에 “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진 부류가 하나도 없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진 결론은 “아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신 분”이라는 것이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아들 하나님, 즉 『말씀』께서는 태초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요 1:1,2).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을 포함하여 전부 이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니케아 공회를 통해 이뤄진 일이란, 이단 종파들끼리 모여 황제의 간택을 받지 못할 이단 종파를 가려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니케아 공회에서는 어떤 교회에서 감독을 임명하려면 반드시 “대교구”의 감독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든지, 알렉산드리아, 로마, 안티옥의 감독들은 전통적으로 그러했듯이 그 관할 지역의 교회들을 지배할 권한이 있다든지 하는 조항들이 “교회법”으로 공표되기도 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한 지역 교회의 감독이 다른 지역 교회의 감독에게 권위를 행사해도 된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고전 16:12). 이는 명백히 주님께서 미워하신다고 말씀하신 니콜라파의 교리를 실행하는 것이었다(계 2:15). “니콜라”라는 말은 그 어근을 따져 들어가면 “사람들을 이기는(정복하는) 자”라는 뜻이고, 주님께서 승인하신 적이 없는 계급 체계를 만들어, 주님께서 부여하신 적이 없는 권위를 행사하려고 하는 일 전반이 바로 이 니콜라파의 교리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퍼가모 교회를 향한 경고 -
주님께서는 위와 같은 퍼가모 교회에게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분의 입의 칼로 싸우시겠다고 엄중히 경고하셨다(계 2:16). 그들을 대적하는 것은 “재침례”라는 반(反)카톨릭적 믿음을 가지고 있던 노바티안, 도나티스트, 유카이트, 카타리 등이 아니었다. 이런 무리들에게는 황제의 비호 아래 군사력까지도 손에 넣은 거대한 로마 제국의 기독교계에 위해를 가할 힘이 없었다. 그들을 대적하여 지옥에 던져 넣는 주체는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양날이 시퍼렇게 선 칼(히 4:12,13),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말한 그 말이 그를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요 12:48).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