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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공격(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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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1월호>
사무엘 포터 존스(1847-1906, 보통 샘 존스로 알려져 있음)는 찰스 다윈, 칼 막스, 리차드 와그너, 요하네스 브라암스, 비스마르크, 그랜트 장군, 드와이트 무디, 리 장군, R.A.토레이 등의 사람들과 동시대 인물이었다. 샘 존스가 설교하던 기간 중에 RV(1884), ASV(1901)가 심한 악취를 풍기면서 등장했다. 두 변개한 성서를 만들어 낸 성서위원회의 회원들과는 달리 샘 존스는 그 두 성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매년 400여 번의 설교를 36년간 하면서도 (하루에 네 번 설교한 적도 있다) 이 두 성서로 설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샘 존스의 설교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술집들이 문을 닫았고 극장이 문을 닫았으며, 그가 설교한 도시에서는 저주와 도박이 자취를 감추었고 수많은 죄인들이 회심했다(그는 RV, ASV, 혹은 그 어떤 헬라어 성경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1611년 <킹제임스성경>만으로 그런 부흥을 가져왔다). 그는 <킹제임스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암송하고 공부했으며, 그 성경을 놓고 기도했고, 그 성경을 놓고 울었으며, 그 성경을 설교했고, 그 성경 말씀을 실행에 옮기다가 주머니에 그 성경을 간직한 채 죽었다.샘 존스는 알라바마 주(프랭크 노리스와 밥 죤스 시니어도 알라바마에서 출생했다.) 오우크 보웨리에서 태어났으며 죠지아 주 카터스빌에 있는 남감리교 교단 소속 순회 설교자였다. 그는 1년에 65달러를 받았었고, 미국 주요 도시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던 그는 가족 중 한 사람의 매우 인상적인 임종을 지켜보다가 그의 할아버지에 의해 그리스도께 인도되었다.
샘 존스는 구원받은 후 1611년 <킹제임스성경>을 들고 죄인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그의 설교에 회중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저주를 퍼붓기도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하며, 거부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며, 비판하기도 하고, 회개하기도 했다. 세인트 루이스 시의 시민들의 생활은 그의 설교로 인해 완전히 변화되었다. 카드놀이 파티가 중단되었고 극장의 관중이 줄었으며 기타 세상적인 오락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에 대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상습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보스톤 대학 신학부의 파괴적 비평을 전공으로 하는 W.L.스티져 교수는 샘 존스에 대해 “그는 쇼맨십이 강하다.”고 비난했다. 어떤 도시의 시장은 지팡이로 샘 존스를 때렸고, 다른 사람은 우산으로 그를 내리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헛간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리기도 했다. 신문들도 그를 격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가 신문사들의 수입에 치명타를 가했기 때문이었다(모든 신문들은 술 광고를 싣고 있었다). “칼 막스”의 후계자들(칼 막스는 신문기자 출신이었다)은 샘 존스의 발언을 왜곡시켜 보도했고, 그의 발언을 고의적으로 틀리게 인용했으며, 문맥과 상관없이 몇 문장을 빼내어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1929-1932년 당시도 모든 언론들은 금주령이 내려진 기간 동안 술 광고를 다시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썼다).
샘 존스에 대한 공격은 로마 카톨릭 당국이 라는 잡지를 통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의 와중에서도 우리의 순회 전도자는 위스키로 취해 버린 세인트 루이스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외쳤다. “내가 만약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고, 제때에 채무를 갚고, 한 아내만을 두고서 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그런 설교를 하고 다닌다면 나는 매번 용서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 할례받지 못한 필리스티아인들에게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다윈, 막스, 헉슬리, 모리스, 홀트 및 RV 등과 더불어 지내던 당시의 교육받은 계층에게 샘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겁쟁이들아, 파리가 너희 콧잔등에 앉으면 한쪽 눈을 발길질하고 다른쪽 눈도 발로 차버릴 것이다.”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한 샘 존스의 교리적 입장은 분명했는데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의 후보자가 아니라면 선택하실 수 없다.”고 말했다(무조건적인 선택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을 선택한다는 말). 구원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교육받은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도 분명했다. “나는 지옥에서 헬라어를 읽느니보다 차라리 하늘에서 ABC를 배우겠다.” 게다가 샘은 매우 실제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대신 해 주시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기이한 발언”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곤 했는데 한 번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열린 집회에서 “자기 남편에게 욕을 한 번도 안 해본 여자들이 있다면 일어나 보시오.”라고 말했다. 뒷좌석에서 세 명의 여자가 일어서자 죤스는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은 지금 웨스트버지니아에서 가장 형편없는 거짓말쟁이들을 보고 계십니다.”
샘 존스는 빌리 선데이처럼 그 어떤 이유로도 <킹제임스성경>을 고쳐 본 적이 없다. 이 두 사람의 설교자는 라오디케아 시대(현대)의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이 현대 역본들이 “의미가 분명하고” “번역이 더 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해준다.”는 핑계로 부패한 성서들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빌리 선데이는 “성경이 말하는 것과 학자들이 말하는 바가 다르다면 학자들이 마귀와 한편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은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무오한 원본”을 믿는다고 하면서 <킹제임스성경>의 오류를 지적하는 구원받은 보수주의자들과 그 어떤 무오한 것도 믿지 않는 구원받지 못한 자유주의자들을 동일하게 취급했다. 죤스와 선데이에게 있어서 “학문”은 성경보다 아래에 놓여져야 하는 것이었다(그 누구의 위대한 학문이라 할지라도). 샘 존스가 J.그레샴 메이첸, 벤자민 위필드, A.T.로버트슨, 빈센트, 타이어, 로버트 딕 윌슨, 그린, 필립 샤프, 웨스트코트, 홀트, 브릭스, 드 라이버, 델리취, 라이트푸트, 엘리코트, 뉴만 추기경, 칼 막스, 레닌 그리고 챨스 다윈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존 패튼, 헨리 마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및 샘 존스 같은 사람의 전기와 이 세상의 영웅들의 전기를 비교해 보면 능력과 은혜로 충만했던 밝은 태양 곁에 희미한 촛불이 켜 있는 느낌이다.
은퇴한 감리교 감독인 에드윈 휴즈는 샘 존스에 대해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에 못지 않은 품위 있고 우아한 연설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청중들이 그의 지성과 학식을 증명해 보이기를 기대했을 때 (그는 회심 전에는 변호사로 일했었다.) 샘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이여 들으라! 이 도시의 사려깊은 시민들은 당신들이 저지르는 그 저주받을 행위들로 인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 이 도시를 아직도 심판하지 않으셨도다.’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들의 시장은 도덕적 기상이 전혀 없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줏대 없는 사람일 뿐이다.”
거칠고, 직선적이며, 과격한 설교를 들으러 온 청중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심판은 법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사건의 공정한 평결을 의미하나 종교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천사들을 그의 백보좌 앞에 동시에 소환하여 하나님 자신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문제들을 철저히 심사하는, 하늘에 있는 법정에서 도출될 최종적인 평결을 의미한다.” 챨스 다윈, 헉슬리, 헤켈 등은 샘 존스의 통찰력과 기지를 쫓아갈 수 없다. 밥 잉거솔(1833-1899)과 독일의 관념론자들(스트라우스, 그라프, 드베트, 벨하우젠)에 대한 그의 답변은 실로 명쾌하며 깊이 있다. “내가 성경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나와 별 차이 없는 누군가가 성경을 썼다는 말이다.”(하나님께서 쓰셨기 때문에 성경을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
죤스의 표어는 “당신의 비열함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홀콤에 따르면 “악을 그치고 선을 배우라.”는 짧은 표현으로 샘 존스의 모든 메시지를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볼티모어에서 2,500명, 토론토에서 6,000명, 로스앤젤레스에서 1,000명 그리고 테네시 주 네시빌에서 수천 명의 회심자를 얻었다. 알라바마의 리폼(Reform, ‘개혁’이란 뜻) 시는 샘 존스가 그곳에서 집회를 열고 난 후에 그곳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죠지아 주 토마슨 시에서 열린 샘 존스의 집회에서 구원받은 한 사람은 우리의 복음 전도자에게 가장 적합한 묘비문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그는 몸에 딱맞는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강단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먹이에 바싹 다가선 채 그의 청중들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펌프 손잡이로 은혜의 샘물을 퍼올리듯이 오른손을 위 아래로 힘있게 내젓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정확하게 ‘아멘’ 화답을 유도해 냈는지! 그는 청중의 자긍심과 자기 만족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신음과 훌쩍임과 눈물 속에서 청중들은 무릎을 꿇었고 고통 가운데 큰 소리로 울었다. 그때 그는 우리 죄인들에게 그의 살인 청부업자들을 보냈다.”(“살인 청부업자들”, 이들이야말로 필라델피아 시대로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위해 출현한 용사들이다.) “그는 우리의 마음밭을 샅샅이 갈았다. 그는 우리를 몰아붙였고 조롱했으며 우리에게 호통을 쳤고 우리를 비웃기도 했다. 그는 우리를 보고 귀가 축처진 사냥개라고 부르기도 했고, 술고래, 맥주에 절은 놈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 모두가 위선자이며 거짓말쟁이라고 분명하게 말했고 우리들 대부분을 도둑질도 할 놈들이라고 거칠게 꾸짖었다.” “그의 설교 이후 마을은 더이상 옛날 그대로가 아니었다. 도박은 사라졌고 길거리에서는 욕지거리가 자취를 감추었으며, 술집들은 문을 닫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를 샘 존스는 <킹제임스성경>으로 이룩했다. 그가 사용한 성경은 결코 “축자적으로 온전히 영감받은 원본”이 아니었다. 그는 1611년 <킹제임스성경>을 가지고 그와 동시대 사람들(다윈, 헉슬리, 헤켈, 홀트, 막스, 헤겔, 메리 베커 에디, 브리아엄 영, 러더포드 판사, 럿셀 목사, 르낭, 니체, 샤프, 죠셉 스미스, 슐라이어마허 등)이 70년 동안에 이룩하지 못할 일을 7주만에 해내었다. 영적 진리의 보급과 개인의 영적 개혁에 관해서라면 이들 수많은 세속적 영웅들의 모든 학위와, 연구와, 이론과, 저작을 다 합쳐도 샘 존스의 사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죤 피스크(1842-1901)가 다윈의 진화론을 미국에 소개했을 때 그는 챨스 핫지(1797-1873)라는 프린스톤 대학의 신학자의 반대에 부딪혔다. 테오도르 커일러와 토마스 드빗 탈메이지라고 하는 설교자도 이에 반대했다. 이 세 사람 중 탈메이지가 가장 효과적인 설교자였으며 가장 성경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탈메이지(Talmage, 1832-1902)는 변호사가 되고자 했었다(루터, 터툴리안, 크리소스톰, 샘 존스, 그리고 토레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뉴 빈즈윅 신학교에서 공부했는데 20세 때쯤에는 벌써 설교를 하고 있었다. 부룩클린에서 목사로 일했던 그는 「크리스챤 헤럴드」라는 신문을 편집했고 그의 설교는 600여 개의 신문에 정기적으로 게재되어 2천 5백만 명의 국내외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 탈메이지는 문자적인 하늘과 문자적인 지옥을 믿었으며 유아세례로는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모든 인간은 회개하고 삶을 정결케 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하고 성경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런 메모없이 청중을 사로잡는 그의 능력은 당대 그 누구와도 비길 수 없이 특출한 것이었다. 탈메이지의 설교는 짧고, 빨랐으며, 면도칼처럼 예리했다. 50초 내지 60초 동안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문장 속에는 오늘날 대학 졸업자들도 알아듣기 어려운 어휘들로 가득차 있었다. 탈메이지의 설교는 드라마틱한 설교가 문어체로 제시된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드라마틱한 설교가로는 휫필드, 비쳐, R.G.리 등이 있다). 그는 베이커 북 하우스 사에서 출간한 30권의 설교집을 갖고 있고 그의 전기는 <소우셜 다이너마이트>라는 책에 벤 노스트에 의해 잘 제시되어 있다(Chicago, Standard Publishing Co., 1887년).
윌리암스 부스(1820-1912)는 평생 동안 1611년 <킹제임스성경>만을 사용했다. 그의 생애 기간 중 이미 배교한 보수주의자들이 애호하던 “성서들”(1885년의 RV, 1901년의 ASV)이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올바른 성경을 선택할 줄 아는 분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2백만이 넘는 부랑아와 거지들을 구원으로 인도했다. 그는 감리교단이 획일적인 복음을 전할 것을 요구하며 그의 사역에 제동을 걸자 교단을 떠났다. 감리교단은 그가 목사로서 교회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사람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를 순회 전도자로 만들려고 했다. 그가 데려온 사람들 중에는 뚜쟁이들과, 죄수들과, 창녀들과, 주정뱅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캐더린 부스(윌리암스 부스의 아내)는 감리교 총회에서 남편이 교단의 정치 목사들로부터 목사직을 내놓고 순회 전도자가 되도록 권고받자 양산을 내던지면서 “절대로 안돼”라고 소리쳤다. 결국 윌리암 부스는 목사직에서 쫓겨났다. 그는 런던에 있는 헬즈키친으로 가서 거리에서 설교했다. 그의 동조자들도 그와 함께 설교했다. 그들은 돌팔매질을 당했고 달걀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와중에서도 그들의 공격자들에게 “고맙습니다.”라고 고개숙여 인사했다고 한다. 부스는 커다란 베이스 드럼과 빨갛고 노란 깃발(피와 불을 상징)을 들고 시내로 가서 수천 명을 구령했다. 후일 그의 “구세군”(Salvation Army) 부대가 전세계를 누비자 그는 크리스마스 인사를 대신해서 한 단어로 된 전문을 보냈다고 한다. 그 전문에는 “다른 이들”이라고 써 있었다.
그가 인도를 방문할 당시(1900) 그는 이미 위대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가 배에서 하선할 때는 밴드가 동원되었고 공작, 공작부인들, 인도의 황후와 지도급 인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러나 부스는 이런 환영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갑판에 서서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 있는가? 나는 그들을 보러 왔다.”라고 외쳤다. 그는 문둥병자들과 부랑자들을 보러 왔었다.
부스가 죽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아침식사로 물에 넣어 요리한 달걀을 가져오자 그는 울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왜 우는지를 묻자 그는 “수백 명의 런던 시민들이 오늘 아침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데 나에게 이런 달걀을 가져왔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첼 린세이는 이 십자가 군병을 위해 가장 훌륭한 비문을 기록했다. “부스는 커다란 베이스 드럼을 들고 ‘당신은 어린 양의 피로 씻김을 받았는가’라는 찬송을 인도했다. 성도들은 진지한 미소를 띄며 ‘그가 온다. 당신은 어린 양의 피로 씻김을 받았는가, 그 사람이 온다구.’라고 말했다. 거리를 방황하던 문둥병자들은 그 행렬을 따랐고, 휘청거리고 있던 주정뱅이들도 어두운 도랑에서 기어나왔고, 매춘부들도 골목길에서 마약으로 창백해진 얼굴과 술냄새를 풍기며 따라 나왔다(여전히 정욕으로 가득차고, 나약한 의지력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세상의 악으로 찌들어 있던 성도들도 죽은 행실과 냄새나는 모습을 지닌 채 행렬에 참가했다. 당신은 어린 양의 피로 씻김을 받았는가? 부스는 때로 행렬을 멈추고서 기도를 할 때도 어린 양의 피로 씻김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깃발로 가득찬 공중을 통해 그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린 양의 피로 씻김을 받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행렬이 무릎꿇고 있는 동안 그의 용사 부스를 위해 흰옷과 면류관을 들고 부드럽게 강림하셨고 그는 그 거룩한 지성소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왕이신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고 있었다. 당신은 어린 양의 피로 씻김을 받았는가?”
부스는 그의 사역 동안 한 번도 RV나 ASV를 만져 본 적이 없다. 실로 위대한 “구령자”였던 부스는 밥 죤스, 옥스포드, 캠브리지, 펜사콜라 기독대학, 콜게이트, 로체스터, 테네시 탬플, 시카고 대학 교수진들보다 훨씬 뛰어난 분별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