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약교회사 분류

카톨릭의 음모와 반격(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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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1월호>

니카라과,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스페인령 기아나, 뉴그라나다, 카르타헤나, 칠레 등지에서 말하는 “회심”이란 A.D.500-1000년 당시의 암흑시대의 의미를 그대로 갖고 있다. 카톨릭 교회는 성경 대신 기도서, 미사집 및 교리문답 등을 가르쳤고 자선을 베풀도록 가르침으로써, 배운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사람들을 교황의 복종으로 이끌도록 하였다. 카톨릭 교회는 종교재판관들을 보내 스페인에서 혁명분자나 말썽꾼들을 몰아냈다. 카톨릭 교회는 선행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침으로써 이교도 종족들의 “도덕적, 영적 수준”(?)을 높였다. 카톨릭 교회는 자선기관을 세웠고 학교와 병원도 세웠다(이것은 카톨릭 교회국가를 세우기 위해 세금을 거둬들여 이룬 일이다).
모든 동전에는 앞뒷면이 있는 법이다.
콜롬부스가 미대륙에 가져온 “거룩한 믿음”은 시몽 드 몽포르, 클레멘트 8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도르께마다 및 “피의 메리”의 믿음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이 멕시코와 중남미의 인디안들을 “믿음”으로 “회심”시키고 있는 동안, 그들의 교회가 유럽에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었다는 것은(1500-1800) 역사적 사실이고 그 어떤 법정에서도 증거로 제시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1560년에는 1200명의 위그노들이 프랑스의 아보이즈에서 참수당했고, 바시에서는 50여 명이(1562년 3월 1일) 그들이 살던 도시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했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1582년에는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영어로 된 카톨릭 성서가 출판되어 커버데일, 틴데일, 비숍 성경(1568) 및 제네바 성경 등을 없애 버리려는 음모가 시도되었다. 1588년에는(7월 19-21일) 180명의 수도승과 신부(“선교사”)들이 스페인 함대에 선승하여 “영국의 해악”을 중지시키려는 작전에 참여했다. 700여 명의 영국 카톨릭 교도들이 화란에서 이 배에 동승했다. 이들은 영국에다 예수회가 펴낸 림즈성경(1582)을 보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카톨릭 함대는 32척의 배와 10,185명의 카톨릭 군인 및 선원들을 잃고 말았다. 결국 카톨릭의 예수회의 림즈 성서는 영국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의 해악”을 막기 위해 두 명의 카톨릭 교도가 예수회 사제의 지휘하에 제임스 국왕을 암살하려고 기도했고 영국의회를 폭파하려고 했었다(1605). 이 사건 역시 “카톨릭 정신을 비방하는 것”으로 카톨릭은 생각하고 있다.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30년 전쟁(1618-1648)은 카톨릭 통치자들이 그들의 맹세를 어김으로써 발발하였다. 그들은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의 규정을 어기고 무장 군인을 동원하여 비무장 민간인을 죽였다. 1642년 영국 왕(찰스 1세)은 해외에서 카톨릭 군대를 고용해서 자기 나라 시민을 죽이려고 했다. 다행히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참수형을 당했다(1649년 1월 30일). 1660년 찰스 2세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로부터 예배의 자유를 박탈했고 크롬웰의 시체를 파내어 목을 잘랐다. 그는 또한 “반카톨릭 고집쟁이들”인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다. 카나다에 있던 프랑스의 카톨릭 교도들은 인디안들과 함께 카나다, 노바스코티아, 뉴잉글랜드에서 영국인들을 쫓아내려고 했다. 이들에게도 “영국의 해악”은 반카톨릭적 내용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던 1611년 권위역본 성경이었다. 프랑스와 인디안과의 전쟁이 발발하기(1756) 이전에조차도 뉴욕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선포되었다(1735).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 14세와 피우스 9세는 곧바로 이 선언이 “이단”이라고 선포해 버렸다. 프랑스와 인디안 간의 전쟁은 1763년에 끝났고 카톨릭 측은 카나다의 상당 부분과 미국의 중서부 일대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로써 미시간, 남북 다코타, 아이오와, 일리노이, 위스콘신, 미네소타 주가 교황의 소유가 되는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 프랑스는 95%가 카톨릭이었고 루이 15세(1715-1774)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왕도 식민지로 갖고 있던 루이지아나와 인도를 상실했다. 그의 통치 기간 중 로레인 지역(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지역)이 오스트리아(게르만족)에서 프랑스(라틴족)로 넘어갔다(1735년 비엔나 조약).
1789년 6월 20일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고 7월 14일에는 파리의 군중들에 의해 바스티유가 습격당했다. 카톨릭 국왕(루이 16세)과 그의 가족은 체포되었고(1791년 6월 21일) 1793년에 참수형에 처해졌다. 프랑스 혁명에서는 사람을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세 가지 기막힌 어휘가 등장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 평등, 박애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통해 그 누구도 자유를 얻지 못했고 그 누구도 평등하게 되지 못했으며, 혁명 지도자들의 “박애” 정신은 죽은 시체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늑대 무리를 연상케 했다(당통, 로베스 피에르, 마라, 볼테르, 루소 등). 프랑스 혁명은 1914년 볼셰비키 혁명까지 유럽에서 계속된 일련의 현상들의 시작이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국가 교회의 통제하에 있던 군주에 대항하여 일어난 혁명이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로마 카톨릭이었고 러시아의 경우는 그리스 정교회였다. 이러한 사건들을 논하면서 교황, 대주교, 추기경, 총주교들과 그들의 목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를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볼테르(1694-1778)와 몰리에르(1622-1673)는 카톨릭에 의해 교육받았고 당통(1759-1794)과 마라(1744-1793)도 카톨릭 교도로서 성장하여 견진성사를 받았다. 1610년부터 1789년 사이의 모든 프랑스 왕들은 견진성사를 받은 카톨릭 신자로, 로마 당국에 복종하지 않으면 파문이나 성무 금지의 고통을 당한다는 위협 속에서 로마 당국의 권위에 순복하였던 자들이다. 따라서 혁명의 “원인들”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부패한 성직 계급과 부패한 교회가 부패한 국왕과 부패한 정부와 더불어 스스로 멸망을 초래한 것이었다.
42 / Bible Believers

프랑스 혁명 시대에는 전세계에 걸쳐 AV 성경이 수십 개의 언어로 설교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의 구원받지 못한 인문주의자들이 성경적 기독교 대신 자유주의(인문주의)를 삶의 가치로 택하고자 하였다. 프랑스의 케네이, 영국의 아담 스미스, 그리고 게믈린, 슈텔러, 팔라스, 리내우스, 에울러 등과 같은 “과학자”들과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 스피노자 등과 같은 철학자 등이 이들에 가세했다.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등은 “사회주의적 인문주의자들”(“선행을 행하는 자”)이었다. 이들은 모든 카톨릭 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었다. 드포우, 교황, 스테르네, 골드스미스, 레싱, 클롭 스탁 등은 모두 이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과 해결책을 찾을 때 동일하게 생각한다(출20:2,3과 그 주석의 설명 참조)].
삼부회가 1789년 8월 4일 모였을 때 그들은 인권선언(8월 26일)을 했다. 그러나 이 선언에는 미국의 권리선언처럼 성경적 침례교의 배경이 없었다. 프랑스의 정신적 배경은 90%가 로마 카톨릭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에 대한 반동으로 프랑스의 인권선언은 무신론적 색채를 띠고 말았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의 신이며 하나님이나 성경과 관계 없이 스스로의 율법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신론은 카톨릭에 대한 논리적이고 공산주의적인 반응이었다. 프랑스의 인권선언이 말하는 “자유”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이 자유는 “내가 먼저고 너는 그 다음”이라는 원칙에 따른 동물적인 자유를 말한다.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 중 98%가 로마 카톨릭이었으므로 그들은 1790년 제한 군주제를 제정하고, “해방”된 모든 시민은 로마 카톨릭 성직자들의 봉급을 지불하기 위해 여전히 세금을 내야 한다고 확정했다(교회의 땅과 수도원이 국가에 의해 몰수되기는 했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은 미국의 권리선언이나 헌법과는 전혀 닮은 곳이 없는 “혁명”이 되고 말았다.
“아름다운 프랑스”에서 아직은 모든 것을 잃지 않았다고 판단한 교황은 1790년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의 마피아 조직을 동원해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 마피아는 교황의 “서임” 권한을 대신해서 프랑스의 내정에 개입했고 이로써 바티칸에서 파송된 첩자들이 프랑스의 새 정부를 전복시킬 음모를 꾸밀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카톨릭의 정치적 공작은 국왕을 처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달력에서(역사적 사실에서) 제거시켰으며 소위 “공포정치”라고 불리는 폭정을 편 지롱드 당의 반격을 야기시킨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로마 카톨릭 정치가들과 정치적 책략에 의해 어려움이 닥치자 공안위원회는 자신들이 인권선언에서 옹호한 모든 자유를 폐지해 버렸다. 마라는 당통에 의해 처형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도인 로베스 피에르가 정권을 잡았다(1794). 공포정치는 “인류의 형제애”(Brotherhood of man)라고 불렸다(모든 현대의 로마 카톨릭 신앙고백을 들어 보라). 비록 이 공포정치로 프랑스에서의 로마 카톨릭 제국주의의 권세가 일시적으로 무너지긴 했으나 프랑스의 문제들의 해결책으로서 성경이나 성경에 대한 믿음은 전혀 회복되지 못했다.
이 모든 사건들은 반교회사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킹제임스성경>의 설교와 교육이 전세계에 확장되는 것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음모와 반격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그는 유아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은 로마 카톨릭 교도였다)이 권좌에 오르자 즉각 교황과 밀약을 체결했다(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샤를마뉴(유아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은 로마 카톨릭 교도)가 시도했던 것처럼 무력으로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려고 했다. 나폴레옹은 황제에 등극하자(그러나 그는 샤를마뉴가 크리스마스 때 저지른 실수는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을 종식시키는 것이라고(1805년 12월 2일) 비난을 받았다. 왜냐하면 거룩한 아버지가 왕관을 씌워 준 것이 아니라면 이 제국은 더이상 “거룩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로마 교황의 과대망상적인 주장대로 모든 역사가들은 1805년을 “신성 로마 제국”의 종식으로 간주한다. 실로 무지몽매하고 비합리적인 맹종이 아닐 수 없다. 신성 로마제국은 출발부터 거룩해 본 적도 없고 제국이 된 적도 없다. 상황은 A.D.800년 당시와 비슷했다. 나폴레옹이 교황국(1808)을 합병했을 때 카톨릭 신자들은 몹시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많은 카톨릭 교도들이 인문주의자와 무신론자들과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다행히 이들 무신론자들은 나폴레옹의 궁 안에 친구를 하나 갖고 있었는데 그는 세례받고 견진성사를 받은 카톨릭 신자로 텔리란드(1754-1838)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고, 맹세는 때때로 지켜지지 않아도 된다는 예수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였다.) 혁명주의자들이 서로 다투도록 유도했고 프러시아로 하여금 나폴레옹을 공격하도록 권고했다. 이런 짓은 그가 나폴레옹의 외무장관으로 봉직하면서 저지른 것들이다. 결국 프로테스탄트인 프러시아 군대와 (1813) 카톨릭인 오스트리아 군대는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을 잠시 곤경에 빠뜨렸다.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교황은 정말로 어려운 곤경에 처하면 프로테스탄트들에게도 종교통합의 제스츄어를 써서 그들의 군대를 이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멋진 전략이다!).
카톨릭 신자였던 나폴레옹 황제가 엘바섬으로부터 귀환헸을 때(1815년 3월 1일) 그는 워털루 전투(1815년 6월 18일)에서 프로테스탄트인 영국과 프러시아 군대에게 패배하였다. 이에 카톨릭의 “신성동맹”이 교황 알렉산더 1세에 의해 성립되어 새로 부활한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로서 카톨릭 교황을 옹립하고자 했다. 그는 이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비엔나(카톨릭 오스트리아)를 동맹의 중심지로 지정하여 그곳에 프러시아와 러시아를 받아들였다(그런데 나폴레옹은 바로 이 “신성동맹”의 창시자였다. 비엔나는 다시 1960년 유엔의 원자력위원회의 센타를 두게 되었다. 이 나라는 100명 중 99명이 카톨릭 교도인 철저한 카톨릭 국가이다). 나폴레옹은 “신성동맹”을 세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그가 교황과 체결한 밀약의 조건에 따라 카톨릭 교회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히틀러와 무솔리니도 동일한 처지에 놓였었다). 나폴레옹은 유럽 카톨릭 연합국(합중국)의 수도로 파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반면에 (히틀러나 샤를마뉴도 그랬다) 교황은 로마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시대에든 그 어느 시대에든, 영국, 프랑스, 프러시아, 독일 등이 로마를 유럽의 수도로 원하지 않는 때는 그 어떤 교황도 유럽에서의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 “민족주의”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 혹은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인이 아니었다. 이 전쟁들은 카톨릭 재상들, 카톨릭 주교들, 성직자들, 통치자들 및 교황들이 그 어떤 나라도 평화를 유지하거나 이웃 나라와 화평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부추겼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믿지 못하겠거든 아브로 맨하탄이 쓴 책들에 제시된 자료들을 읽어 보라.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은 1805년 이래 모든 교황들의 목표였을 뿐 아니라 향후 10년 이내에 사탄이 이루고자 하는 바요, 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이 이에 대해 이미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살후 2장, 계 13,17장). 이 제국의 수도는 로마가 될 것이요(계 17장)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베를린도, 북경도, 모스크바도, 파리도, 런던도 아니다.
유아세례와 견진성사로 확고한 카톨릭이 된 메테르니히(1773-1859)에 따르면 유럽의 안보는 러시아와 영국 간의 평화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 밖의 나라들은 별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메테르니히는 영국의 프로테스탄트들과 러시아의 그리스 정교회 카톨릭들과 협력하고자 했다. 이들 두 나라가 서로 다투지 않으면 교황은 중부 유럽 즉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을 다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히틀러가 영국을 다룰 때 구상했던 외교 정책 역시 동일한 생각에 기초했다. 두 명의 카톨릭 신자(메테르니히와 텔리란드)가 바티칸의 정책과 더불어 수년 동안 자리뺏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제 1차, 제 2차 대부흥 운동(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파스칼, 보일, 할레이, 류위호엑, 라신, 몰리에르, 드라이든, 코르넬리유, 베르메르, 할스, 렘브란트 등이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을 돕도록” 함으로써 인간이 더욱더 인간다워져서 “모든 인간”이 잘 살 수 있는 왕국을 세워 보고자 애쓰고 있는 동안(The Sure Word of Prophecy, 1970) 필라델피아 시대의 용사들은 죄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거룩해지도록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에 관심을 갖도록 함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들은 성경에 순종하고 있었고(행 1장, 마 28장), 반대로 구원받지 못한 “선행을 행하는 자들” (do-gooders)은 종교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문서를 위조하고, 조약을 파기하고, 재산을 훔치고, 군대를 죽이고, 소신을 버리고 타협하며, 서로 미워하고, 암살 음모를 꾸미고, 서로 시기하며, 사기와 속임수를 일삼으면서 자신들의 욕심과 목표를 이루려고 날뛰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1940-1990년 사이에 선행으로 구원받으려는 자들이 하고 있는 짓이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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