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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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성경>, 대한성서공회의 상업주의에 날개를 달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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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01월호>

"변개된 성경”은 그 외양을 아무리 화려하게 포장한다 해도 “썩고 부패한”(corrupt, 고후 2:17) 성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어떠한 이름으로 출간되었든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보급되었든지, 그것으로 성경의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살아 있는 권위란 다수의 사람들의 결정이나 채택을 통해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 유명 인사들의 추천서가 그 권위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무모함”과 “무지함”으로 언제까지 자신의 죄들을 계속해서 채우려 할까마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그들은 반드시 숙고해야 할 것이다. 『이는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듣는 각 사람에게 증거함이니 누구든지 이것들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삭제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책과 거룩한 도성과 이 책에 기록된 것들에서 그의 부분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얼마 전 숭실대학교가 개교 110주년을 맞이하여 <문화성경>이란 새로운 이름의 성경을 출간했다. 이는 성경 본문 자체를 새롭게 번역 출간한 것은 아니고, 소위 성지와 세계 곳곳의 박물관 및 교회 등 20개국으로부터 성경과 관련된 자료들을 직접 답사하고 촬영하여 사진과 해설을 성경 각 페이지에 수록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는 데 그 의의를 두고 있는 성경이다. 답사한 곳만 해도 20개국 이상, 직접 촬영한 사진만 해도 천 장 이상이 된다고 하니, 그들이 한 권의 성경을 출간하는 데 들인 “열의”(?)가 어떠한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문화성경>에 거는 기대, 바꾸어 말하면 성경 속 “문화”에 대해 갖고 있는 가치관과 그 의의를 살펴보면 그들이 성경을 대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우선 그들은 “성경의 메시지는 문화의 옷을 입고 전달된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메시지를 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당시의 문화를 바로 이해했다 하더라도 성경 본문이 바르지 못하면 온전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화성경>에 사용된 본문은 진작 폐기되었어야 할 <개역개정판>이다. 이것은 3만 군데 이상 변개된 <개역성경>을 7만 군데 이상 수정한 것이지만, 여전히 <개역성경>과 동일하게 3만 군데 이상의 심각한 변개를 그대로 담고 있는 “부패한 성경”에 불과하다. 변개된 본문에 어떤 “화려한 날개”(“문화의 옷”)를 달아 준다 해도 “살아 있는 말씀”이 되지 못한다.
“문화를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일례로, 고린도전서 13:12을 살펴보자. 「우리가 지금은 거울[mirror]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개역개정판). 그들은 이 구절에 관해 ‘바울이 말한 거울은 오늘날의 거울이 아닌, 로마 시대 고린도 사람들이 사용했던 청동거울이며, 그 청동거울에 비친 얼굴은 희미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실로 유치한 수준의 주해를 달아 놓는다. 바르게 보존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우리가 유리[glass]를 통해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이요』(한글킹제임스성경). 진리의 말씀은 “청동거울에 비친 얼굴의 희미한 모습” 따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얼굴과 얼굴을 대면”(face to face)할 재림에 관한 소망이나,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에 있는 “유리 바다”(a sea of glass, 계 4:6; 15:2)에 관한 지식을 설명할 시간도 모자랄 지경이다. 청동거울에 관한 문화적 지식을 갖추지 못했을지라도,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 봄으로써 “재림에 대한 소망”과 “유리 바다”에 관한 엄청난 보화를 캐낼 수 있다. 부패한 <개역개정판>은 “유리”가 “거울”로 변개되어 있기에, 고린도전서 13:12이 요한계시록 4:6이나 15:2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결코 제시해 줄 수 없다.
다음으로 그들은 “문화적인 해석을 중심으로 해석했다”고 말한다. 이는 “문화를 모르면 성경을 잘못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이유는 “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지도,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살전 2:13, 요 21:21-23, 마 16:6-12). 그들은 오리겐의 풍유적인 “해석” 방법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에 기초하여,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 감으로써 해석해 나가야 한다(고전 2:13, 벧후 3:16). “문화적인 해석을 중심으로 해석했다”는 이 독특한 관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의 이해를 보다 쉽게 해주었다는 데 그 의의를 두려 하지만, “문화적인 해석”과 “성경 해석”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 설령 있다 해도 미약할 뿐이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 진리를 공부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준다고 해서, <문화성경>이란 “역작”(?)을 내놓을 만큼 그것이 열의를 쏟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겠는가? 올바른 성경 본문을 보존하고 지키는 일에는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그들이 변개된 성경에 “날개”를 달아 주는 일에는 왜 그렇게 열정을 쏟았던 것인가? 바울은 그런 자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거 한 바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열성은 있으나 지식을 따라 된 것은 아니니라』(롬 10:2).
신실한 설교자요, 성경교사였던 C. I. 스코필드는 그의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집필하는 데 있어서 당대 장로교 목사이자 신실한 성경교사였던 브룩스(James H. Brookes)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으로 경험을 해석하지,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 해석의 정도(正道)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에 근거한 그의 30년간의 열정은 한 권의 주석 성경으로 집대성될 수 있었다. 이것은 바르게 보존된 <킹제임스성경>의 또 하나의 열매였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고 섭리로 보존하신 성경은, 성경 해석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갖게 했고, <스코필드 주석성경>이라는 귀한 열매를 맺게 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변개된 <개역개정판>은 “문화적인 성경 해석”이라는 비정상적인 사고를 낳았고, <문화성경>이라는 무의미한 졸작을 만들고 말았다. 변개된 성경으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기에, 그런 유치한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그들은 <개역개정판>이 한국 교회 대부분 교단들이 사용하기로 채택한 본문이라는 사실에 힘을 얻으려 한다. 그들에게는 “다수의 결정”이 “최종권위”였던 셈이다. 성경 보존에 관한 지식을 조금만 붙들었더라도 그들은 다수의 결정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다수를 위해, 또 다수를 향해 상술의 손길을 뻗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성경 출판은 상업주의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출판에 대한 의미를 덧붙였다. 스스로 양심에 가책을 느낀 나머지 말로나마 이와 같은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 그 속내를 다 알 순 없다 하더라도 무의미한 “열매”를 세상에 내놓은 모습이라든지, <개역한글판>도 아닌 굳이 <개역개정판>에 “날개”를 달아 준 모습을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대한성서공회의 상업주의에 편승했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지난 11월 23일 대한성서공회는 제108회 정기이사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된 “총무보고”에 따르면, 금년 국내 성경의 반포 부수가 34% 증가했는데, 이 중 <개역개정판>이 일등 공신의 역할을 했다. 주석 성경의 본문 사용 비율에 있어서도 <개역한글판>을 압도적으로 추월하여 80%를 차지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이런 양상은 <개역한글판>의 판권 시효가 5년도 채 안남은 상황에서 그들에게는 청신호라 할 수 있겠다. 그들의 “의도”대로 <개역개정판> 보급이 정착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려는 그들의 “의도”대로 말이다(고후 2:17). 이와 같이 자기들의 배를 섬기는 모습(롬 16:18)을 그대로 반영이라도 하듯, 대한성서공회는 올해 역삼동에다 107억 원의 건축비를 들여 350여 평 대지에 연면적 3,055평의 역삼회관을 신축했다. 이외에도 그들은 서초 2동의 600여 평 대지에 2,200여 평의 빌딩과 종로 2가의 100여 평 대지에 800여 평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고, 용인 공세동에 100억 원대에 이르는 창고, 로스기념관, 사택 등이 있으며, 성남 상대원동에 1,700여 평 대지에 1,400여 평의 공장이 있고 지방에도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과연 성경을 번역하고 출간하는 일에 이런 규모의 대지와 건물이 필요한 것인가? 어떤 변명으로도 그들의 상업주의를 가릴 수 없는 법이다.

<문화성경> 역시 그들의 상업주의를 부추기고 있을 뿐이다. 올바른 본문이 기록되고, 올바른 진리를 제시해야 할 성경책을 그들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을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상품화시켜 버렸던 것이다. 보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성경을 내놓았다고 그들은 자화자찬했지만, 그 역시 폐기해야 할 부패한 성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문화성경>, 그것은 대한성서공회의 부패한 상품인 <개역개정판> 보급을 위한 “상업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유념하도록 하자.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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