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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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못”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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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3월호>

망치는 홀로 있어도 그 쓸모와 존재감이 있지만, 못은 홀로 있으면 그다지 쓸모가 없다. 망치 없이 홀로 뒹구는 못은 늘 어딘가가 허전하다. 못은 망치와 함께 있으면서 이제 곧 있을 타격의 긴장감으로 사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망치에 비유된다(렘 23:29). 망치는 그 존재 자체가 직접 언급될 때가 있고(판 4:21; 5:26), "못을 박는" 행위만으로 그 존재가 감지될 때도 있다(전 12:11). 하나님께서 내려치시는 그분의 "망치," 곧 말씀은 성경에 등장하는 "못들"에 역사하여 그것들에 생명의 "단단한" 의미를 부여한다. 못은 단단한 곳에 박는 것이지(사 22:23) 물컹한 곳에 박지 않는 법!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못"에 관해 계시하셨다면, 그 박혀 들어간 자리는 성경적으로 가장 단단한 의미를 갖는 곳이 된다. 일단 박혀 들어간 못이 그곳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갖는 것처럼, 주님께서 성경에 기록하신 "못들"은 그 진리가 영원하며 누구도 빼내어서 폐기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망치요, 그 망치로 쳐서 박혀 들어간 "못"이기도 하다. 『현명한 자의 말들은 찌르는 막대기들 같고, 집회의 선생들에 의해 박힌 못들 같으니, 한 목자에게서 받은 것이라』(전 12:11). 여기서 『현명한 자의 말들』은 "못"에 비유된다. 『집회의 선생들』은 회중의 마음에 그 말씀을, 못을 박아 넣듯 단단히 고정시켜야 할 설교자에 해당한다. 말씀을 가르치거나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에 못을 박듯 말씀을 고정시킬 수 없다. 진리가 박혀 들어가게 하려면 "설교"를 해야 한다. 가르침과 설교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는 격분시키고(행 7장) 분노케 하며(눅 6:11) 유죄를 선언하고(행 2장) 행동을 유발시키는 강제력이 있다(행 26:28). 설교는 머리가 아닌 마음을 강타하는 것이다! 마음에 상처 주는 일을 "마음에 못을 박는다."라고 말하지만, 마음에 박힌 말씀의 못은 그 사람을 교화시키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훈계하고 위로하며 그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구약 시대에는 "성막"을 지을 때 "말뚝못들"이 사용되었다. 『성막의 말뚝못들과 뜰의 말뚝못들과 그 끈들이며』(출 35:18, cf. 출 27:19). 다윗 또한 성전의 건축 재료로 못을 준비했다(대상 22:3, 대하 3:9).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에게 그의 성소 안에서 못을 주시어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고 그 황폐한 것을 개수케 하셨다고 기도했다(스 9:8,9). 못이 없다면 성전이 세워질 수 없었던 것이다. 못은 가장 간과되기 쉬우면서도 제일 요긴한 성전 건축 자재였다. 못이 있었기에 성전은 쉬 쓰러지지 않고 견고히 서 있을 수 있었다.

못은 박혀 들어가면 눈에 잘 띄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못들 가운데 끈을 매기 위해 땅 위로 돌출된 것들이 있었는데, 위에 언급된 성막의 "말뚝못들"이 그러했다(출 35:18). 성막과 뜰 주위의 모든 말뚝못은 놋으로 만들어져(출 38:20), 성막을 덮는 덮개들과, 뜰을 두른 흰 막의 기둥들을 땅에 고정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 말뚝못들을 땅에 박고 그 돌출된 부위에 『끈들』(출 35:18; 39:40)을 걸어 성막의 덮개들과 뜰 둘레의 흰 막의 기둥들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했던 것이다.

구약 시대에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막이었다. 그 성막을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주던 것이 "말뚝못들"이다. 말뚝못들이 있는 한, 광야의 거센 바람도 성막의 덮개들을 날려 버리지 못했고, 그 바람은 흰 베실로 만든 뜰의 막 또한 넘어뜨리지 못했다.

성막의 맨 위를 덮고 있던 오소리 가죽은(출 26:14) 그 모습이 투박하여 성막의 외양을 실로 볼품없게 했다. 투박한 가죽 덮개로 덮인 바로 그 성막 안 지성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인데, 이 점은 "우아함도, 흠모할 아름다움도 없는"(사 53:2)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있었음을 계시한다. "오소리 가죽 덮개"를 땅에 붙들어 매어 바람에 날리지 않게 해 준 것이 바로 "말뚝못"이다. 그렇다면 말뚝못은 볼품없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뚝못이 사용된 또 하나의 구조물이 바로 성막의 뜰을 두른 "흰 막"이다. 뜰을 사방으로 두른 흰 막은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었는데(출 38:9), 이 "흰 세마포" 막은 "의"를 상징한다(cf. 계 19:8). 이 점은 성막 안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가 필요함을 보여 주는데, 그 의를 상징하는 세마포 막이 흔들리지 않게 끈을 매어 그 기둥들을 붙들어 주던 것이 바로 "말뚝못"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준 "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이다(롬 3:21,22).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계시면서 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나의 아버지께 가므로 너희가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요 16:10). 이 말씀에 따르면,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셋째 하늘의 아버지께로 가셨다는 사실은, 그분 자신이 곧 "의"이시라는 증거가 된다. 의가 아닌 것은 아버지께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의가 없이는 셋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3:2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그분 자신이 "의"이시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이시라는 이 진리를 단단히 붙들어 주는 것이 바로 그분의 "부활"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셋째 하늘의 아버지께 받아들여지셨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승천하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과 관련된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는 뜰의 흰 막을 단단히 붙들어 주던 것이 "말뚝못"임을 기억하는가? 말뚝못은 박혀서 "땅에 묻혀 있는 부분"과 "끈을 걸어 매기 위해 땅 위로 돌출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M.R. 디한은 땅에 묻힌 부분을 주님의 죽음으로, 위로 돌출된 부분을 주님의 부활로 설명했다(, p.63). 못은 "말씀"이며(전 12:11), 『말씀』은 예수님이시므로(요 1:1) 타당한 해석이다. 말뚝못을 땅에 완전히 박아 묻어 버린다면 끈을 매어 뜰의 막을 지탱할 수 없지만, 그 못의 일부를 돌출시키게 되면 흰 막을 지탱시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땅에 묻혀만 계셨다면 그분은 의가 되실 수 없었지만,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오셨기에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의이심을 입증하실 수 있었다. 부활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의"이시라는 점을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붙들어 주는 말뚝못의 돌출된 부분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부활의 복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들이 주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마 27:35)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분의 부활을 의심하면서 『내가 주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또 내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에 대어 보고, 나의 손으로 주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않겠노라.』(요 20:25)라고 말했던 도마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나의 손을 보고 너의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라고 말씀하셨다. 도마가 그날 확인한 못자국은 그의 눈앞에 계신 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주님이심을 입증해 주었다. 도마는 급기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요 20:28)라고 고백했다. 주님은 부활하신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박아 넣으신 못처럼, 누구도 빼내지 못할 단단한 진리이다. 도마는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지금은 보지 않고 믿어야 할 때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복이 있다고 하셨다(요 20:29). 지금 이 시대에 자신이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해서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거부한 것이 되어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 "구원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어도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음을 명심하라(벧전 1:8,9).

도마에게 못자국을 보여 주신 뒤 승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곧 있으면 "재림"하실 것이다. 재림을 보여 주는 못은 재판관기 4장에서 야엘이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아 넣은 "장막 못"이다.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의 못을 갖고 그녀의 손에 망치를 들고 가만히 그에게 들어가서 그 못을 관자놀이에 대고 박아 땅에 꽂으니 이는 그가 쉬 잠들어 있었으며 피곤하였음이라. 이에 그가 죽으니라』(21절). 이후 드보라와 바락은 재판관기 5장에서 주님의 재림을 노래했는데, 야엘이 그녀의 장막 못으로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뚫은 사건을(26절) 재림과 연결시켜서 이렇게 예언했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싸웠으니 그들의 길에서 별들이 시스라와 싸웠도다. 키손 강이 그들을 쓸어 버렸으니 그 옛 강 키손 강이라. 오 내 혼아, 네가 힘차게 발을 내디뎠도다』(20,21절). 이 예언은 키손 강이 위치한 므깃도 지역에서 문자적으로 일어날 아마겟돈 전쟁을 가리킨다(계 19:11-15; 14:20). 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별들"이라 불리는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살후 1:7) 재림하시어 그 전쟁에서 "시스라"가 예표하는 적그리스도, 곧 사탄이 육화한 자의 머리를 야엘이 장막 못으로 시스라의 머리를 뚫은 것처럼 부수실 것이다(롬 16:20, 시 68:21; 110:5,6, 합 3:13).

그런데 재림하시는 『인자의 표적』(마 24:30)이 그분께서 흰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기 전에 나타나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인자의 표적은 "사람의 손" 같은 구름과 관계가 있다(왕상 18:44,45). 말하자면 하늘에 "못자국 난 손" 같은 구름이 보일 때, 대환란의 극심한 고난을 통과하던 이스라엘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인자의 재림을 깨닫고 통곡할 것이다. 『그후에 하늘에 있는 인자의 표적이 나타나리니,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할 것이며, 또 그들은 인자가 권세와 큰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그 날이 오면, 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모든 민족들을 멸하고자 하리라. 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 위에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리라. 그러면 그들은 그들이 찔렀던 나를 쳐다볼 것이며, 그들이 그를 위하여 애통하리니』(슼 12:9,10). 이렇게 재림하시는 인자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 천년왕국을 통치하시면 그분의 보좌는 "단단하게 박힌 못처럼" 견고하게 된다. 『못이 단단한 곳에 있음같이 내가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위하여 있을 것이니라』(사 22:23, cf. 눅 1:32, 마 25:31).

주님께서는 천년왕국 이후 영원에서도 그 "못자국"을 몸에 지니고 계실 터인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계 5:12)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다. 『보라, 보좌와 네 짐승의 한가운데와 장로들의 한가운데 도살당하였던 것 같은 한 어린양이 서 있는데』(계 5:6). 영원 시대의 새 예루살렘 도성에서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그곳의 성전』이 되실 것이다(계 21:22, cf. 22:3).

끝으로, "세 개의 못"이 공히 "위에서 아래로 타격"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하늘에서 오신 인자를 십자가에 못 박은 못이 그러했고(인자의 죽음), 땅의 더 아래로 내려가고 또 올라오는 성막의 말뚝못이 그러했으며(인자의 장사와 부활과 승천), 적그리스도의 예표인 시스라의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부수어 뚫고 들어간 장막 못이 그러했다(인자의 재림). 이 세 못은 "초림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셨고" "재림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실" 인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인자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 승천과 재림을 보여 주고, 또 그 영원한 못자국으로 인해 인자의 영원까지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실로 성경은 못 하나라도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될 책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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