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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신학자가 될 수 없는 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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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3월호>
월 6일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칼빈의 성령론’을 주제로 한 제43회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를 갖고서 칼빈 신학에 드러난 성령의 역할을 설명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언론에 따르면, 지난 2천 년간 기독교 신학과 교회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칼빈은 성경의 증거자로서의 ‘오직 성령’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그날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는 ‘성령의 신학자, 요한 칼빈’을 제목으로 한 발표에서 “칼빈은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기독교 신학과 성령론을 제시해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의 반석 위에 세우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칼빈을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칼빈을 가리키는 ‘성령의 신학자’라는 칭호가 무려 백여 년 넘게 ‘공인된 칭호’로 사용되어 왔으며, “옛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들과 그 정신을 이어받은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는 여전히 이를 매우 의미심장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칼빈을 “성령의 주권을 회복시킨 종교개혁자”라고 설명한 뒤 “칼빈의 성경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됐다. 칼빈은 성경의 모든 중요한 가르침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요약해 제시하고자 노력한 신학자였다. 그는 오직 성경에 근거하는 성령의 사역에만 의존하려 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 안에서도 칼빈은 성령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구원이 ‘오직 성령’의 주권 하에 있고, 그 구체적 적용 사역들은 교회를 통해 성직자들이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 가운데 있다”는 점을 김 박사는 강조했다고 한다.
흔히 존 칼빈의 ‘구원론’에서 삼위 하나님의 역할은 ‘구원을 시작하시는 성부 하나님’과 ‘구원을 완성하시는 성자 하나님,’ ‘구원을 적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으로 요약된다. 즉 ‘선택’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며, ‘속죄’는 성자 하나님의 사역이고, 그 성자 하나님을 믿게 하고 믿음을 끝까지 보존케 하는 ‘은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요, 삼위 하나님의 협동사역이라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성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서 시작되어 성자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만을 위한 “제한된 속죄”로 완성되었다면, 창세 전부터 선택된 자들을 찾아서 그 구원을 적용시키려고 하는 성령의 사역 역시 비성경적이라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존 칼빈에 관한 책들을 읽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에게 그의 “변호인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 변호인들은 자신들의 책에서 성경의 진리를 성경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칼빈이 왜 틀리지 않았는가?”를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의뢰인에게 수임료를 받고 일하는 변호사들은 때로 그 사건이 정당하지 않다 해도 정당한 것처럼 변호를 해줘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칼빈의 변호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왜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칼빈의 5대 강령을 옹호하는 일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비성경적인 궤변들을 늘어놓으며 시간과 노력과 종이를 소진해 버리는 것일까? 누가 봐도 “범행”이 분명하지만 자신이 맡은 사건이 “무죄”가 되어야만 “돈”을 거머쥘 수 있다는 직업상의 불문율이 작용했기 때문은 아닐까? 어차피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도 없는 교리라면, 칼빈의 “무죄” 쪽으로 펜의 방향을 돌려 써 내려가야만 “칼빈”으로 밥 먹고 사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불가항력적인 권위로 “존 칼빈”을 말씀의 법정에 세우는 바이다(전 8:4, 요 12:48). 그의 변호인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이 신성하기 그지없는 법정에 “존 칼빈”만을 세우고, 그가 과연 “성령의 신학자”인지 성령에 관한 말씀으로 그를 판결해 보고자 한다.
첫째, 존 칼빈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알지 못한다. 성경의 요한복음 3장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에 관한 대표적인 장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령의 사역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요 3:5-8).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에 대한 니코데모의 질문에 답변하신 것이었다. 니코데모는 거듭남을 오해하여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요 3:4)라고 질문한 것인데, 주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으로 거듭남에 대한 오해를 정정해 주셨다. 말하자면 사람이 거듭나려면(다시 태어나려면) 어머니의 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물로 한 번 태어난 그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어머니의 양수(羊水)를 통해 몸에 70% 이상의 물을 가지고 “물로 태어나는” 인간은 그때 그의 영이 죽은 채로 태어나는데(엡 2:1), 영이 죽은 상태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교제할 수도 없기에 그 죽은 영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6절)는 말씀으로 부연설명하셨다. 인간은 육신이 먼저 물로 태어나고, 그 뒤 성령으로 그의 죽은 영이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어떠한가? 그는 본문의 “물”과 “성령”을 너무 엄밀하게 구분해서는 안 된다면서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어느 누구도 물로 새롭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이 물은 우리를 새롭게 씻어주시는 성령이시라고,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써 우리의 본성으로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하늘에 속한 생명의 에너지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분이 그 성령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1) 그는 또한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6절)는 말씀에서 『성령』을 ‘은혜’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성령으로 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순결하고 올바른 본성을 낳게 하는 유일한 분”이라는 뜻이라고 가르쳤고, 또 “인간의 『영』”을 ‘은혜의 효과’로 해석하여 『영이니라.』는 말씀을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해석했다.2) 이처럼 존 칼빈은 인간의 죽은 영이 성령님에 의하여 거듭나게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결코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가 진정으로 ‘성령의 신학자’라면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죄인을 구원하시는 성령님의 가장 기본적인 사역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둘째, 존 칼빈은 1559년에 출판된 최종판 <기독교 강요>에서 “예정론”을 “성령론” 부분에서 다루었다. 그만큼 칼빈에게 예정론은 성령님의 사역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택함받은 자들과 유기된(버림받은) 자들과 관련된 성령님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가 멸망에 처하게 하신 무리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문을 폐쇄시킨 것은 그의 의롭고 비난의 여지 없는 불가사의한 판단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부름받는다고 하는 것을 피택자의 표시로 보며, 칭의 역시 택정하심의 다른 표시인 바 피택자들은 결국 부름받아 칭의를 얻고 영광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나 성화가 허락되어 있지 않다. 즉 부름받음, 칭의, 영광이 유기된 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다.”(III.xxi.7)」3)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복음의 조명을 받은 믿는 자들을 교회의 품 속으로 인도하실 때 이 교회 혹은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받는다...”(III.xxiv.6)」 4) 「“...이들이 곧 믿는 자들인 바 이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잠깐 동안만 성령을 통한 설교 말씀의 조명을 맛보게 하시다가 결국은 이들을 버리시기도 하신다.”(III.xxiv.8)」5)
“칼빈의 성령”은 창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에게는 복음의 조명을 주셔서 그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반면, 창세 전에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복음의 조명을 잠깐 맛보게 한 후 어떠한 연민도 없이 지옥으로 버려 버리는 매몰찬 영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고 물으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알려고 하면 복잡해지므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자체로 상당히 난해한 주제인 예정에 관한 논의는 인간의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대단히 복잡해지기 때문에 위험한데... 호기심이 많은 자들은 스스로의 호기심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하고, 빠져나올 길을 전혀 찾을 수 없는 미로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안에 숨겨 두기로 작정하신 그런 것들을 사람이 자세히 조사하고도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하신 입을 닫으시는 즉시 우리도 추가적인 질문을 그만둬야 한다.」 6) 칼빈은 자신도 모르는 예정론을 주장하며 믿으라고 강요한 것이다. 가르치려면 정확히 알고서 가르쳐야 하는데 그에게는 성경을 가르칠 자격이 전무했다. 그의 교리는 칼빈이라면 어쩔 줄을 모르는 그의 우상 숭배자들과, 그들의 궤변에 이성과 상식을 내던져 버리고 세뇌된 자들만이 믿을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칼빈의 성령”에게서 “신학적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보게 된다. “사이코패스”(psychopath)란 “반사회적 행동, 공감 능력과 죄책감 결여, 낮은 행동 통제력, 극단적인 자기중심성, 기만 등과 같은 정신 이상의 성향이 높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칼빈의 성령”에게 이러한 성향이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첫째, 성경의 성령님은 죄인을 다루심에 있어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공평히 행하시고 그들에게 연민을 갖지만, “칼빈의 성령”은 특정 죄인들에게 이유 없는 반감을 품고 편파적으로 잔인하게 행하면서도 전혀 죄책감이 없다. 『그분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둘째, 성경의 성령님은 인간의 상태에 대한 공감 능력이 있으시지만, “칼빈의 성령”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라』(롬 8:26).
셋째, 성경의 성령님은 그분의 행위에 있어서 통제력이 있고 극단적인 자기중심성이 없지만, “칼빈의 성령”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성령의 열매는...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절제니 그러한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넷째, 성경의 성령님은 비둘기처럼 순수하시어 기만하시지 않지만, “칼빈의 성령”은 거짓 교리로 혼들을 기만한다. 『그가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그분 위에 임하심을 보더라』(마 3:16).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그 다음은 화평하며, 친절하고, 양순하며, 자비와 선한 열매들로 가득하고』(약 3:17).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하신 입을 닫으시는 즉시 우리도 추가적인 질문을 그만둬야 한다.”는 칼빈의 최종 변론에서 “묻지마 예정론”을 읽게 된다. 하나님께서 누구는 임의로 살려 두고 누구는 임의로 멸망시킨다는 점에 대해 인간은 그 이유를 일체 묻지 말라는 것이다. 필자가 “칼빈의 성령”을 “신학적 사이코패스”로 규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묻지마 살인”을 벌이는 사이코패스에게 그가 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죽이지 않은 이유를 물어 보라. 그는 그 이유를 댈 수도 없고,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도 없다. 사이코패스의 정신세계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본 말씀의 법정은 존 칼빈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바이다. 죄명은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지 않고 인간의 지혜로 사사로이 해석하여 사람들에게서 건전한 생각을 앗아 가고 성령님을 모독한 죄이다(고전 2:13, 벧후 1:20, 딤후 1:7).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통찰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실 수 있다(고전 2:11,12). 성령님은 칼빈의 예정론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오셨다(요 16:13). “미리 아심”(벧전 1:2)이 가능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려고 예정”하셨고(롬 8:29), 또 그분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셨다(엡 1:5). 이외의 것은 칼빈의 예정론이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근거한 성경의 예정이 아니다. BB
주석)----------------
1) 존 칼빈, 「JOHN I」(서울: 규장, 2010), p.127.
2) 위의 책, p.130.
3) 존 칼빈, 이형기 옮김ㆍ요약, 「기독교 강요 요약」(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8), p.303.
4) 위의 책, p.310.
5) 위의 책, p.311.
6) John Calvin,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99)(Philadelphia, PA: Westminster, 1959), 3.21.1, 5, 마이클 호튼, 「칼빈주의 찬성」(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p.141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