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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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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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7월호>

오 하나님이여, 보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에 관하여 기록한 것과 같이) 주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왔나이다』(히 10:7).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신 말씀 중에 한 구절이다. “아버지의 뜻”은 인류가 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영원한 구속을 위한 제물로서 사랑하시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오신 주님은 『내가 땅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완성하였나이다.』(요 17:4)라고 고백하기까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자신의 뜻을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이렇듯 신실하게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실 수 있었던 것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알고 계셨기 때문인데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요 10:15)다고 말씀하신 대로 완전한 이해가 순종과 섬김 그리고 아버지께서 계획하셨던 『영원한 목적』(엡 3:11)을 이루시게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갖고 계시며 이미 우리 안에서는 그분의 선한 목적을 위한 일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지속되고 완성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빌 1:6).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그분의 뜻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주의 계획에 참여하여 그의 말을 알아 들었으며 누가 그의 말을 주의하여 들었느냐?』(렘 23:18) 이 말씀처럼 나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주님의 말씀을 알고, 그분의 말씀에 주의하고 귀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분을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나의 지식의 정도는 얼마나 되며 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무지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또 지금 현재 나는 얼마나 정확하게 행하고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성경은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딛 1:16)는 자들이 있음을 지적하셨고, 『“나는 그분을 아노라.” 하면서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니,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2:4)고 단정하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거부하고 멸망했던 이스라엘처럼 입으로만 하나님께 다가서고, 또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했던 자들과 같다. 이들은 가증하고 불순종하며 선한 일들을 배척하는 자들이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살인자(요일 3:15)와 같은 부류로 보신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을 점검하는 일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딤후 3:7)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역시나 온갖 가증한 일들을 행하며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면서 경건의 모양만을 갖춘 위선자들이다. 그 누구라도 외모로 하나님을 속일 수 없으며, 그 어떤 사역도 그 섬김의 동기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시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선한 행위로 가장한 육신의 일들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신실하게 그분을 섬겼던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 중에서도 믿음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러 주시며 『내가 그를 아나니, 그가 자기 자식들과 자기 뒤에 올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명하겠고 그들은 주의 도를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창 18:19)라고 알아 주셨다. 또 모세는 예수님께 비교되어 그 신실함을 인정받은 하나님의 종(히 3:2)으로서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여 교제했던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가 지명하여 너를 앎이니라.』(출 33:17)고 말씀하셨다. 『내가 뱃속에서 너를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거룩하게 하였고 너를 민족들의 선지자로 정』(렘 1:5)했다고 하신 이 사람은 부패한 유다의 온 백성과 왕과 고관들을 대적하여 세우신 선지자 예레미야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이들에 관한 기록들을 더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들에 대하여 얼마나 각별하셨는지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예레미야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이 필요없을 만큼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고 그 가치는 하나님께 인정하셨던 것처럼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그들의 명성은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이런 기록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분발하게 하며, 또 얼마나 그들을 흠모하게 하는 것인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보는 “옛길”에서 꼭 찾아 만나게 되는 인물들이 되었다.
신약에서는 구약의 성도와 달리 『누구라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그분께 알려진 사람』(고전 8:3)이다. 다시 말해 구약의 성도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한 행위로 알려진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지”(요 1:1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분께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입고 사는 이 세대에도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며 또 주님의 이름으로 경이로운 일들을 행한 사람들이다(마 7:21-23).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분』(히 11:6)께서 왜 이들의 열심을 모른 체하시는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이들을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고 냉정하게 외면하시는 것인가. 그것은 이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좋을 대로 행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름 붙이며 행하는 육신적인 일들을 뒤 쫓아가시며 그들을 돕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고, 그분은 완전한 공의 가운데 세우신 원칙을 벗어나는 일들을 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부터 카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로 인도받으면서도 그 약속하신 땅을 밟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이적만을 보았을 뿐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을 이끄시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셨는지 올바로 알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모세는 진멸될 위기에 놓여 있던 백성을 구해내면서 주님께 『내가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면, 이제 주의 길을 내게 보이시어 나로 주를 알게 하시고 내가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하소서.』(출 33:13)라고 간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의 간구를 들어 주셨고 『그의 길들을 모세에게』(시 103:7) 알려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무지하다면 무지하게 내버려 두라고 하신다(고전 14:38). 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욕심을 부리며 육신적으로 구하는 것을 주실 때 『그들의 요구대로 그들에게 주셨으나 그들의 혼 속으로 메마름을 보내』(시 106:15)시겠다고 경고하셨다. 또한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된다는 원칙도 가르쳐 주셨다(갈 6:7).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섬김을 위해 권고와 충고를 아끼지 아니하시며, 또 우리의 수고에 대하여 어떻게 보상하실지 신실하신 말씀으로 약속해 주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므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시인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참으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며, 주님 안에서 행한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행한 모든 『행위와 사랑의 수고를 잊으실 만큼 불의하지 아니하』(히 6:10)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그분에 관한 지식도 없이 하나님의 계명과 규칙들은 무시한 채 인간적인 열성만을 가지고 나서면 무조건 인정해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만약 그런 분이셨다면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 드릴 목적으로 “다른 불”을 가져왔을 때 이 일들을 눈감아주셨을 것이며(레 10:1,2), 또 웃사가 흔들리는 주의 궤를 붙잡았을 때 그의 행위를 가상하게 여겨 주셨을지 모른다(삼하 6:6).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하게 비쳐질 수도 있을 만큼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철저하시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신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바로 세웠다면 바울이 사역자 디모데에게 권면한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하며(딤후 2:15), 베드로의 당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벧후 3:17).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 단순하게 그분은 창조주시며, 입법자시고, 우리의 영원한 구주시며, 심판주가 되신다는 사실에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같이 내리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그분을 알지 못해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나 그분 안에 거하며 영생의 말씀을 먹고 살면서도 그분의 뜻(will)을 이해하지 못하여 온전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면 부끄러운 결말을 보게 될 것이다.
구원받았다면 그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며, 각자는 어떻게 자기 자신의 그릇을 소유하는가를 알아야 한다(살전 4:4). 하나님께는 매 세대마다 목적을 두고 부르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들이요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나를 믿고 내가 그인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사 43:10). 내 존재가 나 개인의 뜻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천상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알게 하려는... 영원한 목적에 따른 것』(엡 3:10,11)임을 알았다면 이것이 우리의 매일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모든 지혜와 영적 지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케 되어 주께 합당히 행하므로 모든 일에 기쁘시게 하고 선한 일마다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나며, 또 그분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강화되어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이르러 우리를 빛 가운데서 성도의 유업의 동참자가 되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기 원하노라』(골 1:9-12).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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