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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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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4년 11월호>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책이므로, 하나의 책 안에 구약의 경륜과 신약의 경륜이 함께 등장한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마태복음이 혼란스러운 책이 되고 만다. 두 가지 경륜에 속한 서로 다른 교리들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길을 잃고 마는 것이다.

죄사함(remission)과 구속(redemption)의 차이

이 두 용어는 구약과 신약의 경륜적인 차이를 보여 준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흘려진 피의 속성이나 효력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 하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죄사함"(remission), 곧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가 짐승들의 피였다. 이는 그들이 동물의 피로 맺어진 언약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출 24:6-8). 하지만 구약의 희생제물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는 것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짐승의 피를 통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어도 죄가 완전히 제거되거나 깨끗하게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런 한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구절이 출애굽기 34:7이다.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범법자가 결코 깨끗게 되지는 아니하리니』, 즉 구약의 성도들은 죄들의 사함은 받았어도 죄들이 구속되지는(redeemed)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동물들의 피의 효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죄와 허물이 용서는 되었지만 깨끗하게 되지는 않았다(민 14:18). 제단과 성전 기명들, 사람의 몸, 옷 등은 깨끗하게 할 수 있었어도 죄나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는 못했다. ②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히 10:4). ③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도 마련해 주지 못했다(히 9:8).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을 찢지 못했다. 즉 동물의 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죄가 용서되어 구원을 받았어도 죽은 뒤에 곧바로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정해진 때가 이를 때까지 땅 아래에 있는 "아브라함의 품," 곧 "지하 낙원"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것이다. ④ 죄인들의 양심을 온전케 하지도, 정결케 하지도 못했다(히 9:9,14). 그래서 계속해서 죄들에 대한 의식(conscience)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고, 해마다 죄들이 다시 기억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히 10:2,3). ⑤ 피의 효력이 영원하지 못했다(히 10:14). 그래서 희생제사를 해마다, 여러 번, 자주 반복해서 드려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구약의 효력은 죄를 용서하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죄사함"만 있고 "구속"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 언약 속에 묶여 있던 구약 성도들에게는 온전하고 영원한 구속이 필요했다. 새로운 언약의 중보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다. 『첫 언약 때에 범죄한 것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히 9:15). 정확히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죄들을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속"하기 위해 죽으셨다. 이는 "죄사함"은 구약에도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죽음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의 죽음만으로도 죄는 용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더 좋은 중보자로 오셨으니 "구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주께서는 구약 성도들이 동물의 피를 근거로 죄들을 용서받은 것 때문에 "새 언약의 피"를 흘리시려고 했다. 『이는 이것이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마 26:28). 피를 흘리신 목적이 죄들을 용서하는 것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도 동물의 피로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구속이었다. 주님께서는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 말하자면 죄들을 제거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구속"(redemption)은 "실제로 값을 지불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값을 지불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충족시키셨다. 그 피는 죄들을 단번에 제거했고 영원히 온전케 해주었다(히 10:11-14). 그래서 신약은 구약보다 "더 좋은 언약"이다. 이는 신약의 죄 용서가 동물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피보다 우월한 예수님의 보혈은 하나님의 피로써(행 20:28) 온전한 구속을 이룬다(엡 1:7). 구약이 지녔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① 죄와 허물이 용서되는 것은 물론 온전히 깨끗하게 된다. 심지어 성막의 원형인 하늘 그 자체마저도 깨끗하게 한다(히 9:23). ② 죄들을 제거했다(요 1:29). ③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히 10:19,20). 성소와 지성소의 중간을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진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 구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롬 3:23,24). 따라서 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죽은 뒤에 지하 낙원이 아닌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으로 올라간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셋째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마 27:51-53, 엡 4:8). ④ 죄인의 양심은 온전해졌고 정결케 되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따라서 죄들에 대한 의식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히 10:17) 계속 반복해서 기억할 필요도 없다. ⑤ 피의 효력은 영원하다(히 10:14). 그래서 해마다, 여러 번, 매일, 자주 반복해서 드릴 필요도 없어졌다(히 7:27). 단번에 영원히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찬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용서와 신약의 용서의 차이이다. 구약에는 용서만 있고 구속은 없었다. 그러나 신약에는 용서뿐만 아니라 구속도 있다. 그래서 골로새서 1:14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이처럼 동물의 피로 죄를 용서받은 것과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용서받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예수님의 피는 인간의 모든 죄를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 그 피는 영원하고 완전하다. 그래서 십자가 이전인 구약의 구원 방법과 그 이후인 신약의 구원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숨을 거두시는 마태복음 27:50에 이르기까지는 죄의 용서(죄사함)만 있는 구약적인 상황이었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구속될 수 없었다(갈 4:4,5). 이러한 경륜적인 차이 때문에 신약적인 방법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을 마태복음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통해 교회 시대의 구원의 교리를 정립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는 것이다. 사실 구원의 교리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교리들도 신약의 교리들과 차이를 보인다.

유대인 중심에서 교회 중심으로

십자가 사건 이전까지는 신약이 시작되기 전이므로 구약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율법적이고 유대인 중심적인 교리가 등장한다. 아직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태어난 새로운 세대, 곧 "교회"(시 22:30,31, 이방인들이 중심을 이룸)를 위한 경륜이 시작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로 유대인들을 위해 사역하셨으니 할례의 일꾼이셨던 것이다(롬 15:8). 이런 이유 때문에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는 내용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① "예수"란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들에서 구원하실 분이란 뜻이다(마 1:21). 여기에서 "자기 백성"은 교회, 곧 신약의 성도들이 아니다. 아직 신약의 문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구약적인 상황이기에 이들은 유대인들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목적은 "유대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②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왕국 복음을 전파하라고 위임하셨을 때에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유대인들)에게로만 가라고 명령하셨다(마 10:5,6). ③ 투로와 시돈 지방의 한 카나안 이방 여인이 마귀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유대인들)의 빵을 개들(이방인들)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시면서 매몰차게 거절하셨는데, 이는 그분의 주된 사역이 이스라엘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마 15:23-25). 여기에는 이방인이든, 교회든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구약을 배경으로 하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마태복음의 구약적인 교리들을 교회 시대를 위한 교리로 가져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로 경륜의 중심이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넘어갈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성령님께서는 마태를 통해 몇몇 구절들에서 교회에 대한 내용들도 직간접적으로 암시해 놓으셨다. 이렇듯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특징을 주된 대상의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유대인들이 왕을 거부하는 모습이 두드러지는 마태복음 11,12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즉 왕 없이 왕국을 세우고, 왕을 받아들일 의향이 전혀 없으며, 예수님을 비방할 뿐만 아니라 왕의 표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이스라엘을 예수님께서는 이제 민족적으로 다루시지 않고 개인적으로 초청하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 이후 교회 시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믿고 영접하기 위해 그분께로 나아오게 될 것을 암시해 준다. 심지어 마태복음 16장에서는 "교회"를 직접 제시하시면서 반석이신 그분 자신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마 16:18). 특히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언급하는 문맥에서(마 16:21) 처음 언급되었다는 사실에 매우 의미가 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맺어지게 될 신약의 주된 대상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되는 경륜적 변화 속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대상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마태복음 후반부로 갈수록 보다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신약적인 교회의 중요한 위치나 교회의 징계에 대한 규례로 삼을 수 있는 구절들(마 18:15-18), 그리고 지역 교회의 단순한 형태(마 18:20)에 관한 내용들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가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말하자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서 "모든 민족들"인 이방인들, 특히 교회에게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유대인을 위한 교리와 교회를 위한 교리가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을 각 대상에 맞게 교리적으로 올바르게 구분하여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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