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상고하라 분류
목자이신 그리스도
컨텐츠 정보
- 4,025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5월호>
목자이신 그리스도구약성경에서 우리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인물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모형들은 목자의 헌신적인 애정과 의무뿐 아니라 그 특성까지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한” 목자(Good Shepherd)요(요 10:11, 14), “위대한” 목자(Great Shepherd)시며(히 13:20), 목자“장”(Chief Shepherd)이시다(벧전 5:4). 선한 목자는 십자가와 선지자를 가리키고 있고, 위대한 목자는 보좌와 제사장을 바라보며, 목자장은 다시 오심과 왕을 내다보고 있다(시 45편; 46:6-9). 시편 22편에서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값을 주고 사시고, 시편 23편에서 위대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지키시며, 시편 24편에서 목자장은 자기 양들에게 보상하신다. 선한 목자는 처음에 “선자자요 구주”로서 죽기 위해 오셨다. 위대한 목자는 지금 제사장이자 중보자로서 중보하고 계시다. 목자장은 앞으로 왕이요 심판주로서 다시 오셔서 신실한 자들에게 보상하실 것이다.
에스겔서에서는 “이스라엘의 목자”(시 80: 1)로서 선택받은 자신의 백성을 함께 모으시는 주의 예언적인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목자가 흩어져 있는 자기 양들 가운데 있는 날에 그가 자기 양무리를 찾아냄같이 나도 내 양을 찾아내고 그 양들이 흐리고 어두운 날에 흩어졌던 모든 곳에서 그들을 구해 내리라』(겔 34:12). 시편은 이스라엘의 찬송가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나의 목자이신 “여호와로이”(Jehovah-Ro’i)를 찬송해 왔다(창 49: 24). 『오 이스라엘의 목자여, 요셉을 양떼처럼 인도하시는 주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주여, 빛을 비추소서』(시 80:1).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서 소개하셨을 때, 그것은 자신이 자기 백성을 해방시켜 줄 약속된 구원자(Deliverer)로서 오셨음을 공표하신 것이었다. 양들은 양식을 배불리 먹을 때까지는 안정과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양무리의 선하시고 위대한 목자장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성도들도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시편은 영감받은 기도들과 찬송들과 경건하고 탁월한 예언의 모음집이다. 시편은 여호와의 고난과 다가올 영광을 계시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갈보리에서 목자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내려졌고, 그로써 양들은 구원받게 되었다. 『목자를 치라. 그리하면 양들이 흩어질 것이라』(슼 13:7, 마 26:31). “선한 목자”는 그리스도의 가장 거룩한 모형이다. 갈보리 위에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보다도 더 위대한 자기 희생은 없다(사 53:3-7). 솔로몬의 노래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술렘 여인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목자의 예표를 보게 된다. 술렘 여인은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사라지면 돌아오소서,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은 벧엘 산 위의 노루나 어린 사슴 같나이다.』(솔 2:17)라고 부르짖는다. “벧엘”(Bether)이란 말은 성경에서 여기에 단 한 번 나오는데 “이별과 별거”(separation)를 의미한다. 목자요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그의 신부로부터 떨어져 있지만, 『날이 기울...면』(Until the day break) 돌아오실 것이다.
아벨은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첫 번째 모형이다(창 4:10,1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아벨의 피보다 더욱 좋은 것을 말하는 뿌리는 피에 이르렀느니라』(히 12:24).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부르짖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으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으니, 이제 너는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으리라』(창 4:10,11). 여기서 우리는 선한 목자의 피로 예표되는 죄의 용서를 위한 레위기의 속죄제를 보게 된다. 아벨은 어린 양을 드렸고, 어린 양은 그 목자를 위해서 죽게 된다. 『아벨도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4).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어린 양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구약성경에서 양들은 목자를 위해서 죽었지만, 신약성경에서는 목자가 양들을 위해서 죽으셔야 했다(요 10:11).
“웃음”(창 18:12)이란 이름의 뜻을 가진 이삭은 부유한 목자였다. 『주께서 나의 주인을 크게 복 주셨기에 그는 위대하게 되었으며, 주께서 그에게 양떼와 소떼와, 은과 금과, 남종들과 여종들과, 낙타들과 나귀들을 주셨으며, 내 주인의 아내 사라가 늙어서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았더니 그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창 24:35,36). 이 부유한 목자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성도들 가운데서 그의 부요함을 나누어 주셨다.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분이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되도록 하심이라』(고후 8:9). 성도들은 시대를 거쳐 오면서 그분의 찬양과 영광이 되어 왔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도들을 세심하게 돌보시는 이유이다(딤후 1:12, 벧전 1:5).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그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라고 말한다(엡 1:18). 모세는 『이는 주의 분깃은 그분의 백성이요, 야곱은 그분의 유업의 몫임이라.』(신 32:9)고 노래했다. 양들은 목자의 눈에 소중한 존재들이다. 양들이 목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찾는 것이다.
책임감있는 목자인 야곱은 라반에게 책임감을 보여 줬다. 『짐승들에게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내가 그 손실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둑을 맞았거나 밤에 도둑을 맞았거나 외삼촌께서는 내 손에서 그것을 요구하였나이다』(창 31:39).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양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책임을 다하셨다. 야곱은 약간의 손해만 입었지만(창 30:31-43; 33:13), 이것은 그리스도의 참된 원형은 아니다. 동방의 목자들이 밤낮으로 양들을 지키는 것처럼, 하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양들을 신실하게 돌보신다(사 40:11). 『너를 지키시는 그는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라』(시 121:3b,4). 『그는 목자처럼 그의 양떼를 먹이실 것이요, 자기 팔로 어린 양들을 모아 그의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와 함께 있는 것들을 유순하게 인도하시리라』(사 40:11). 목자로서 야곱은 한 아내를 얻기 위해서 여행을 해야만 했다. 『야곱은 시리아 지방으로 도망하였고 이스라엘은 아내를 위하여 섬겼으니, 그가 아내를 위하여 양을 쳤도다』(호 12:12). 그래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인자로서, 종으로서 오셨다(눅 22:27). 그리스도께서도 결국 자기 신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실 것이다.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손”(hands)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목자인 야곱과 관련이 있다. 『요셉의 활이 더욱 강하고 그의 손의 팔이 야곱의 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통해 강해졌으니, (거기에서 목자, 곧 이스라엘의 돌이 나오도다.)』(창 49:24).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서 미움 받는 목자였다(창 37:8-20). 『그의 형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참으로 우리를 치리하겠느냐? 아니면 네가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하고 그들이 그의 꿈과 그의 말로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창 37:8).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목자인 그의 형제들에게서 미움을 받으셨다. 그들의 양무리인 이스라엘을 방치했던 산헤드린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거짓 목자임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구약성경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도 존재했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오 앗시리아 왕아, 네 목자들은 잠자고 네 귀족들은 티끌 속에 거하리로다. 네 백성은 산에 흩어져 있으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나 3:18). 『그러므로 그들이 양떼처럼 그들의 길을 갔으며 목자가 없으므로 고난을 당하였도다. 내 분노가 그 목자들을 향하여 타올랐으며』(슼 10:2b,3a). 『양떼를 버려 둔 우상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슼 11:17a) 에스겔 선지자는 이 신실하지 못한 목자들에 대적하여 예언하고 있다(겔 34:2,5,7-10,12).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우면 그가 그들을 먹이리니, 곧 나의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일 것이요, 그가 그들의 목자가 되리라.』(겔 34:23)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지치고 흩어』진(마 9:36) 백성들을 보셨고, 주님은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셨다. 『그때 예수께서 나오셔서 많은 무리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이라. 그리하여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더라』(막 6:34). 모세는 인도하는 목자였다(출 3:1-12). 『이제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데, 그가 그 양떼를 광야의 뒤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더니』(출 3:1). 모세는 40년 동안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였는데, 이는 후에 하나님의 양떼를 치는 목자로서 준비되기 위하여 훈련받은 것이었다. 모세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양떼를 약속된 카나안 땅을 향하여 인도했다. 『그때에 주께서 옛적의 날들과 모세와 그의 백성들을 기억하여 말씀하기를 “자기 양무리의 목자와 더불어 그들을 바다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분이 어디 계시뇨? 그 안에 그의 거룩한 영을 두신 분이 어디 계시뇨? 그의 영광스러운 팔과 모세의 오른손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 앞에서 물을 나누시고 친히 영원한 이름이 되신 분이 어디 계시뇨?』(사 63:11,12)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양떼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이 그를 따』랐던(요 10:4) 목자 모세의 위대한 원형이시다.
다윗은 목자이자(대상 17:7) 왕이요, 구원자였다. 다윗이 목자로서 어린 양을 곰의 입에서 구출해 내었던 것처럼(삼상 17:34,35),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남겨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다니신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일백 마리를 가졌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었다면 아흔 아홉 마리를 광야에 두고 그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다가 그가 그 양을 찾으면 자기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와서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함께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하리라』(눅 15:4-6). 형 엘리압은 다윗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네가 여기에 왔느냐? 광야에 있는 양 몇 마리는 누구에게 남겨 두었느냐?...”』(삼상 17:28)라고 했다. 하지만 다윗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양들을 양치는 자에게 남겨 두고』 왔다(삼상 17:20). 양치는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이 시대에 자기 양떼들을 성령님과 함께 남겨 두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수하의 목자들이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고 돌보』(벧전 5:2)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요한복음 10장에는 거짓 목자와 선한 목자가 잘 비교되어 있다. 거짓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지만(1절), 선한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신다(2절). 거짓 목자인 낯선 사람은 양들이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서 달아난다(5절). 그러나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선한 목자를 따라간다(4절). 거짓 목자는 『오직 도둑질하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오는 도둑이지만(10절), 선한 목자는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10절). 거짓 목자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려 두고 도망』치지만(12절),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다(15절). 유대인들이 선한 목자를 가리켜 『그는 마귀들리고 미쳤』다고 했을 때(20절), 선한 목자를 따르는 양들은 『마귀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21절)고 반문했다. 유대인들이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라.”』(24절)고 했을 때, 선한 목자께서는 『너희가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라.』(26절)고 지적하셨다. 거짓 목자는 옳게 보이나(잠 14:12; 16:25) 죽음으로 향하는 “또 다른 길”이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마 7:13)이지만,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들의 문이』요(7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마 7:14)이라고 선포하고 계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