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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개혁자가 없는 종교개혁 5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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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10월호>
이번 10월 31일은, 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5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각종 교단 및 기독교 단체들은 종교개혁자의 후예들로 자처하고 싶었는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일에 열을 올리는 모양새다. 출판사들은 각종 종교개혁 관련 서적들을 앞다투어 출간했고, 그에 발맞춰 포럼과 강연회들도 개최되었다. 교단 교회들에서는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취지의 설교와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우려먹으면서 개혁자들의 신학과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느니, 개혁주의를 고수해야 한다느니 하는 구호들은 너무나 식상하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연주회, 전시회, 기타 공연 등도 열리고 있으며, 기념 메달, 크루즈 여행 등의 기념상품들도 출시되었다. 심지어 루터를 다룬 영화까지 개봉된다고 한다. 과거에는 로마카톨릭이 면죄부를 팔아 돈을 벌었다면, 오늘날에는 타락한 개신교도들이 세상에다 "종교개혁 상품"을 팔아 돈을 버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한국 교회에게 물어보라. 그렇게 한 결과 올해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과연 종교개혁 500주년에 걸맞게 한국 교회의 부패를 타파하고 그 근간부터 쇄신하는 개혁이 일어난 것인가?한국 교회의 현실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정교회, 루터교, 감리교 등은 이미 로마카톨릭으로 귀의해 버렸다. 다른 교파들도 여러 가지 통합 기구들을 구성함으로써 카톨릭에 대한 반감을 상실해 버린 지 오래되었다. 다시 말해서 "반(反)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을 통해 "프로테스탄트들"을 다시 삼키려 했던 카톨릭의 계획은 90% 이상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종교개혁," "개혁교회," "개혁주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 따위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에게 지금까지 무엇을 개혁했냐고 물어보라. 또한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개혁할 것인지도 물어보라. 단언컨대 그들 모두는 겸연쩍은 자세로 단 한마디의 답변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타락상을 통감한 자들이라면 이런 쓸데없는 행사들 대신에 근본적인 개혁의 발걸음이 무엇인지를 고심했을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는 카톨릭과 똑같이 타락의 진창에서 뒹굴고 있다. 목사들이 먹고사는 직업으로 목회를 하고 있고, 교회들에서는 집사, 장로, 권사 등의 직분을 돈으로 사고팔고 있으며, 예배당은 교인들의 사업장과 그들의 성공과 복을 기원해 주는 우상들의 전당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프로테스탄트," 곧 로마카톨릭에 항거했다는 자들이 카톨릭의 변개된 원문에서 번역된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떠들고 있으니 할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대한성서공회가 출간한 그런 변개된 성서들로는 개혁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500년 전의 개혁자들을 치켜세우며 기념한다고 하는 것은 타락과 위선의 극치에 불과하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회칠한 무덤들과 같음이라. 그것들은 실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도다』(마 23:27).
종교개혁의 의의
종교개혁 500주년과 관련된 그런 위선자들의 기념행사와 운동과 결의 대회는 모두 무의미한 짓들이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흔히 종교개혁 하면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이들은 카톨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루터는 유아세례와 화체설 등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칼빈은 "극단적 칼빈주의"라는 거짓 교리를 유물로 남겼고, 자기와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으며, 심지어 그의 제자들은 미국에서 살렘 마녀 재판을 통해 사람들을 화형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그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성경적인 개혁에 있어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롬의 라틴벌게이트를 통해 카톨릭이 유포한 변개된 성서들을 버리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시켰다는 것과 그 진리의 말씀을 알고 있는 만큼 그대로 실행했다는 사실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유럽 전역을 뒤덮고 있던 비진리의 어두운 장막이 걷힐 수 있었던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독일에서 살아남으려면 그의 입장을 철회해야 한다는 카톨릭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그에게 그들과 타협하며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루터는 그들 앞에서 최후의 입장을 표명하기 전날 밤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저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를 위해 어린양처럼 인내하면서 저의 목숨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에는 마귀들이 가득하기에, 설령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이 몸이 길거리에 널브러지고 잘려지고 한 줌의 재가 된다 해도 저의 혼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저의 혼은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저의 혼이 주님과 영원히 함께 거할 것을 믿습니다. 아멘! 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이처럼 루터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대적하여 벌떼처럼 모여든 마귀의 세력들, 곧 카톨릭의 교황과 유럽의 군주들 앞에서 담대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민족들이 나를 에워쌌으나 주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정녕, 그들이 나를 에워쌌으나 주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그들이 벌떼와 같이 나를 에워쌌어도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나니 주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멸할 것임이라』(시 118:10-12).
루터의 종교개혁은, 알비겐스와 왈덴시안 같은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보존된 신약의 헬라어 표준원문(Textus Receptus)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을 비롯하여 유럽 각국의 자국어 성경들로 번역되게 만드는 강력한 동력을 낳았고, 마침내 영국에서는 이 개혁의 물결에 힘입어 1611년에 <킹제임스성경>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복음과 진리의 지식이 전 세계로 전파될 수 있는 교두보가 확보되었고, 이에 <킹제임스성경>은 영미권에서의 혼들의 구원과 성경적 지식의 폭발적인 확산, 미국과 영국을 뒤흔든 대각성 운동, 땅끝까지 뻗어 나가는 선교 운동 등의 전대미문의 열매들을 맺었다. 이것이 바로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라 불리는 기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였다. 요컨대 암흑시대로부터 되찾은 올바른 성경 원문인 표준원문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이 개혁으로 인해 <루터성경>과 유럽의 자국어 성경들과 <킹제임스성경>이 나올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킹제임스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힘 있게 융성하며 세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행 19:20).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가져온 성경 없이 종교개혁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다. 그것은 마치 온 세상을 향해 강력하고 뜨거운 생명력을 내뿜었던 심장은 보지 못하고 메말라 버린 거죽만 매만지는 격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한 권의 책을 통한 부흥
이스라엘 역사를 보더라도 "개혁과 부흥"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그 말씀을 실행하는 일에 헌신한 한 사람에 의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선한 왕들은 남왕국 유다에서만 나왔는데, 주 하나님께서는 그 왕들에 대해 평가하실 때 종종 다윗과 비교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다윗만큼 위대한 왕이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으며(삼상 13:14),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새기고 실행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정녕, 주의 법이 나의 마음속에 있나이다』(시 40:8).
다윗 이후로 유다에서 가장 큰 개혁을 일으킨 왕을 꼽아 보자면 히스키야 왕을 들 수 있다. 그는 진리의 하나님께 밀착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켰던 왕인데, 바로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 그를 사용하신 것이다. 『히스키야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니 그의 이후로는 유다의 모든 왕 가운데 그와 같은 자가 없었으며 그의 이전에도 없었더라. 그가 주께 밀착하고 그를 따르는 데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그의 계명들을 지켰더라』(왕하 18:5,6). 또한 히스키야 이후로 남왕국 유다에 다시 배교가 만연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거의 다 차 가고 있을 무렵에 보좌에 오른 요시야 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유다의 마지막 개혁을 주도하게 하셨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통회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율법책의 말씀들을 듣자 그의 옷을 찢고』(왕하 22:11).
이후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 뒤 70년의 포로 생활 끝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할 무렵, 에스라가 등장하여 부흥을 일으켰다. 에스라에게도 앞선 왕들과 공통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그것을 실행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에스라가 주의 율법을 찾고 그것을 행하고 규례들과 명령들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칠 것을 마음으로 준비하였더라』(스 7:10). 이처럼 성경과 교회사를 통관해 볼 때, 하나님의 부흥과 개혁은 항상 "한 권의 책," 곧 순수하게 보존된 거룩한 성경이 가져온 부흥과 개혁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찾아서 읽고, 그 말씀에 반응하여 이 민족과 교회들의 타락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스 10:6),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을 온전히 실행하려는 진정한 개혁자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루터와 그의 종교개혁을 그리워하면서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루터의 하나님께서는 이제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다만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용, 곧 리비야단(사탄)을 상대로 루터처럼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의 칼을 가지고 대적하여 싸울 예수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성경대로 믿는 성도라면 누구나 이 마지막 때에 사방에서 몰려오는 모든 거대한 용의 세력들을 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기치를 높이 들고 담대히 서서 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개혁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믿고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또한 그 말씀을 온전히 실행하는 가운데 이 변질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안락함을 내려놓고 목숨까지도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불과 같은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불타오르게 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 모두는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실 모든 곳에서 영원하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불타오르는 참된 개혁의 불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나는 그를 언급하지 아니하고 더 이상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서 내 뼈들 속에 사무치는 타는 불 같아서 내가 참기에 지쳤고 견딜 수 없었나이다』(렘 20:9).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