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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종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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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8월호>
성경에서 종이 차지하는 위치는 가볍지 않다. 이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분의 종들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노사 간의 평등을 외치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성경적 관점”이다. 종에게는 그의 위치에 맞는 역할이 요구되는데, 바울은 그리스도인 종들에게 다음과 같은 실행 지침을 주었다. 『종들아, 육신에 따른 주인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복종하되 순전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선한 뜻으로 봉사하되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을 불문하고 주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 6:5-8). “그리스도인 종”은 종으로서의 신분을 망각하지 말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께 하듯이 육신의 주인에게도 복종하라는 것이 바울의 명령이었다.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신실하게 일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인 종에게 부여된 “신약적 명령”인 것이다.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자기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아주 열심히 섬기는 모습뿐이다.성경에는 다양한 종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일례로, 주인이 자기 집을 다스릴 자로 세워, 정한 시기에 그들에게 양식을 나눠 주는 종을 가리켜 “신실하고 현명한 종”이라고 부르는가 하면(마 24:45-47), 주인이 오는 것이 늦어질 것으로 생각하여 동료 종들을 때리고 주정뱅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거나(마 24:48-51)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 열매를 맺지 않는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부른다(마 25:24-30). 이상의 사례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있어서 신실함과 관련된 판단이지만,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불의한 종의 비유”는 그런 “일”과는 별개로 은혜를 망각한 악한 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종은 자신이 “어떠한 용서의 은혜”를 입었는가에 대해 잊어버린 파렴치한으로, 애초에 받았던 탕감의 은혜를 상실하고 원점으로 돌아가 막대한 빚을 갚아야 하는 수치를 맛보게 된다.
이것은 “용서”와 관련하여 베드로가 드린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답변하시면서 덧붙이신 비유였다. 『그때 베드로가 주께 와서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에게 일곱 번까지라고 말하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고 하노라』(21,22절). 주님의 답변은 거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가르치고 있지만, 누가복음 17:3의 말씀을 참조하면 용서에 대한 조화로운 해석을 내릴 수 있다.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라. 네 형제가 너에 대하여 죄를 지으면 그를 꾸짖고, 그가 회개하면 용서하라.』 여기서 요구되는 용서는 죄지은 형제가 “회개한다는 조건”하에서의 용서다.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490번”의 용서로 한정을 짓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무한한 회개”에 대한 “무한한 용서”를 말씀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바탕으로 용서하시는데, 이를 고려할 때 회개하는 동료의 애원을 듣고서도 사람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하루에 일곱 번이나 너에게 죄를 짓고, 또 하루에 일곱 번이나 너에게 돌아와서 ‘내가 회개한다.’고 말하면 그를 용서하라』(눅 17:4).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한 형제를 『하루에 일곱 번』(눅 17:4) 용서할 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22절) 용서할 것을 요구하셨다. 한편 이것은 용서가 생활화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을 참되게 섬길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었을 때 복수의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회개할 때는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목적이 범죄로부터의 회복에 있는 것이지 복수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어떤 사람이 무슨 잘못을 범하였으면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런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지 아니하도록 하라』(갈 6:1).
베드로의 용서에 관한 질문에 짧게 답변하신 주님께서는 거기서 멈추시지 않고 불의한 종에 관한 비유도 드셨다. 『그러므로 천국은 마치 자기 종들과 계산을 하고자 하는 어떤 왕과 같으니라. 그 왕이 계산을 시작하니 일만 달란트 빚진 한 사람을 자기 앞에 데려왔더라. 그러나 그에게는 갚을 것이 없으므로, 그의 주인이 명령하기를, 그 자신과 그의 아내와 자식들과 그의 소유를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하니, 그 종이 왕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하기를 ‘주여, 참아 주소서. 그러면 제가 다 갚겠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러자 그 종의 주인이 그를 가엾게 여겨 풀어 주고 그 빚을 탕감해 주었더라』(23-27절). 여기에서 왕이 계산을 하고자 하는 “종들”은 마태복음 25:14-30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의 “유대인 종들”과 같다. “불의한 종의 비유”를 단순하게 볼 수 없는 이유는, 여기 본문에서 왕이자 주인으로 묘사되는 분이 바로 『주』라고 불리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주여, 참아 주소서』(26절). 종은 왕에게 경배를 드리면서(26절) 간청했는데, 경배를 받으셨다는 점에서도 그 왕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따라서 불의한 종의 비유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유대인 종들”과 관련하여 “용서의 원칙”을 보여 주시는 중요한 “교리적 비유”이다.
한편 본문의 종은 주인인 왕에게 “1만 달란트”를 빚졌는데, 1만 달란트를 환산하면 “6천만 데나리온”이 나온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임을(마 20:2) 감안하면, 1만 달란트는 한 유대인이 약 164,384년 동안 노동으로 벌어들인 하루 품삯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꼬박 저축했을 때 손에 쥘 수 있는 액수이다. 사실상 그 종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벌어도 갚지 못할 빚을 왕에게 지고 있었던 셈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입에서 나온 간청은 『주여, 참아 주소서. 그러면 제가 다 갚겠나이다.』(26절)이었으니, 마치 복음을 전하는 구령 현장에서 결코 지불하지 못할 죗값을 자기가 다 지불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어리석은 죄인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볼 때, 불의한 종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가지 천국의 비유들”에 뒤이어 나오는 “여덟 번째 천국 비유”이므로 천국과 관련하여 해석해야 한다. “천국”은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 가져오시려 했던 “물리적인 지상 왕국”인데(마 4:17), 당시에는 거부를 당했기에 그로부터 약 2천 년 후인 재림 때로 연기되고 말았다. 따라서 천국 비유의 하나로 제시된 불의한 종의 비유는, “역사적으로는” 십자가 이전의 구약 성도들에게 적용되고 “영적으로는” 교회에 적용될 수 있지만, 마태복음의 “교리적 측면에서” 보면 초림 때 거부된 왕국이 다시 도래하는 시기와 연관된 “대환란”과 “천년왕국”에 적용된다.
이 “문제의 종”은 그를 가엾게 여긴 왕으로부터 모든 빚을 탕감받았을 때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과 아내와 자식들과 그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라도(25절) 갚아야 했을 마당에 그 모든 빚을 탕감받았으니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겠는가? 다시 말해 그 유대인 종은 빚을 갚기 위해 “율법”에 따라 노예가 되어야 할 판국이었다! 『네 곁에 거하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서 억지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체류하는 자와 같이 너와 함께 있게 하여 환희의 해까지 너를 섬기게 하다가 그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들이 너를 떠나 그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자기 조상들의 소유로 돌아가게 할지니라』(레 25:39-41, cf. 왕하 4:1).
그러나 모든 빚을 탕감받은 종은 그 자비로운 왕에게서 나갔을 때,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 종을 만나자 그를 붙들고 멱살을 잡고는 “네 빚을 갚으라.”라고 하면서 윽박질렀다. 동료 종은 『참아 주게. 그러면 내가 다 갚겠네.』(29절)라고 했지만, 채권자 입장의 그 종은 채무자인 동료 종의 간청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매정하게 그를 감옥에 넣어 버렸다. 사실 동료 종이 진 빚은 1백 데나리온이었는데, 이는 당시의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하면 벌 수 있는 돈이었다. 푼푼이 아껴 쓰면 갚을 수 있는 액수였음에도,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은 동료 종을 다짜고짜 감옥에 집어넣는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 안타까운 소식이 왕에게 전해지자, 왕은 그 사악한 종을 불러서 “오 너 악한 종아, 네가 나에게 애걸하기에 나는 네가 진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노라. 내가 너를 가엾게 여김같이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냐?”라고 하면서 화를 냈고, 이후 그가 왕에게 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들에게 넘겼다(31-34절).
예수님께서 위와 같은 비유를 통해 내려 주신 결론은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형제 각 사람을 그들의 잘못과 더불어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들에게 그렇게 하시리라.』(35절)였다. “너희들,” 곧 “유대인들”이 자기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해야만, 그들 자신도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신 것인데, 여기서 “용서해야 용서를 받는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행위 구원”을 의미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려면 동료 유대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인즉, 이는 왕국 헌법인 산상설교에서 가르쳐 주신 마태복음 6장의 기도에 나오는 “구원 방법”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들도 용서해 주시오며』(마 6:12). 당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대환란 기간에 왕국을 기다리면서 드릴 이 기도를(마 6:9-13) 알려 주신 뒤 곧바로 “용서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셨다. 『만일 너희가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니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이니라』(마 6:14,15). 이 구절들을 마태복음 18장과 비교해 보면 “불의한 종의 비유”에서 언급하신 “빚”은 사실상 하나님께 진 “허물”의 빚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1만 달란트” 같은 허물을 용서받은 유대인이 고작 “1백 데나리온” 같은 동료 유대인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자신의 허물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이처럼 이 비유가 교리적으로는 대환란과 천년왕국 기간에 있을 일이지만, 거기에 담긴 “영적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행위가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용서받았다(롬 4:5). 그러니까 지옥에 가기에 합당한 우리의 죄를 값없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저질러지는 형제자매들의 작은 허물 정도는 기꺼이 용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엡 4:32).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용서하지 않는 것 자체가 형리들에게 넘겨질 일은 아니지만, 용서하지 않았을 때 마귀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 있기에 항상 주의해야 한다(엡 4:26,27). 우리가 “지옥에 갈 죄인”이었을 때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구원받은 동료 그리스도인”이 범한 허물 정도야 그들이 회개할 때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용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식이기도 하지만, 성도의 성숙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성경대로 믿는 기독교 신앙은 용서의 종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은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였다. 세상 종교들은 자신이 직접 죗값을 치르려고 하지만, 참된 종교는 용서를 통한 구원을 선물한다. 용서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성도들의 증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