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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양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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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0월호>
우리의 삶 속에는 사라지는 것들과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대개 “사라졌다”라고 할 때는 아쉬움이 없고, “잃어버렸다”라고 할 때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 그런 것일까? 이 미묘한 어감의 차이는 “무익”과 “유익”의 간격에서 비롯된다. 무익했던 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라진 것이고, 유익했던 것이 때마침 필요할 때 행방이 묘연하면 잃어버린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것을 감지했을 때 안타까움과 슬픔이 격랑처럼 일기도 한다.필자가 어린 나이에 이모를 따라 부산의 외삼촌 댁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친척 형과 동생, 이 둘과 동네 놀이터에서 놀던 중 어딘가로 함께 갈 일이 생겨 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는데 그들을 따라가다가 그만 놓치고 말았다. 좁고 굽은 골목길을 벗어나자 두 사람은 온데간데없었고,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울음보가 터져 버렸다. 한순간에 미아 신세가 된 것이다. 낯선 도심의 대로를 울면서 방황하기 시작하자,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아저씨가 필자를 목마에 태워 경찰서에 데려다주었고 여차여차해서 삼촌 댁에 돌아갈 수 있었다. 집에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눈물로 젖은 이모의 얼굴과 초상집 아낙 같은 외숙모의 초췌한 몰골이었다. 필자는 미아가 안 되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에 싱글거리며 집 안에 들어섰지만, 두 어른은 필자를 잃어버렸다는 슬픔에 목이 메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다.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는 다시 사면 되지만, 사람을 잃어버리면 그렇지 못하기에 슬픔과 당혹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신약성경에는 “잃어버린” 한 인물이 나오는데, 바로 “오네시모”이다. 빌레몬서 1장에서 종인 오네시모가 주인의 돈을 훔쳐 사라졌을 때(10,18절), 주인인 빌레몬은 종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느끼기보다는 그가 도주하여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분노했을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갚아야 할 빚이 있으면 자신에게 넘기라고 빌레몬에게 요청했는데(18절), 이는 오네시모의 잘못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잊고 주 안에서 새로운 관계로 그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였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동역자로 여긴다면 오네시모 또한 그처럼 동역자로 영접하라고 빌레몬에게 권고했다(17절). 이제부터는 오네시모가 그들에게 유익한 존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내가 갇힌 중에 낳은 내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청하노니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너와 나에게 유익하므로 내가 그를 다시 보내노니 그러므로 너는 그를 받아들이라. 그는 내 마음 같은 자라』(10-12절).
주인의 돈을 훔쳐 도망갔다가 붙잡힌 것으로 보이는 오네시모는 바울과 같은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바울의 구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오네시모는 이전에 종으로서는 유익했을지 모르지만 주 안에서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 구원받은 뒤로 빌레몬과 바울 두 사람 모두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네시모라는 이름 자체가 “유익한”이라는 뜻이다. 오네시모는 구원받기 전에는 주님께 전혀 유익하지 않았지만, 거듭난 뒤로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고후 5:17)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한 인물이 된 것이다. 『이제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의 사랑하는 형제』(16절)가 된 오네시모가 그 이후에 보인 행적은 골로새서에서 잠깐 언급된다. 말하자면 바울이 사랑하는 신실한 일꾼인 투기고와 동역할 정도로 사역에 유익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나에 관한 모든 일은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인, 동료 종 투기고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신실하며 사랑하는 형제 오네시모도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에서 있었던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골 4:7,9). 이렇게 되기까지 오네시모는 한때 잃어버린 존재였다. 골로새 지역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완고하고 반항적인 종에 불과했지만, 그렇게 무익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완전히 변화되어 바울의 사역에 유익한 성도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자기 혼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 16:26)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뒤 셋째 날에 다시 일으켜지실 것을 알려 주셨을 때, 이를 막아서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혼들을 찾기 위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셨다(딤전 3:16). 초림 당시 잃어버린 혼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만나시며 진리로 인도하셨는데, 이 점을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그때 모든 세리와 죄인이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주께 다가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평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죄인들을 영접하여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하더라』(눅 15:1,2). 이처럼 종교적 형식주의에 갇혀 혼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드신 비유가 “잃어버린 양의 비유”였는데,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어리석은 종교지도자들의 무지를 일깨우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일백 마리를 가졌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었다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두고 그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다가 그가 그 양을 찾으면 자기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와서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함께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아홉 명의 의인들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의 죄인을 더 기뻐하리라』(눅 15:4-7). 이 비유에서 “양”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십자가 이전인 구약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양으로 불리는 민족은 이스라엘뿐이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양이라고 부르는 구절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것이 이 비유를 교리적으로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너희는 주,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라. 우리를 지으신 분은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그분이시라.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초장의 양이로다』(시 100:3). 특히 “잃어버린 양”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에스겔 34장을 참고해야 한다. 『인자야,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대적하여 예언하라. 그들에게 예언하여 말하라. 주 하나님이 목자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자신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도다! 목자들이 양무리들을 먹여야 하지 아니하냐?... 내 양이 모든 산들과 높은 언덕마다 유리하였으며, 정녕 내 양무리가 땅의 모든 지면에 흩어졌으나 그들을 찾거나 찾아 나선 자가 아무도 없도다...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나, 곧 내가 나의 양을 찾을 것이며 또 그들을 찾아내리라. 목자가 흩어져 있는 자기 양들 가운데 있는 날에 그가 자기 양무리를 찾아냄같이 나도 내 양을 찾아내고 그 양들이 흐리고 어두운 날에 흩어졌던 모든 곳에서 그들을 구해 내리라』(2,6,11,12절). 이렇듯 구약 시대에 잃어버린 양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마 10:6)을 찾기 위해 자기 백성에게 오신 『주 하나님』은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한 “선한 목자”의 노력은 누가복음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도 계시가 되는데, 그중에서도 논란이 되는 말씀이 요한복음 10:16이다. 『또 나에게 이 양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어 내가 그들도 데려와야 하리니, 그들도 나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 그리하여 한 양떼에 한 목자만 있으리라.』 이것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아느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나도 아버지를 아나니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나의 생명을 내어 놓느니라.』(요 10:14,15)라는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로서, “이 양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과 관련하여 다양한 해석들이 등장한 것이다.
첫째, 로마카톨릭은 이 양들이 종교개혁의 산물인 프로테스탄트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보기에, 프로테스탄트들은 종교개혁 때 양우리에서 뛰쳐나간 양들이므로 다시 돌아와 “한 목자”의 인도를 받는 “한 양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들은 종교개혁 때 양우리를 뛰쳐나간 다른 양들을 예수님께서 데려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면서, 요한복음 17:21의 기도 역시 프로테스탄트들이 양우리로 돌아와 한 양떼가 되게 해 달라는 간구였다고 가르친다. 『이는 그들 모두가 하나 되게 함이오니,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서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로마카톨릭은 이 말씀을 근거로 비성경적인 “교회일치운동”을 벌여 왔는데, 밥 존스 시니어는 “교회일치운동은 양떼들을 한데 모아 놓고 이리가 한입에 삼켜 버리려는 수작이다.”라고 따끔하게 일갈했다.
둘째, 지구 외에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이나 외계의 다른 별들에도 인간이 살고 있을지 모르는데, 이 양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바로 그 “외계의 인간들”이라고 해석하는 자들도 있다. 하도 터무니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셋째, “양우리”는 유대인의 양우리를 말하고, 이 양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은 이방인들을 말한다는 해석도 있다. 특히 『그들도 나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요 10:16)라는 말씀은 이방인도 복음을 듣게 된다는 것인데, 그리하여 유대인 양무리와 이방인 양무리가 한 양우리에 들어와 한 양떼를 이루고 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양떼를 인도하게 되신다는 것이다. 아주 그럴듯한 해석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은 성경에서 결코 “양”으로 불릴 수 없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이방인은 결코 “다른 양들”로 언급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은 성경에서 『본래 진노의 자녀』(엡 2:3)이자 『불순종의 자녀』(엡 5:6)로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엡 2:2) 행하는 자들로 불린다.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에 속하지 않는 타국인이요, 약속의 언약들로부터는 생소한 사람이었으며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도』(엡 2:12) 없는 사람들인데, 그들을 주님께서 양이라고 부르셨다니 말도 안 되는 해석인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양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은 초림 때 주님께서 계셨던 팔레스타인 땅이 아닌 다른 곳에 있던 양들로서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으되, 멀리 흩어져 있는 양들까지 찾으러 오셨건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잃어버린 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주님의 자비로운 행보에 눈살만 찌푸리고 있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열정적인 거리설교와 개인구령을 광신적인 종교 행위로 몰아붙이는 가짜 교회들이 있는데 당신도 그러한가? 잃어버린 한 혼은 온 세상보다도 가치가 있다(마 16:26). 혼을 지으신 분이 혼을 구원하러 오셨다면 그리스도인 역시 잃어버린 혼 하나를 구원하는 데 온 열성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도 그렇게 하도록 하라!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