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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탕자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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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12월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하는 사랑이다. 『주께서 옛적에 내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가 자애로 다가섰노라. 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서게 되리라. 네가 다시 네 작은 북으로 단장하여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춤추는 데로 나올 것이라』(렘 31:3,4). “선택”에 있어서 그들의 조상으로 인해 사랑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신 것에 대해 주님께서는 결코 후회가 없으시다(롬 11:28,29). 그렇기에 그 민족이 아무리 타락해서 곁길로 간다 할지라도 그들을 포기하시는 법이 없다. 구약성경에서 메아리치는 “돌아오라!”라는 주님의 음성은 타락한 자기 백성을 향한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사 44:22, 렘 3:1,7,12,22, 호 14:1, 말 3:7).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 내는 것이기에(고전 13:4,7), 주님께서는 시들지 않는 오래 참는 사랑으로(고전 13:4,8) 이스라엘이 죄에서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오기만을 오늘도 기다리시는 것이다.택함받은 이스라엘이 죄로부터 돌이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다음의 말씀에서도 나온다. 『나는 에프라임이 이렇게 스스로 탄식함을 분명히 들었나니 “주께서 나를 징책하셨으니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책을 받았나이다. 주께서 나를 돌이켜 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돌아가겠나이다. 이는 주께서 주 나의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분명히 나는 회개하였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가 내 넓적다리를 쳤나이다. 내가 내 젊은 시절의 책망을 지녔기에 부끄럽고 정녕, 수치스러웠나이다.” 하였느니라. 에프라임이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냐? 그가 기뻐하는 자식이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한 이후로 아직도 그를 열렬히 기억하고 있도다. 그러므로 나의 창자가 그로 인하여 괴로우니 내가 그에게 반드시 자비를 베풀리라. 주가 말하노라』(렘 31:18-20). 주님께서는 에프라임을 책망하신 뒤로 마음이 괴로워서 견디실 수 없었지만, 마침내 그들이 수치스러운 죄를 깨닫고 돌이키자 그들을 열렬히 껴안아 주신다. 이 말씀은 재림 때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분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부성애”를 엿볼 수 있다.
회개하는 백성을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집 떠난 작은아들이 이제나저제나 돌아올까 기다리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곧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교회 시대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회개”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다.
『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저에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주소서.’라고 하니, 그 아버지가 자기 살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라. 얼마 후에 작은아들이 모든 것을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그곳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자기 재산을 낭비하더라』(11-13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 비유는 “잃어버렸다가 찾은 아들”(24,32절)에 관한 비유이다. “탕자”(prodigal son)는 돈이나 시간 등을 낭비하는 아들을 일컫는 표현으로, 본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나누어 준 유산을 헤프게 써서 탕진해 버린 아들을 다루고 있다. 문제의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두 아들 가운데 하나로서 아버지가 죽으면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미리 받아 챙기는 “사악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실 어느 민족이나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기는 것은 자식의 도리로 합당치 않다. 왜냐하면 아직 살아 있는 아버지를 죽은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유대인 사회에서는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일이 아버지를 “산송장”으로 여기는 것과 같아서 매우 불효막심한 처사에 해당한다. “왜 빨리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 계시는가?”와 같은 태도이기에 결코 해서는 안 될 요구인 것이다.
하지만 떼쓰는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처럼,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특히 더 그런 듯한데, 작은아들의 어이없는 요구에 군말 없이 유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한편 작은아들은 자기가 받은 것을 싸 들고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하게 살며 한 푼도 남김없이 탕진해 버렸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들어 궁핍하게 되자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더부살이하면서 그의 농지에 있는 돼지를 치지만, 돼지가 먹는 곡식 껍질로도 배를 채우지 못하는 매우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13-16절). 이 부분에서 “아버지”는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해 매우 인자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이 원할 때 별다른 제지 없이 베풀어 주시는데, 그분의 백성은 그 받은 것을 가지고 육신적으로 사는 경향이 있음도 엿볼 수 있다.
“탕자의 비유”는 교리적으로 이스라엘에 적용된다.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죄를 뉘우치고 돌이킨 “세리들과 창녀들”을 상징하고, 큰아들은 그런 세리들이나 창녀들보다 자신들을 더 의롭게 여기는 제사장들과 장로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등과 같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요한이 의의 길로 너희에게 왔으나 너희가 그를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나 세리들과 창녀들은 그를 믿었느니라. 너희는 보고 나서도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며,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니라』(마 21:32). 자신의 과오에 대해 성찰할 줄 모르고 자신을 의롭게만 여기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행태”는 다음에 나오는 큰아들의 말과도 일치한다. 『보소서, 수년 동안 내가 아버지를 섬기고 어느 때에도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으나』(29절). 이런 우월감으로 충만한 큰아들의 태도는,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주님과 더불어 앉아 식사하는 것을 보고서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라면서 자신들을 그들로부터 분리한 바리새인들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그 “의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리들과 창녀들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나아오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마 9:10-13). 이렇듯 큰아들의 우월감은 “세리와 바리새인 간의 대조적인 기도”에서도 엿보인다. 『그후 주께서 자기들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은 멸시하는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또 한 사람은 세리더라. 그 바리새인은 서서 혼자 이렇게 기도하더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즉 착취하고 불의하며 간음하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차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눅 18:9-13).
이렇듯 “탕자의 비유”는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출 4:22)로 불리는 이스라엘 내에서 “작은아들”(세리들과 죄인들)과 “큰아들”(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대조하는 비유이다. 잃어버린 “작은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로 가 버린 “세리들과 죄인들”인데,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일부라는 의미에서 “아들”이긴 해도 여전히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상태다. 그들은 『그 나라[세상] 백성 중 한 사람[마귀]에게 더부살이를 하게』 된 작은아들과 같으며, 『그 주인[마귀]이 그를 자기 농지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15절) 했다는 사실은 마귀가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떠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시킨다는 점을 보여 준다(“유대인”에게 돼지는 “불결한 짐승”이다. cf. 레 11장). 그들은 돼지가 먹는 곡식 껍질로도 배를 채우지 못하고(16절) 굶어 죽어 가는데(17절), 이는 그 유대인들(세리들과 죄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지배 아래서 매우 비참한 영적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그들은 작은아들처럼 『자신을 돌아보고』(17절)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침례인 요한과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을 때 자신을 돌아볼 정도로 정신을 차렸고,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이미 아버지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 그가 자신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많은 품꾼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고도 남는도다. 그런데 나는 굶어 죽어 가는도다! 이제 내가 일어나서 내 아버지께로 가리라』(17,18절). 세리들과 죄인들이 깨달은 것은 자기들이 “민족의 아버지,” 곧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인데, 아울러 이 부분은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리니, 아버지여, 내가 하늘을 거역하여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18,19절). “탕자의 죄”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닌 “하늘을 거역한 죄”였다. 본질상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짓는 것”이란 얘기다(시 51:4). 하나님을 거역하여 떠나는 것이 “죄의 본질”이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탕자의 비유”는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교리적으로” 보여 주지만, “영적으로는”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그가 아직도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게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맞추더라』(20절). 아버지는 비록 작은아들이 죄를 범했지만, 그가 언제라도 집에 돌아온다면 그를 다시 영접하려고 매일같이 길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잃어버린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든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고, 돌아올 것을 대비하여 송아지 한 마리도 살찌우고 있었다(27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이 올바르게 되기를 오늘도 내일도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회개의 제단으로 나아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시면,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달려 나와 안아 주시는 것이다! 『그가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에게로 갔는데 그가 아직도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게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맞추더라』(20절). “탕자의 비유”를 교리와는 별도로 “죄인의 구원”에 관한 좋은 그림으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죄인은 “마귀의 자식”이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에 아버지께 돌아오는 작은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이 죄에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에 영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다시 말해 “죄인”으로서 죄를 자백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를 자백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녀로서 죄를 자백하는 것이지 죄인으로서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요일 1:3)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 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이며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요일 1:6)이 된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 아버지 하나님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신다(요일 1:9). “찰스 스펄전”은 죄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야 할 곳은 “아버지의 품”이라고 했다. 죄지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울면서 자기 죄를 자백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