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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을 부르고 치유하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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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0월호>
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를 통해 앞으로 임하게 될 왕국의 핵심적인 규범인 “왕국의 헌법”이 제시되었고, 마태복음 8장과 9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는 “왕의 표적들”을 보여 주신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시요,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하려면, 이스라엘 백성의 눈높이에 맞는 최상의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표적”이었다. 표적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불러낼 때부터 시작되었다(출 4:1-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가올 왕국의 통치자이심을 증명하시기 위해 표적을 행하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주께서 배를 타고 건너가 자기 성읍에 도착하시니라. 그런데, 보라,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주께 데려오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기운을 내라. 네 죄들이 용서받았느니라.”고 하시더라. 그런데, 보라, 서기관들 중 몇 사람이 속으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도다.’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들이 용서받았느니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 위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세를 가진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그후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고 하시니, 그가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가더라. 무리가 이를 보고 놀라며 그러한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마 9:1-8).
마귀에게 사로잡힌 두 남자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후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성읍인 “카퍼나움”(막 2:1)으로 가셨다. 이때 주님께서는 몰려든 많은 사람에게 말씀을 전파하셨는데(막 2:2),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다. 옴짝달싹 못하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사람은 네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가 흔들리지 않도록 안전하게 옮겼을 뿐만 아니라, 지붕을 뜯고 부수면서까지 그를 주님께로 인도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치유하셨다.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안드레가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하고(요 1:40), 우물가의 여인이 마을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한 것처럼(요 4:39),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죄인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9장에는 다섯 번의 치유 표적이 나타나는데, 그중 세 번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2,18,32절) 치유받고, 두 번은 “자신의 믿음으로”(21,28절) 치유받는다. 따라서 예수님을 흉내 내는 은사주의자들의 “믿음과 치유에 관한 주장”은 거짓임을 알 수가 있다.
“중풍병자를 걷게 하는 것”과 “죄들을 용서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쉬운 일인가?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더 쉬운가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표적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행하심으로써 자신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다. 또한 이를 본 서기관들의 마음속 생각들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셨다(4절).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전에 “영적인 회복,” 곧 죄들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했다. 이는 산상설교에서 천국의 도래에 앞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마 6:33)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표적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선포하셨다(마 4:23; 9:35). 중풍병자의 “죄 용서와 치유”는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에 그들은 표적을 보면서 예수님을 메시아 왕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민족적으로 회복되는 치유를 받아야 했다.
바리새인들은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신 일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부인할 수 없는 치유의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죄들을 용서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목도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완고하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무리들(막 2:12)과는 정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했다(막 3:6). 이것이 바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죄인들의 반응”이다(창 4:5, 고전 2:14).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한 남자가 세무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니, 그가 일어나서 주를 따라가더라』(마 9:9).
마태는 “세리”로서, 그 당시 유대인들의 눈에는 동족에게 해악을 끼치는 죄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라”며 부르셨을 때, 그는 부르심에 즉각 응하게 된다(9절). 이것은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약적인 그림을 보여 준다. 마태뿐만 아니라,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4:19) 그리고 “빌립”(요 1:43)도 부르심에 응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그 부르심에 순종한 것은 아니었다(마 8:19-22). 왜냐하면 주님의 부르심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마 10:38).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늘 죄인들을 초청하셨고, 누구든지 주님께로 돌이키면 받아주셨다(요 6:35,37). 사실 식사에 초대된 사람 중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죄인들이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은 멸시”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자주 금식하고 십일조도 드리는 의로운 사람”과 “차마 눈을 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세리”의 비유로 그들의 양심을 찌르셨다(눅 18:9-13).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 “자비를 원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자비를 원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오직 주의 진노만이 있을 뿐”임을 상기시키셨던 것이다(호 6:6).
율법에 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종교지도자들은 죄에 대한 회개보다는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께서 자비를 통해 이제 곧 “하나님의 의”를 그들에게 이루신다는 사실을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참 의미를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함으로써(딤후 2:15)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춰져야 한다(딤후 3:16,17, 엡 2:10). 그런 사람만이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행 4:13).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