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와 모순 분류
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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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6월호>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진리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많은 문제들과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로마서 3:3-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어찌하겠느냐?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시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 기록된 바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고 함과 같으니라.』문제와 오류는 분명히 사람들에게 있다. 감히 성경에서 많은 문제들과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진짜 문제들과 오류들은 과연 무엇인가?
첫째, “성경을 읽는 그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진리를 문제와 오류로 바꾸는 주된 요인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본성적으로, 그리고 구원 없는 세상의 교육으로 인해 절대 진리를 몹시 싫어하거나 증오한다(엡 2:1- 4). 그들은 자신들이 저주받은 것과 같이(잠 15:10) 본능적으로 거룩함과 죄 없음으로부터 도망하려는 것이다(고전 6:9, 엡 4:18,19). 결국 그들에게는 깨닫게 해주는 영이 없기 때문에(고전 2:14) 문제들과 오류들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성경의 한 장도 결코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여러 편견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상상”이 문제들과 오류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특히 (미신적 혹은 형식적, 제도화된 신앙이라는 의미에서의) ‘종교적인’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것이다. 카톨릭 교도의 경우 마리아에 대해서(마 1:25),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요 1:18), 이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편견에 기인한 상상들로부터 문제와 오류는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서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부분을 대할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를 잘 시사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교리적으로 미심쩍은 구절에 대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많은 문제들과 오류들을 양산해 내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함과 동시에 역사적, 교리적, 영적 적용을 구분하지 못할 경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문제들과 오류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성경 기록의 특성을 알지 못하는 데서 많은 문제들과 오류들이 고개를 들게 된다. 그 특성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경에는 종종 사람과 장소들의 이름들과 숫자들을 다르게 기록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이러한 경우에 사람들은 문제를 제기한다.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 역시 이 경우에 속한다.)
둘째, 성경에 있는 많은 구절들은 연대기 순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출애굽기 24장과 재판관기 1장이 그러한 경우에 속하며, 요한계시록의 여러 부분들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쳐 이러한 특성이 나타난다. 그런데 성경이 연대기 순으로 기록되어야만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은 물론, 성경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두란노서원에서 출간한 <연대기성경>은 더욱 많은 문제와 오류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주석 성경들이 사람들을 더욱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셋째, 성경은 여러 번에 걸쳐 구체적인 진술들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5장과 마태복음 8장, 누가복음 23장과 마가복음 15장, 요한복음 5장과 마태복음 4장 등이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왜 성경이 이렇게 기록되었겠는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조명으로 성경 말씀들을 깨닫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들은 모두 알기 쉬운 것이지만 믿음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 잠언 8:8-9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내 입의 모든 말들이 의에 있나니, 그 말에는 비뚤어진 것이나 왜곡된 것이 전혀 없느니라. 그것들은 깨닫는 자에게는 모두 알기 쉬운 것이요, 지식을 얻는 자들에게는 옳은 것이니라.』
그러나 어떠한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지적되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모든 문제들과 오류들에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즉 사탄에 의해 뿌려진 악한 씨가 성경을 거부하는 “믿음 없음”이라는 유전자로 전수되어, 오리겐과 그를 따르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물론 오늘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성경변개와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방대하고 위력있는 유전인자로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 이후로 진리를 거슬러 제기되는 모든 거짓들의 근원은 성경과 역사가 증거 하듯이 사탄과 그의 종이 된 사람들로 귀결된다는 진리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창세기 21:31과 26:33에서 제기되는 문제 역시 위에서 언급한 한 예에 불과하며, 그 문제의 수준을 평가한다면 매우 낮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음 없음과 게으름과 편견과 상상과 조급한 결론으로 진리의 보고를 문제와 오류의 창고로 전락시키고 있는 전형적인 예이다. 창세기 21:31과 26:33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21:31 『두 사람이 거기에서 맹세하였으므로, 그가 그곳을 브엘세바라 불렀더라.』
창세기 26:33 『그가 그것을 세바라고 부르니라. 그러므로 그 성읍의 이름이 오늘까지도 브엘세바더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두 구절에서 “한 가지 대상”을 놓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라고 불렀고, 이삭은 “세바”라고 각각 다르게 부르고 있다고 판단하여 성경에서 오류룰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것이 변개된 성서들(개역한글판,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인의성경, 현대어성경)인가를 분별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경청하고, 기록된 말씀 하나하나를 단지 믿음으로써(롬 10:17, 살전 2:13),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신을 갖는다.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답을 얻고자 한다면 성경으로 돌아가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비교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 21:22-32의 말씀을 주의깊게 읽기 바란다.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대장 비콜이 아브라함을 만나게 되고(22절). 여기서 아비멜렉은 자기와 자신의 아들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줄 것에 대해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청하게 되는데(23절), 이에 대해 아브라함이 맹세를 하면서 이전의 잘못에 대해, 즉 아비멜렉의 종들이 폭력으로 샘물을 빼앗은 일에 대해서 아비멜렉을 꾸짖지만(25절), 아비멜렉은 그러한 사실에 대해 무지했음을 고백한다(27절). 그러자 아브라함은 샘물에 관한 문제를 그 시점에서 바르게 매듭짓기 위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며 문제되었던 우물에 대하여 두 사람이 한 언약을 세우게 된다(28절).
이 때 아브라함이 양떼에서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따로 떼어(28절), 문제가 되었던 우물을 아브라함이 팠다는 증거로 아비멜렉에게 주게 된다(30절). 이것은 그 우물의 소유를 서로가 분명히 확인했다는 표시가 되었던 것이다(29-31절). 그 결과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거기서 맹세했고, 아브라함은 맹세한 그곳을 브엘세바라 불렀다. 그래서 그곳이 브엘세바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이상의 말씀에서 보듯이 창세기 21:31의 브엘세바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에 대해 소유를 확정하고 아비멜렉과 언약을 세운 후 그들이 맹세했던 “한 장소”, 즉 어느 “한 곳”에 대해 명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창세기 26:33은 어떠한가? 창세기 26장을 주의깊게 읽어보라.
이삭의 때에도 아브라함의 때처럼 흉년이 들었고(1절), 이삭은 그랄에 거하게 된다(8절). 그곳에서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를 누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발생했던 해프닝을 그대로 반복한다(9-11절). 그 후 이삭이 씨를 뿌려 같은 해에 일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 창대하고 부유하게 되어 양떼와 소떼, 그리고 종들을 많이 소유하게 되자 필리스티아인들이 그를 시기하게 되었다(12-14절). 이로 인해 그들은 아브라함 때 팠던 모든 우물들을 막고 흙으로 채워버렸다(15절) - 여러 우물들이 있었음을 주목하라. -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곳을 떠나달라는 아비멜렉의 요청으로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장막을 옮겨 그곳에 거하였다(17절).
그 후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 팠던 샘물들을 다시 파기에 이른다(18절). 그 결과 이삭의 종들은 그랄 골짜기에서 솟는 샘물을 찾아냈으나(19절),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종들과 다투게 되었고 이삭은 그 우물을 “에섹”이라고 부르게 된다(20절) - 이름이 기록된 첫 번째 우물이다. - 그 후 이삭의 종들은 다시 다른 우물을 팠고 다툼이 발생하자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다(21절) - 이름이 기록된 두 번째 우물이다. - 그리고 이삭은 다시 그곳으로부터 옮겨 또다른 우물을 팠고 더 이상 다툼이 없었기에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였다(22절) - 이름이 기록된 세 번째 우물이다. -
그런데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삭이 거기에서부터 “브엘세바”로 옮겨갔다는 사실이다. (이는 현재 우리가 풀고자 하는 문제의 이름이 “브엘세바”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주님으 말씀을 들었고(24절) 거기에다 제단을 쌓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에다 자기 장막을 쳤다(25절). 그런데 거기서도 역시 이삭의 종들은 한 우물을 팠다(25절) - 아직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네 번째 우물이 있다. -
이제 문제의 단락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창세기 26:33이 포함된 26-33절의 한 단락이 그것이다. 창세기 21장과 유사하게 아비멜렉이 그랄로부터 이삭을 찾아와(26절) 자신들과 친선의 언약을 맺어줄 것을 요청하고(27-29절), 이에 대해 이삭은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이튿 날 서로 맹세한 후 그들을 평안히 보냈다(30절). 그런데 그들이 떠난 그 날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팠던 우물에 관하여(25절) 그들이 물을 찾았다고 말한다(32절). 그러자 이삭은 종들이 파서 발견한 것, 즉 그 우물을 “세바”라고 불렀다(33절) - 네 번재 우물에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 그런데 그들이 거하던 “성읍”(33절)은 이미 “브엘세바”라고 불리고 있었다(23절). 그렇기 때문에 이미 브엘세바라고 불리는 성읍에서 이삭이 “한 우물”을 “세바”라고 부른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에도 그렇게 불렸던 것처럼 이삭의 우물이 있는 그 “성읍”의 이름은 네 번째 이름인 “세바”와 함께 “브엘세바”라고 계속 불리게 된 것이다(33절).
정리해 보면 두 구절 중 창세기 21:31에서는 “브엘세바”를 장소, 즉 어느 한 곳(place)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창세기 26:33에서는 “브엘세바”를 성읍(city)을 지칭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브엘세바”는 지명으로 두 구절에서 모두 합당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창세기 26:33에서 “세바”라는 이름이 붙여진 대상은 한 우물이다. 그러므로 두 구절에서 같은 대상을 놓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각기 다르게 이름을 붙였다거나 혹은 잘못 기록되었다는 것은 성급한 억측에 불과하다. 또한 이러한 사실 외에도 이 두 구절의 시간적 차이, 즉 아브라함이 “브엘세바”라고 이름을 붙인 것과 이삭이 한 우물에 대해 “세바”라는 이름을 붙인 시점은 약 30년 이상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 가지 대상을 놓고서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인 것이 전혀 아니다. 아브라함 이후로 “브엘세바”라는 성읍의 이름은 이삭의 때에는 물론 모세의 때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으며, 그와 함께 브엘세바에서 이삭의 종들이 파서 발견한 우물은 “세바”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이다. 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성경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