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설교자들에게 고함 분류

설교자로 부르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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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2월호>

알프레드 깁스(Alfred P. Gibbs) / 장은혜 옮김


프레드 깁스(1890-1967)는 1890년에 영국 버밍햄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자랐고, 쌍둥이 형인 에드윈에게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군목으로 복무하면서 훈련소에 있는 군인들에게 설교했다. 1919년에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무디성경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거기에서 곧 구제 선교에도 참여했다. 알프레드 깁스는 그의 훌륭한 저서 <설교자와 그의 설교, The Preacher and His Preaching>로 목사와 설교자에게 친숙하다. 본지에서는 이번 호부터 총 2회에 걸쳐서 그 책의 「제5장, 설교자로 부르심」을 싣는다.



1. 설교자로 부르시는 일은 개인적이다.

설교자로 부르심은 순수하게 그리스도인 각인과 그의 주인이신 주님 사이의 문제이다. 부르심의 권한은 그리스도 그분만의 특권이기에 그분 자신의 뜻에 따라 누구라도 부르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선택하여 임명하였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너희 열매가 남아 있어』(요 15:16).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셨다(막 3:13,14). 주님은 바울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이방인들과 왕들과 또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내가 선택한 그릇임이라』(행 9:15). 따라서 주님께서 설교자로 부르시는 일과 별개라면, 세상 교육과 신학 교육은 말 그대로 모두가 무용하다.

언변이 유창하고 표현하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 자체로 설교자로서 자격을 갖췄다고 보면 안 된다. 선천적으로 기량도 뛰어나고 신체, 정신, 교육 수준이 적합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알렉산더 맥클래너는 한 설교자에 대해 “치명적으로 매끄럽다.”라고 평가했다. 천부적 소질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런 재주를 가졌다고 설교자로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

1)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다루신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하나님이시기에 부르심에 있어서 “대량 생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설교자는 한 묶음씩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마음에 부담(burden)을 주시고, 그에게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주지시키며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기를 거룩하게 촉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로 부르신 이사야가 그분의 말씀을 전파하면서 “엄중”(burden)하므로 반드시 전해야 한다고 거듭 표현한 점을 눈여겨보라(사 13:1; 14:28; 15:1; 17:1 등). 사도 바울도 그 일이 “부득불” 해야 할 일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정녕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전 9:16) 여호수아 또한 주의 군대 대장 앞에 엎드려서 물었다. 『나의 주여 종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나이까?』 여호수아는 거룩한 땅에 섰기에 신을 벗었고 머리를 숙인 채 주님을 독대했다. 그러면서 부르심과 명령을 받았고 하나님을 위해 그 숭고한 일을 이루고자 나아갔다(수 5:13-15).

2) 영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그분과의 교제를 만끽하는 중에, 즉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마음껏 즐길 때 부르신다. 육신적이거나 세상에 젖어 사는 그리스도인은, 더구나 그런 환경에서는, 그에게 주시는 미세한 음성을 조금도 감지하지 못한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말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새겨들어야 한다. 『너는 잠시 가만히 서 있으라. 내가 네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리라』(삼상 9:27). 그런 영적 분위기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롬 12:1)라는 말씀에 진지하게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 자신의 삶에 어떤 뜻을 갖고 계신지 알려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열렬히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면 즉시 순종해야 그 상태가 유지된다. 부르심은 그런 영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

3) 보통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할 때 부르신다.

수도원에서 외떨어져 지낼 때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게으른 그리스도인은 부르시지 않는다. 바나바와 사울을 부르셨을 당시 그들은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내게 따로 구별해 놓으라』(행 13:2).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라는 명령을 받았던 때도 양떼를 돌보던 중이었다(출 3:1,2). 기드온이 압제자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선택됐던 때 역시나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판 6:11). 엘리야가 엘리사의 어깨에 겉옷을 던져 하나님께서 그를 쓰신다고 알렸을 때도 엘리사는 밭을 가느라 바빴다(왕상 19:19). 그리스도를 섬기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고 마태는 세무를 보느라 분주했다(마 4:18,19, 눅 5:27). 그리스도인이 더 섬기도록 부름받는 시점은 자기 손에 이미 받은 일을 하고 있을 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누구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알게 되리라』(요 7:17). 알고 있는 것에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뜻을 더 보여 주신다. 모든 성도는 다음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계속 주를 알고자 하면 그때 우리가 알게 되리라』(호 6:3).

2. 부르심은 확실하다.

부르시는 방법이 다양하고 환경이 다를 수는 있지만 부르심 자체는 뚜렷하다. 그래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특정한 일을 하기를 바라신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를 통해 그는 기쁨으로 가득한 자신감과 거룩한 용기를 갖는다. 동시에 자신이, 또 자신이 전하는 설교가 어떤 권위에 기반하는가를 깨닫는다. 『나의 임재가 너와 함께 가며 내가 너에게 쉼을 주리라』(출 33:14). 설교자는 이 약속에서 용기를 얻어, 이후 틀림없이 모습을 드러낼 반대에 담대하게 맞설 수 있다.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판 6:12) 주님의 종은 힘을 돋우는 이 확언을 붙들고 부름받은 길을 지속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편에 계심을 이제 깨닫게 된다.

3. 여러 환경에서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뜻하신 일을 하게 하시려고 그분의 종들을 부르시는 방법을 면밀히 살펴보는 일은 매우 유익하다. 따라서 몇 명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아브라함 :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분명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러시면서 그에게 복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주셨다(행 7:2, 창 12:1-3).

2) 모세 : 모세는 크게 교훈을 주는 사례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주저함을 이겨 내셔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가 번번이 반대 이유를 댔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각각을 일소하기에 충분한 약속을 주셨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일에 조금도 실수하지 않으셨음을 수긍했다(출 3,4장).

3) 여호수아 :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는 먼저 약속과 함께 임무를 주셨다. 그런 다음 자신을 보여 주셨다(수 1:1-9; 5:13-15).

4) 기드온 :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그를 “힘센 용사”라고 일컬으셨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보내시면서는 『너는 너의 이 힘으로 가서... 내가 너를 보내지 아니하였느냐?』(판 6:14)라는 말씀을 그의 귓전에 울리셨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을 두 번 보고 나서야 부르심과 책무를 확신했다(판 6:36-40).

5) 엘리사 : 하나님께서는 유복하고 힘이 넘치는 한 젊은이를 갑작스럽게 부르셨다. 한창 바쁘게 살면서 출세라는 장밋빛 유망을 목전에 둔 상태였는데, 그 대신에 주님의 선지자인 엘리야를 섬기며 보잘것없이 무명으로 살라고 말이다. 그 뒤 수년간 소식이 없다가 하나님께서 그의 주인을 하늘로 데려가시자 엘리사가 다시 모습을 보였다. 남모르게 신실하게 섬겼더니 하나님께서 “드러나게 보상해” 주셔서 이스라엘인이면 누구라도 그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왕상 19:19-21, 왕하 3:11).

6) 이사야 : 이 위대한 선지자가 환상을 보면서 부르심과 임무를 받는 장면(사 6:1-13)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2,500년 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왔다. 결국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사야처럼 답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7) 베드로 : 천성이 충동적이고 원기가 왕성한 베드로는 안드레가 구주께로 인도했다(개인 구령의 가치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경이롭게 고기를 잡는 과정 속에서, 즉 그 기적을 경험하는 중에 부르심과 임무를 받았다(눅 5:1-11).

부르시는 환경이 백인백색으로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일하시는 데 있어서 한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목적과 결과는 같다. 곧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부르신 당사자에게 복을 주시며,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함이다. 각자는 그 점을 고유하게 경험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음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4. 전임 사역자로만 섬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생업이 있으면서도 시간을 드려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칠 설교자나 교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미 고귀한 군대에 합류한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자리가 많다. 밭이 넓고 곡식은 무르익었으나 일꾼이 거의 없다. 윌리엄 캐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본업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지만, 그 경비를 치르려고 신발을 만든다!”

1) 이른바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는 신약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성직자(minister)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의미가 “종”이기 때문이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용어는 신약에서 완전히 생소한 개념이다. “성직자”(clergy)는 “클레로스”(cleros)에서 온 말이며, 베드로전서 5:2,3에서는 “맡겨 주신 자들”로 번역되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람 모두를 가리키지 그리스도인 일부를 지칭하지 않는다. 기독교계에 널리 퍼진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전적으로 인간의 발상이며, 마귀의 선동에 의한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거짓이 얼마나 막대한 악을 초래해 왔는지 모른다. 그리스도인 자신이 무슨 은사를 받았는지를 가리고, 그 은사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이들에게 복이 되도록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쳐야 마땅한데도, 그 거짓에 속아 잠자코 있는 것이다. 구원받지 않았기에 성경을 설명할 수 없는데도 그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성직자들 밑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현실이 참으로 두렵다.

2) 주님의 일이 전문직이라는 생각은 악하다.

그런 모습은 아무리 힘주어 저주해도 충분치가 않다. 전담 설교자와 비전담 설교자는 그가 설교 준비와 설교에 시간을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또 경제적 형편이 어떤지에만 차이가 날 뿐이다. 주님의 사역이 전문직이라는, 또 주님의 사람들이 두 계층으로 나뉜다는 오해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기를! 베드로전서 4:10을 이해하면 그와 같이 성경을 졸렬하게 모방한 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전문직이라는 개념을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각 사람이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섬기라.』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종의 임무를 이행할 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직자,” 곧 한 주인의 “종”이며, 주님의 일을 이루는 같은 섬김에 종사한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명확히 가르친다. 현대 기독교계에 보이는, 소수 성직자 계층만 지식과 기능을 갖는다는 이론은 그 어디에도 없다(벧전 2:5-9, 계 1:5,6). 한 그리스도인 젊은이와 나이 지긋한 그리스도인이 다음과 같이 대화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구원받은 지는 얼마나 됐는가?” “3년 됐습니다.” “그럼 지난 3년간 누굴 섬기며 지내 온 거지?” 교훈이 너무도 선명하지 않은가!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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