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들에게 고함 분류
설교, 복음을 전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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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9월호>
그 동안 설교자의 자격을 논했고, 설교자의 부르심을 다뤘으니, 이제는 설교와 설교자의 필요에 대해 성경에서 왜 그토록 강조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일곱 가지 면을 살펴볼 것이다.1. 설교는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다.
1) 하나님의 순서가 개요로 제시되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이 대표적인 구절이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노라.”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파송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와 같으니 “화평의 복음을 전하며 좋은 일들의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느니라』(롬 10:8,9,13-15).
우리는 여기서 일곱 가지 핵심어, 곧 “시인하다,” “구원받다,” “부르다,” “믿다,” “듣다,” “전파하다,” “파송하다”를 들여다볼 것이다. 이 각각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하나로 이어져서 생각이 논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말들이 시간상 역순으로 일어난다는 점, 즉 결과에서 원인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눈에 띈다. 언급한 단계들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1 상대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시인한다. 왜? 2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3 주의 이름을 불러서이다. 어떻게 부르게 됐는가? 4 전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5 진리의 말씀을 들어서이다. 어떻게 듣게 되었는가? 6 설교자가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는 설교하게 되었는가? 7 하나님께서 설교하라고 보내시자 그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이 단락을 반대로 보면서 원인에서 결과로 따라가 보겠다. 1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보내신다. 2 설교자가 말씀을 전한다. 3 누군가가 말씀을 듣는다. 4 그 사람이 들은 내용을 믿는다. 5 그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6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7 구원받은 그가 그리스도를 자기 생의 주님으로 시인한다. 그렇기에 이 방향으로나 저 방향으로나 하나님의 은혜의 순환은 완결이 된다. 설교자가 하나님에 의해 보내지면,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맡기셨다.
『그후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시더라. 아멘』(마 28:18-20).
위의 명령에 나오는 4번의 “모든(항상)”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향해 갖고 계신 계획의 윤곽을 보여 주고자 결합함에 주목하기 바란다.
(1)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도다.』 - 능력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기에 주님의 명령을 완수할 수 있다고 보증한다.
(2)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 들판은 모두가 일해도 될 만큼 충분히 넓다. 웨슬리는 이 구절에서 힘을 얻어 “세계가 내 교구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복음 전파자들에게 아주 넉넉한 일터가 주어진 것이다.
(3)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명령은 복음을 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믿고 구원받은 상대는 침례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도록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알려 줘야 한다.
(4)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말 그대로 모든 날] 함께 있으리라.』 - 이것은 사령관께서 주신 행군 명령이며, 우리가 할 일은 그에 순종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6:15,16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으리라.』 장담컨대 그리스도께서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자기가 속한 영역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혹시 네가 못 가면 기도해라. 아니면 돈으로 내도 괜찮고, 네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도 상관없다.” 주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책무에 그리스도인 모두가 순종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시고자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곧 성령님께서 오시는 상황을 감안하셔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 여기서 복음 전파의 범위를 제일 넓게 알려 주셨다.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3) 하나님의 계획이 수행되었다.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얼마나 잘 이해했으며, 그 명령을 완수하고자 어떻게 온 힘을 쏟았는지는 초기 교회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성직자”라 불리는 특정 계급만 설교하고 가르쳤다거나 사도들만 그렇게 했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사도행전 8:1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가해졌다고 기록하며, 결국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사도행전 11:19-21에 나온다. 『널리 흩어진 사람들이 멀리 페니케와 쿠프로와 안티옥까지 가서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파하더라. 그 사람들 가운데는 쿠프로와 쿠레네 사람 몇 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안티옥에 와서는 그리스인들에게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니 많은 수가 믿고 주께로 돌아서니라.』 그 결과로 안티옥에 성도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 모든 과정에서 사도들이 참여하거나 그들이 허가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지게끔 산산이 부서졌고,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들의 복음 전파에 크게 복을 주셨다. 당시에 사방으로 퍼져 나간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설교 인증서 또는 안수를 받았다는 내용은 성경에 없다. 사도행전 11:19에서 “말씀을 전파”했다는 표현은 격식을 갖춰 강론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복음을 말했다”는 뜻이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저 “기쁜 소식을 말한” 것이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을 주님께 이겨왔다. 이 시대에는 이런 종류의 설교자와 설교가 더욱 필요하다! 신학 박사들이 아니라, 그와 같은 설교자와 설교가 넘쳐야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읽어 가노라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꾸밈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모습으로 특징지어지는 초기 제자들의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들의 사역에는 단순함과 신선함, 용기와 힘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했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임재와 능력을 넘치도록 증명했다. 우리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일찍 전해졌음을 본다. 사도행전 10장에서부터는 “땅 끝”으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 전파 속도가 방해 없이 지속됐더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전진이 수렁에 빠지고 말았으니, 믿을 만한 교회사 책을 읽으면 그 내막을 알 수 있다.
4) 하나님께서 쓰신 용어를 자세히 보자.
신약성경이 기록된 원어로 “설교”의 용례를 살펴보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제시한다는 의미가 얼마나 다양한지 알게 된다. <킹제임스성경>에서 “설교하다”로 번역된 다음의 네 단어가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1) 케뤼쏘(khru;ssw) : “전령으로서 선포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11:1, 마가복음 1:4; 3:14; 16:20, 로마서 10:15 등 공개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문맥에서 쓰인다.
(2) 유앙겔리조(eu]aggeli;zw) : “기쁜 소식을 말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복음,” “복음 전파자,” “복음을 전하다”가 나왔다(마 11:5, 눅 4:18; 7:22, 고전 1:17, 갈 1:8, 히 4:2 등).
(3) 카탕겔로(katagge;llw) : “충분히 말하다”라는 뜻이다(행 4:2; 13:38, 골 1:28).
(4) 랄레오(lale;w) : “말하다”라는 뜻이다(막 2:2, 행 11:19; 14:25 등).
신약성경에 “설교”가 112회 나오지만, “격식을 갖춘 강론”의 뜻으로는 6회만 쓰였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용례로 보자면 “설교”란 전령으로서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분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 기쁜 소식을 말하는 것, 조금도 감추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행 20:27)을 전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속속들이 말하는 것, 인류에게 선물로 주신 아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에게나 보장하신 구원을 대로에서나 집에서나 만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을 읽다 보면, 주님을 알았던 성도들이 자신들을 위해 죽으신 구세주의 사랑과, 부활하신 구세주의 능력과, 다시 오실 구세주의 영광이 담긴 복된 소식을 퍼뜨리고자 그것을 개인적으로 간증하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기를 애썼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다. 다음의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적용하기 적합하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눅 10:37)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