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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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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04월호>
사회복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시도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설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인간들이 어렴풋이 가지는 나름대로의 신념일 뿐이다. 권선징악은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견해이나 자신의 의지를 자주 죄에게 내어줌으로 인해 그 양심이 더럽혀진 사람은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가책을 느끼지도 못하며 거기서 더 더럽혀지면 그 양심이 마비되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말씀하신다(딤전 4:2). 이런 양심의 소유자는 거짓말을 참말같이 하는 자들이다. 특히 자기가 가르치고 실행하는 것이 비성경적인 교리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을 모으고 교단 교세를 확장할 의도로 그런 누룩을 확산시키는 것이 바로 이런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거짓 교리라고(마 16:11, 12)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양심이 마비된 자들은 누룩을 복음이라고 잘못 가르쳐 누룩의 확산, 즉 거짓 교리의 확산을 복음이 확산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사회복음이란 지상에 사는 동안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인정해 줄 것이라는 철학적 사상일 뿐이다. 우리 나라에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은 1887년경부터였다. 배제학당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와렌(H.W. Warren) 선교사가 세웠고, 이화학당은 1889년 스크랜톤(Inary F. Scranton) 양에 의해 세워졌으며 그 이름은 고종의 왕비가 지어 주었다.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는 알렌이라는 의사였다(1887년). 의학박사였던 홀튼(Lillias. S. Horton) 양은 1888년 국립병원을 세웠고 왕비의 시의이기도 했으며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인 언더우드(Underwood)와 후에 혼인하였다.
그들 선교사들은 우리 나라의 개화기에 이 땅에 와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고아원을 세웠다. 그들은 세상에서 선을 행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하늘 나라에 이를 수 있다는 비성경적인 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다. 우리는 세계 도처의 난민들을 돕는 CARE, 월드비전, 유엔식량기구, 국제적십자사의 활동들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이 행한 일들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테레사 수녀의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헌신적 간호, 구세군의 자선냄비, 전쟁 난민들에게 죽을 쑤어 먹이는 일들은 인도적인 견지에서 하나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UN과 각종 정부들과 그들과의 우방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은 당연히 그런 일들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UN이나 세상 정부들은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제도는 마귀가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영생을 얻게 하고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르완다, 콩고,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에게 죽을 쒀 먹여야 한다면 언제까지 그 일을 해야 하며 그들의 에이즈와 다른 질병들을 돌보는 데 어디까지 치료해 주어야만 하늘이 알아 주겠는가? 그들의 의식주는 어떻게 하며 교육은 어떻게 하며 아픔과 슬픔은 어떻게 치유하며 그들의 정착은 어떻게 하겠는가? 조금 돕다가 돌아서게 되면 그 불쌍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UN과 국가와 사회의 몫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성별된 사람들로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먼저 선을 행하도록 권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죄에 찌든 인간의 양심은 사회 교육이나 사회법이나 경찰권으로 변화될 수 없다. 감옥을 보라. 그런 것들로 변화받지 못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마귀의 유혹과 미혹에 실패함으로 인해 보편적인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도움을 주는 선한 행위인 사회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일차적으로 죄인들에게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 않는가? 사람들로 선을 행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기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구태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셔야 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인간의 의도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법이다. 사람이 아무리 깨끗한 체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왔고 그 죄에 의해서 사망이 온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이다(롬 5:12).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롬 3:10, 시 14:1,3)와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땅 위에 한 명도 없』(전 7:20)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선언이다. 이것은 감옥에 있는 사형수에서부터 왕실의 왕에게까지 해당되며, 수도원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탁발승에서부터 은사주의 사기꾼 목사들뿐만 아니라 지금도 불쌍한 이웃에게 선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테레사 형 자선가들도 다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행 4:12).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과 방법을 계시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모아 놓고 사회 봉사나 불우한 이웃돕기 운동이나 기아와 가난에 고생하는 불쌍한 난민들에게 도움의 손길만 뻗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선적이 아닌 부차적 수단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전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닌 것이다.
앞서 말한 개화기에 외국 선교사들이 와서 사회 사업을 하면서 형식적으로 복음을 이용함으로 인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던 사실을 아는가? <한국개신교사>(백낙준 저, 1973.11. 17, 연세대 출판부, 311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회의 급속한 발흥에는 물론 종교적인 원인이 있었다. 입교 자격의 하나는 적어도 새 신자 한 명을 교회에 인도한다는 규칙이다. 빈톤(C.C. Vinton) 박사는 말하기를 ‘이 전도 정신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들은 세례받을 자격을 인정받기 어렵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침례를 준 것이 아니라(벧전 3:21) 교회로 사람을 인도한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 구원받은 성도로 간주했던 것이다. - 필자 주] 남녀를 막론하고 일단 기독교인이 되면[교인이지 구원받은 성도가 아님 - 필자 주] 입교 사실이 공포되고 나아가서는 각자가 교리를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실행하는 모든 선행과[구령할 줄 모르기 때문에 선행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 필자 주] 다른 사람을 기독교인이 되도록 전도하는 노력에 의하여 교인 된 사실이 증명되어야 했다. [사람을 교회로 데려와야 교인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 필자 주] 이리하여 정규 교인으로 교인명부에 이름이 오르기 위해서는 입교지원자가 우선적으로 자기 신앙을 남들에게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개 사람이 종교적 도덕적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경우에는 자연히 그 체험을 남들에게 알려 주기 원하게 된다. 이 정신은 기독교의 특수 성격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세계성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독교 사랑의 이상이 애타정신의 충격으로 타인 특히 불행한 사람들에게 더욱더 나타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 짧은 설명으로 이 나라의 기독교의 실상을 한눈에 알 수 있지 않는가!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들과 이렇게 실행하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사회복음으로 하늘 나라에 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법을 스스로 위반하지 않는 분이시다. 죄인 된 인간을 구속하는 방법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독생자의 죽음이 아니고도 인간들의 선행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그 일을 실행하셔야 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인간적인 견지에서는 한없이 매정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제시하셨던 것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완성해 놓으신 구속 사역을 믿지 않고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는 발상은 마귀적인 것이다. 여기서 마귀적이라는 말은 그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고 지상에서 아무리 교회 생활을 잘했다 해도 그는 지옥으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기 생각으로 선과 악, 천국과 지옥을 가늠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어디 있는가? 분명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는 옳은 길 같이 보일 수도 있다. 악보다는 선을 행하는 것이, 절간에 가서 우상에게 절하는 것보다는 십자가 있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주일날 하루만 교회에 다니는 것보다는 이른 새벽에 교회에 나가는 것이, 어려운 이웃을 못본 체하기보다는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 지하철 역 입구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에게 전철표 값을 줘 버리고 집에까지 걸어가는 것이 옳게 보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의 의를 대신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선행으로는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선언하고 있다(잠 14:12; 16:25).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알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발상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인간이 내세운 의를 더러운 걸레 같다고 하셨음을 알아야 한다(사 64:6). 성경에서 하나님의 길을 평강의 길(롬 3:17), 진리의 길(벧후 2:2), 의의 길(벧후 2:21), 주의 길과 하나님의 길(행 18:21, 25)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어떤 길이 옳은 길인가를 찾으려면 성경으로 와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다 그 길을 계시해 놓으셨다. 따라서 성경을 이 문제 해결의 최종권위로 믿지 않고 자기 생각에 신뢰를 두게 될 경우 그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하나님께서는 누가 더 착하고 누가 덜 착하고 누가 더 큰 죄를 지었고 누가 덜 죄를 지었는지에 관해서 평가를 내리시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을 통하여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고(롬 3:23,24)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것과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을 때 구원받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하셨던 마지막 말은 『다 이루었다.』(요 19:30)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그들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 1:12,13). 하나님의 구원은 혈통이나 가문이나 선행이나 인류를 위한 더 큰 공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모세에게 준 옛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일시적으로 한정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하게 유효한 것이다(히 9:11-15).
이 점을 성경은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에서 난 사람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또 아브라함의 씨라 하여 다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오직 이삭에게서 난 자만이 너의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이는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씨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라』(롬 9:6-8).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희생시켜 마련해 놓으신 구속 사역을 외면하고 오늘도 자기 의로 하늘 나라에 가려고 애쓰고 있다. 이들은 이 세상을 변화시켜 보겠다고 복음 대신 선행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소위 교회라는 곳이 세상의 일부분이 되어 갖가지 세상일들에 참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더 좋은 신앙인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새벽에 기도회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를 과시하여 남보다 더 나은 신앙인으로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인 줄 알고 바친 헌금이 복음 전파와 진리의 지식이 가르쳐지는 곳에 쓰여지지 않고 선교라는 미명하에 쓰여지지 않아야 할 헛된 일들에 쓰여지기도 한다. 또 어떤 자들은 구약의 율법의 일부를 지키면서 다른 교회들과 차별화를 두려고 하기도 한다. 이런 자들에게 성경은 분명히 밝혀 주고 계신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되는 줄 알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워지고자 함이라. 이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이라』(갈 2:16).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나니, 만일 의가 율법으로 인하여 온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갈 2:21).
노아의 홍수 이후에 시날 땅에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오르려 했던 인간들의 시도가 있었다(창 11:1-4).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도전 행위로 인해 인간은 언어가 혼잡케 되는 벌을 받았다. 오늘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대신 자신의 의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진리의 혼란 가운데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교단 교리들이다. 사회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복음을 가르치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세상 교회인 것을 알아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