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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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7월호>

• 욥기 31:33-34
<한글킹제임스성경>
『만일 내가 내 죄악을 나의 품에 숨김으로써, 아담처럼 내 허물을 덮었다면, 내가 큰 무리를 두려워하였거나, 가족들의 멸시가 나를 무섭게 하여, 내가 조용히 하고 문에서 나가지 아니하였던가?』

<개역한글판성경>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여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개역성경이 이렇게 번역한 데는 이유가 있다.
1. 개역성경은 33절과 34절을 정연하게 번역하지 못하고 두 구절을 뒤섞어 두루뭉실하게 얼버무렸다.
2. 그 이유는 33절에 나오는 아담 때문에 33절을 삭제시킨 데 있다. 아담을 드러내지 않고 문장을 만들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얼버무려야 하는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3. 실제로 개역성경으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다시 한 번 개역성경을 읽어 보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33절에서 갑자기 아담이 등장하자 혼비백산한 것은 비단 개역성경 번역자들뿐만은 아니다. 많은 주석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의도는 욥기가 기록된 연도를 될 수 있는 한 아담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다. 욥이 하필 아담을 언급함으로써, 즉 아담이 자기 죄악을 그의 가슴에 숨겼다고 욥이 말함으로써 그 부분을 설명하기가 매우 난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70인역 역시 아담을 삭제시켰다. 아담 대신 “보통 사람”(common man)으로 바꿨다. 이는 개역성경이 “타인”으로 바꾼 것과 같은 것이다. <미국표준역본, ASV>은 “사람의 방식을 따라”(after the manner of men)로 고쳤고, <리빙 바이블, Living Bible>은 “품”(bosom)을 삭제시켰으며, <새영어역본, NEB>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as men do)을 첨가시켰다.
성경주석가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욥기의 기록 시점을 출애굽기 뒤로 본다. 그런 관계로 그는 욥이 아담에 관한 창세기의 기록을 모세가 쓴 글에서 읽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게 되면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야기되는데 그것은 만일 욥이 모세가 설명한 것을 알았더라면 굳이 아담을 들먹거릴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점이다. 모세오경 이후의 여호수아, 재판관기, 사무엘상·하에서도 아담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들이 모세의 기록을 모르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에 대한 답은 아담의 범죄가 재판관기와 사무엘의 때보다 욥의 때에 더 가까웠고 적어도 600년 이상 더 가까웠다는 결론에 이른다(피터 럭크만의 욥기 주석 참조).

아담은 그의 죄악을 숨겼다. 무화과 잎으로 자기의 벌거벗음을 가렸다. 또 그는 자신의 죄를 숨겼는데 마음으로만 숨긴 것이 아니라 나무 뒤에 숨었다(창 3:8, 잠 6:18). 자기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이브도 함께 숨었다. 아담은 자신이 숨으면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숨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죄들을 자백하고 버렸다(잠 28:13).
또 아담은 자기가 범죄한 구실을 자기의 아내에게 돌리고 그 아내를 자기에게 준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아담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를 먹은 동기에 대해 거짓말하였으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말았다. 아담은 자신의 그런 허물들을 덮으려고 애썼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담의 허물을 덮어 주시기 위하여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게 하셨다. 모든 감춰진 죄악이 결국 품속에 감춰지게 된 것이다.
욥은 큰 무리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못된다. 그들은 지혜도 없고 지식도 없어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적 교리를 반박할 만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이란 교계니, 교단이니, 그런 말들뿐이다.
욥은 가족들의 멸시 따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에서 하나님께 불경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떳떳할 수밖에 없다. 욥은 자기가 처한 고난에서도 할 수 있는 한 철저히 자기 방어(변명)를 했다. 그것은 단지 인생의 한계에 도달한 한 인간의 절규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자기의 주장을 편 것이었다. 『나의 바람은 전능하신 분께서 내게 응답하시는 것이요』(35절).
<개역한글판성경>을 읽어 보라. 그 내용으로는 시작도 없고, 가닥도 없고, 끝도 없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엉터리 성경으로 강해설교를 한다는 자들이 있다. 개역성경으로 위 구절들을 설교한다고 하자. 무슨 거짓말을 할 것인지 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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