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교리들 분류
‘순교자’와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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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2월호>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 더욱더 무관심해져가는 풍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중요한 것은 오늘이고, 어제의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이 시대의 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일과 새로운 것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물질주의와 안락한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현재의 인류로 발전하고 진화했다는 신념을 갖게 했다. 이와 같은 환상은 오늘날 가정의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TV를 통해 주입되고 강화되었으며, TV는 인간 자신이 지구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게 해왔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진보는 학문과 기술뿐 아니라 ‘종교’ 안에서도 있어왔다. 교회는 “주께서는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라고 하는 새로운 모토를 내세웠는데, 그러한 생각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었다. 부흥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을 과거로부터, 모든 불행과 반목과 피흘림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구태의연한 교리 논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그 같은 분열을 야기한 것들은 오늘날 이슈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생각해 볼 필요도, 언급할 필요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칠 필요도 없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분열을 초래하는 것이고 사랑이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대중의 눈에 갈수록 더 부정적으로 비쳐지는 영국 내의 개신교 유산(遺産)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다. 1988년에 있었던, 기독교 역사 10세기 및 영어 성경 역사의 희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을 TV나 신문들은 거의 비중없이 다루었다. 비록 여왕이 1988년 성탄 메시지를 시작하면서 1588년과 1688년의 역사적 중요성과 그러한 역사적인 해들을 기념함이 없었다면 영국의 역사가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유산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교묘하게 공략당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믿음을 부인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 속에서 죽어갔던 사람들이 우리 신앙의 순교자들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1987년 11월에 영국의 영향력 있는 신문, TV, 라디오가 “영국의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전통”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을 때에는 그러한 부분에 대한 별다른 강조가 없었다.
대중매체나 교육을 통해 크랜머나 라티머, 리들리 등의 영웅적 순교에 대해 들은 많은 이들은 이제 사람들이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저항했던 85명의 로마 카톨릭 영웅들”을 언급하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교황은 버밍햄의 성공회 감독 마크 샌터(Mark Santer)와 함께한 자리에서 이들을 복자(the blessed)로 선언했다. 웨스트민스터의 카톨릭 대주교 흄(Hume) 추기경은 그가 전한 특별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며, 우리의 유산에서 중요한 한 부분으로 정당하게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로마의 정책가들은 2차대전 이후에, 개혁 신앙을 수호하다 죽어간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예배에 단 한 명의 성공회 감독만이 참석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일한 예외는 로체스터의 감독 채바스(Dr. Chavasse)였다. 그는 1955년에 옥스포드에서 있었던 라티머와 리들리의 순교 400주년 기념 예배에 참석했다.
개신교 국가에서는 앞서 언급한 시복(諡福-복자로 선언하는 것)과 시성(諡聖-성인으로 선언하는 것)을 추진하기 위해 대단히 조심해야 했으나 이제는 그런 것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시성의 과정 중에 있는 인물들의 수는 지난 몇 년 동안 놀랍도록 증가했으며 그 중 상당수는 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예를 들어 1982년 한 해 동안만 해도 1950년대 10년 동안 거론된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성 문제가 거론되었다(피터 히블드웨이트 : <1987년의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2년의 재임 기간 동안 20세기의 모든 교황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성인으로 선언했다. 그는 시성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기 위해 계획 중인데, 여기에는 뉴먼이나 매닝 등과 같은 영국의 추기경들과 교황 피오 12세, 요한 23세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순교자들인가 반역자들인가?
그리스도인들이 프로테스탄트 순교자들과 카톨릭 순교자들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역사가 제공하는 관점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오늘날의 선교 현장에서, 기독교 역사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 이름도 없이, 기리는 사람도 없이 순교당하고 있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방송매체는 엘 살바도르에서 ‘순교한’ 여섯 명의 예수회 신부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정치적 이유로 붙잡혀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1987년에 거행된 85명의 ‘영국의 순교자들’의 시복식이 집중적으로 보도되었을 때, 런던에 본거지를 둔 ‘연합 개신교 협의회’(United Protestant Council)는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한 인쇄물을 배포했는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그들의 인쇄물은 전국의 모든 신문사에 전달되었으나 어떤 신문에도 게재되지 않았음을 아울러 밝혀 둔다.
“역사적 진실을 수호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교황이 ‘시복’한 85명의 영국 신하들이 ‘순교자들’이라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순교자’라는 단어는 그들이 오직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어갔음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메리 여왕 1세의 통치 초기 5년 동안 죽임당한 288명의 순교자들은 오직 그들의 믿음 때문에 죽임당했다. 그들은 순전히 종교적 이유로 정죄당했는데, 그 주된 죄목은 ‘화체설’, 즉 미사 때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를 거부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메리가 영국의 합법한 여왕임을 부인한 적도 없고 국내외에서 여왕의 적들을 지원한 적도 없으며 어떤 반란이나 내전을 꾀한 적도 없었다. 그들은 비밀 장소에서 폭동을 꾸민 적도,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적도 없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동안이나 그 이후에 사형당한 로마 카톨릭 신자들 및 교황이 로마에서 최근에 시복자로 선언한 사람들에게 부가된 반역죄는 법적으로 합당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통치 원년부터 11년 동안 종교적인 이유로 처형당한 카톨릭 신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교황 피오 5세가 모든 카톨릭 신자들을 선동해 반역을 꾀하도록 만들고 여왕에게 복종하는 사람은 파문당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 전까지는 그랬다. 카톨릭 신자들은 순전히 신앙 때문에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시복’한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던 ‘신학원 사제들’을 도와준 반역죄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다. ‘영국의 순교자들’ 85명 중에서 63명이 이들 ‘신학원 사제들’이었으며, 이들은 영국의 왕권을 무너뜨리려는 교황의 음모를 수행하기 위해 외국에서 훈련받고 국내로 다시 들어온 자들이다. 교황 그레고리 7세가 1580년의 엘리자베스 여왕 시해 사건과 1588년 스페인의 영국 침략을 계획한 일을 인가한 후에 이들의 지위가 높여진 것이다.
이같은 배경을 알고 난 뒤라면 이들을 ‘순교자’라 부른는 데 동의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로마 교회가 하고 있는 것은 반역자들과 스파이들, 음모자들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기록된 역사
70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영국과 웨일즈의 40인의 순교자들”을 시성한 일에 대해 동일한 반대가 있었다. 당시에 “성인들”이 된 사람들 중에는 1605년의 “폭파 음모” 사건에 공모했던 토마스 가넷(Thomas Garnet)과 나콜라스 오웬(Nicholas Owen)도 포함되었다.
개신교가 더 이상 믿음을 지키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영국의 역사는 급속도로 다시 기록되어가고 있다. 토마스 헨리 가넷을 “40인의 순교자”의 한 사람으로 시성한 것은 진실이 어느 정도까지 왜곡될 수 있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폭파 음모”는 왕과 의회를 화약으로 날려 버리고 군주정체를 전복시키기 위한 무장 봉기를 일으키려는 예수회의 음모였다. 당시 영국 예수회의 우두머리였던 가넷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이 극악무도한 음모에 가담한 죄로 교수형을 당했다. 그가 친필로 직접 쓴 그의 고백문은 공공 문서 보관소에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다.(SP 14/20, 4th April, 1605: Public Record Office)
“예수회 회원이자 사제인 나 헨리 가넷은 근자에 화약 사건에 가담함으로써 비합법적이고도 흉악한 죄를 지었음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한다. 상해당한 자들에 대한 책임과 국왕 폐하와 왕자 전하, 그밖에 그 사건으로 살해당할 뻔한 이들과, 또 그 곳에 있을 수도 있었던 다른 많은 무죄한 사람들에 대해...나는 나 자신이 극악한 죄를 저질렀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며, 국왕 폐하와 폐하의 자산에 대해 죄를 지었음을 시인하고, 겸허하게 모든 이에게 용서를 구한다. 모든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나의 교훈을 절대로 믿지 말고, 기도와 다른 모든 방법으로 나라의 평화를 강구할 것을 청하는 바이며, 국왕 폐하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바라옵기는 그들이 여느 때와 같은 평안 속에 살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범죄의 짐을 지지 않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그에 대한 증거로 나는 나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 진술서를 작성하였음. 1605년 4월 4일.”
로마 카톨릭의 “성인이요 순교자”인 헨리 가넷의 초상화는 오랜 기간 동안 로마의 예수회 대학 홀에 최근까지 걸려 있었다.
“40인의 순교자들” 중에서 최근에 시성된 에드문드 챔피온(Edmund Champion)은 1580년에 여왕을 폐위시키고 시해함과 아울러 전쟁과 살인과 폭동을 일으키고 종교와 정부를 교체시키며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가 인정되었다. 그는 위의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으나, 교황 바오로 6세는 1970년에 그를 성인의 품위에 올린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또다른 시성은 1935년에 있었던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시성이었다. 그는 그를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묘사한 체스터튼(G.K. Chesterton)을 비롯해 힐레어 벨록(Hillaire Belloc)이나 이블린 워프(Evelyn Waugh) 등과 같은 영향력있는 카톨릭 저술가들을 통해 대중의 마음 속에 영웅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로버트 볼트(Robert Bolt)가 만든 모어의 전기 영화 ‘A Man For All Seasons’를 통해 그는 그의 당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된 역사가 아니라 허구에 불과하다. 역사 저술가 재스퍼 리들리(Jasper Ridley)는 1982년에 발간된 그의 유명한 저서 <정치가와 광신자>(The Statesman and the Fanatic)에서 모어가 광신자였던 사실을 폭로하면서 “오늘날 사람들은 그가 지녔던 덕목들로 인해 그를 칭송하지만, 사실상 그는 그러한 덕목들의 정 반대를 지지했다...모어는 그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자유와 개인의 양심, 종교적 관용에 대해 반대했다.”고 밝혔다.
최초의 에큐메니칼 성인
- 뉴먼(J.H. Newman)
1989년 6월에 교황은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을 시성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영국 성공회와 카톨릭이 그를 영국의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해 공동으로 추진하던 이 캠페인은 뉴먼의 죽음 100주년을 맞아 여세를 몰아가고 있었다. 클리포드 롱리(Clifford Longley)는 <타임> 紙에 “제 2차 바티칸 공회의 의제는 뉴먼의 무덤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고 전했는데,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교황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바이며, 그들은 뉴먼을 “뉴먼 공회”라고도 불리는 제 2차 바티칸 공회가 있도록 한 장본인으로 여긴다. 뉴먼을 시성하는 안은 바티칸 내에서 최고의 사안이었다고 그의 시성 청원자였던 예수회 신부 빈센트 블렐(Vincent Blehl)은 전했다. 뉴먼에게는 이미 ‘가경자’(可敬者)라는 칭호가 주어졌는데, 이는 시성을 위해 거치는 세 단계 중 첫 번째 것이다. 복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를 통해 물리적인 기적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요구된다. 뉴먼에게는 그러한 기적이 일어난 적이 없었으나, 교황은 “그의 탁월한 영적 영향력으로 일어난 도덕적 기적”을 들어 뉴먼을 예외로 삼을 것으로 기대된다.
존 헨리 뉴먼의 명성은 교회 연합의 분위기 속에서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으며, 그가 최초의 ‘종교 통합적’ 성인(이는 그가 카톨릭이 아닌데도 성인으로 추대되고 있기 때문이다)이 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1990년에 그의 죽음 100주년 기념식이 있었으며 교회는 그의 생애를 칭송하고 대중매체는 이를 비중있게 보도했다. 이에 비하면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500주년 기념 행사는 국내에 별로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뉴먼은 특히 ‘트렌트 공회’와 영국 성공회의 ‘39개 조항’을 융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한편 39개 조항을 작성한 크랜머는 그의 전 생애를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영국 성공회의 성경적인 교리와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데 바쳤던 인물이다. 영국 성공회의 ‘교회 협의회’의 회장인 데이빗 사뮤얼(David Samuel)은 당시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전자(뉴먼)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과 정반대로 후자(크랜머)를 기억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뉴먼이 주장했던 “교리의 재정립”(reformulation of doctrine)을 특히 칭송한 인물은 전 켄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런시(Robert Runcie)인데, 뉴먼은 교리를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계속적인 계시(continuing revelation)를 받는 것이라 믿었다. 이 같은 견해는 오늘날 은사주의와 자유주의 계열 대부분이 갖는 견해이다. 뉴먼은 그 ‘기적’을 가져오는 도구였으며, 이것은 그가 19세기 교회사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았음을 뜻한다.
시대는 분명히 변했다. 19세기 정치인이자 고(高)교회 회원이었던 윌리엄 글래드스톤(William Gladstone)은 뉴먼이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이야말로 종교개혁 이후 가장 커다란 종교적 위기로 이해했다. 그 위기는 현재는 더욱더 눈에 보이지 않게 은밀히 진행되지만 “교리의 재정립”이 확산되고 에큐메니칼 운동이 고조되어 감에 따라 실상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뉴먼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한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그 연구가 그들에게는 그들을 인도해 줄 “사랑어린 빛” 없이 “절망 속에 둘러싸여 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뉴먼이 지은 유명한 찬송가인 “사랑어린 빛으로 인도하소서”를 조롱하려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고 복잡하며 모순으로 싸여있던 한 인물을 연구하며 느낀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뉴먼의 오랜 친구인 젤프(Jelf) 박사는 뉴먼의 사상은 항상 본질적으로는 예수회의 그것과 같았다고 말했다. 또 그와 가까웠던 카톨릭 주교 액튼(Acton)은 그를 “진리의 조종자(manipulator)”로 묘사했다. 뉴먼은 비밀리에 결성되어 활동했던 옥스포드 운동 협회의 우두머리로서 소위 “교육과 논쟁의 ‘경제성’”을 주장했는데, 이는 진리를 자기쪽에 유리하게 말하거나 진리를 내세우기를 보류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 대해서 뉴먼을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부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환자의 유익을 생각하는 의사로서 그는 거짓을 말한다... 그는 오직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만 그렇게 할 뿐이다. 그는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