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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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의 얼굴을 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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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4년 12월호>

시편 17편은 "다윗의 기도"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는 것들과 달리, 본 시편은 그것이 "기도"라는 것을 강조한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시"보다는, 마음으로 직접 다가가는 "기도"가 더 절박하고 간절하며, 화자와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느끼게 한다. "다윗의 기도"인 시편 17편은 1) 다윗이 주님께 변호해 주실 것을 간구함(1,2절) 2) 하나님께 시험을 받았으나 무죄가 증명됨(3-5절) 3) 기도응답과 자애와 보호를 간구함(6-9절) 4) 기름진 사자와 같은 악인(10-12절) 5) 사람들로부터 구해 주실 것을 간구함(13,14절) 6) 영원을 향한 결연한 의지(15절)로 구성되어 있다.

『오 주여, 의로운 자에게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를 기울이시고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이는 거짓된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이다』(1절). 다윗은 기도의 시작부터 자신을 "의로운 자"로 제시한다. 자신의 기도는 거짓된 입술이 아닌 참된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이므로, 자신의 부르짖음에 주의를 기울이시어 응답해 주실 것을 주님께 기도한다.

『오 주여, 의로운 자에게 들으소서.』 기도를 시작하는 이 말은 기도에 관한 기본자세를 보여 준다. 주님은 의로운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거룩하신 주님께 기도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자신을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해야 한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그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사 59:1,2). 기도하기 전, 자신과 주님 사이를 가로막는 죄가 있는지 살펴보라. 우리는 우리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지만(히 4:16), 거기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마음을 닫게 하는 죄를 없애야 한다.

『나의 변호가 주의 임재로부터 나오게 하시고 주의 눈은 공평한 것들을 보소서』(2절). 다윗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변호하기를 원치 않았다. 주님께서 해주시기를 원했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할 수 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이 지닌 죄성의 속성이다(창 3:12,13). 그러나 다윗은 그리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판단하시고 주님께서 변호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

다윗은 주님 앞에서 자아를 부인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 인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이미 판단하고 자신하고 있었지만(1절), 그것은 자신을 직접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여 승리하기 위해 구축해 놓은 다윗 자신의 의였다. 그는 악한 현 세상을 살아가는 "영적 처세술"을 터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이 옳다고 판결하시고 그를 위해 변호하실 수 있는 조건을 다윗 스스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주의 눈은 공평한 것들을 보소서.』라고 했을 때, 그것은 모든 판단에 있어서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다윗과 악인 사이에서 분명 『의로운 자』인 다윗의 손을 들어주실 것을 확신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다윗은 이 점에 있어서 무척 자신만만했다.

성도가 의지하고 바라는 하나님은 모든 판단에 치우침이 없는 공평하신 분이시다. 이 악한 현 세상은 불의가 판을 치고 악인이 득세하며 재판에서조차 왜곡된 것을 말하지만, 이 모든 부조리 속에서도 희망을 붙들 수 있는 것은 『의로운 자』를 지켜 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고 하였느니라』(롬 12:19). 의를 행하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도록 하라. 『사람의 행위가 주를 기쁘시게 하면 주께서 그 사람의 원수들까지도 그와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셨고 주께서 밤에 나를 찾아 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리니 나는 내 입이 범죄하지 아니할 것을 작정하였나이다』(3절). 다윗은 『전쟁의 사람』(삼하 17:8)으로서 전쟁에서도 담대했지만, 마음이 몹시도 정결하여 죄에 대한 시험과 감찰에 있어서도 담대했다. 다윗은 이보다 더 담대한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생각들을 아소서. 내게 무슨 악한 길이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여기서는 아예 하나님께 마음을 살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죄를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분께 드리는 매우 "두려운" 기도이다. 죄가 발견되어 "재판관"께 판단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려는가?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판단했을 때 정죄받을 부분이 전혀 없었기에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성도가 하나님께 필요를 간구할 수 있는 담대함을 얻는 때는(1절), 이처럼 그의 마음이 그를 정죄하지 않을 때이다. 『이는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더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의 목전에 기쁨이 되는 일들을 행함이라』(요일 3:20-22). 우리가 받은 구원은 공짜이지만, 기도응답은 주님 앞에서 얼마나 바르게 행했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그분의 목전에 기쁨이 되는 일을 행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할 때 주님께 필요를 놓고 담대하게 간구하면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의 언행에 관해서는 내가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멸망시키는 자의 길에서 나를 지켰나이다』(4절). 이 구절은 다윗이 3절과 같은 담대함을 지닐 수 있었던 "비결"을 보여 준다. 그것은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지키는 것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입이 범죄하지 아니할 것을 스스로 작정하였고(3절), 그 작정을 『주의 입술의 말씀』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것으로 실행에 옮겼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말(word)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입술의 말"이고, 또 하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이다. 그중 멸망시키는 자의 길에서 지켜 주는 것은 『주의 입술의 말씀』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 앞에 온 자는 다 도둑들이요 강도들이라.』(요 10:8)고 하셨는데, 초림 때의 주님보다 먼저 온 자들은 헬라의 철학자들이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토, 아리스토텔레스, 프로타고라스 등이 이에 속한다. 그들은 "인간의 입술의 말"로 혼들을 도둑질하고 강도질하여 멸망으로 이끌었다. 그들뿐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배격하는 모든 철학자들과 성경 변개자들, 배교한 기독교 학자들, 교육가들, 종교 지도자들이 이에 속한다. 주님은 주님 앞에 온 도둑들과 강도들에 대해 『양들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고 하셨는데, 『선한 목자』(요 10:11)를 따르는 양들은 도둑들의 입술의 말을 듣지 않고 『주의 입술의 말씀』을 듣는다. 『도둑은 오직 도둑질하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오지만』(요 10:10), 『주의 입술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는 그 멸망시키는 자들의 길에서 자신을 지켜 낼 수 있게 된다.

『내 발걸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나의 걸음을 주의 길들 안에 세우소서』(5절). 이 말씀은 시편 119:133과 짝을 이룬다. 『나의 걸음들을 주의 말씀에 고정시키시어 어떤 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성도의 발걸음이 멸망시키는 자의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는 길은, 『주의 입술의 말씀』에 자신의 걸음들을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이다.

『오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이는 주께서 내게 들으실 것임이니이다.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시어 내 말을 들으소서. 주를 의뢰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일어선 자들로부터 주의 오른손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는 오 주여, 주의 놀라운 자애를 나타내소서』(6,7절). 1-5절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강조한 다윗은 본문 6,7절에서 매우 간절하고 절박한 심경을 토로한다. 그가 구원을 위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주의 오른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로 여러 차례 언급되신다(사 41:10; 51:9; 53:1; 62:8, 시 20:6; 48:10; 60:5). 이 구절들은 환란 때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재림을 다루고 있다. 『주의 오른손』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뜻하며, 이것이 본문 6,7절의 전후 문맥을 설명해 준다. 즉 "재림"인 것이다. 따라서 본문 1-5절은 자신들의 흠 없는 의를 주장하는 유대인 환란성도들을 보여 주고, 6,7절의 『주의 오른손』은 재림을 살짝 비춰 주며, 이후 8절부터는 대환란(8-12절)과 재림(13,14절)과 영원(15절)에 관한 내용들이 전개된다.

8절에서는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라고 기도하는데, 주님은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을 그분의 눈동자처럼 지키셨듯이(신 32:10), 재림 때에도 그들을 그분의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이는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함이라. 그 영광 후에 그가 너희를 약탈한 민족들에게 나를 보내셨나니, 이는 너희를 손대는 자가 그의 눈동자를 손대는 것이기 때문이라』(슼 2:8). 눈은 신체 중 가장 약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간에게는 눈이 위협을 당할 때 자동반사적으로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눈에서도 가장 중요한 눈동자로 표현하신다. 이는 그들에 대한 주님의 보호가 어떠할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으로, 주님은 주님의 "눈동자"가 상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의 날개 그늘』(8절) 역시 주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여 준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며 너에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야,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함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날개"는 신명기 32:10의 "눈동자"에 이어서 또다시 출애굽과 연결된다. 『마치 독수리 한 마리가 제 보금자리를 휘젓고 자기 새끼들 위에 날개를 퍼덕이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자기 날개 위에 새끼들을 업는 것같이 주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으니』(신 32:11,12). 이것은 예언적으로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피해 광야로 피신하는 이스라엘이 받을 『큰 독수리의 두 날개』와 연결된다(계 12:14). 대환란 때의 이스라엘(특히 유대인 환란성도)은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처럼』(호 2:15) 『자기 먹이를 탐하는 사자』와 『은밀한 곳에 숨어 기다리는 젊은 사자』(시 17:12)인 『악인』(13절), 즉 적그리스도로부터 주님의 눈동자처럼, 그분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보호받게 될 것이다.

『오 주여, 주의 손인 사람들과 이생에서 자기들의 몫을 받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나의 혼을 구하소서. 주께서 주의 감추어진 보화로 그들의 배를 채우셨으니 그들은 자녀들로 가득하고 그들의 남은 재산을 자기들의 아기들에게 남겨 주나이다. 나, 나는 의 가운데서 주의 얼굴을 보리니 내가 깨면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리이다』(14,15절). 시편 17편은 이 세상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즉 『이생에서 자기들의 몫을 받은 세상 사람들』(14절)과, 『주의 얼굴』과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15절). 전자는 동물적 본능, 곧 자기 보호, 자기 번식, 자기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고(시 73:12, 약 5:5, 눅 16:23,25), 후자는 주님의 얼굴을 직접 뵈올 날을 고대하며 현 세상에서 의를 추구하며 살다가 결국 주님을 뵙게 된다. 육신적 본능을 벗어 버리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고후 4:18)에 가치를 두며 사는 일은, "교리적으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출생"을 통해서 가능하다(요 3:3-8).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 그 죄인의 혼과 몸을 분리시키시어 죄의 몸을 벗게 해주시는데(골 2:11, 롬 6:6), 그때부터 육신의 본능을 벗고 영원을 바라보는 영적 생활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진리의 지식으로 성장해 가면서 『주의 얼굴』과 『주의 모습』이 그가 뵙기 원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성도에게는 그와 관련된 또 다른 소망이 있다. 즉 성도 자신이 『주의 얼굴』과 『주의 모습』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일은 그가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날"(고전 13:12), 곧 "주님 그대로 주님을 뵙는 날"(요일 3:2)에 이뤄진다. 주의 얼굴을 뵙고 주의 모습을 그대로 뵙는 "휴거"의 그날, 그리스도 안의 모든 성도들은 큰 환희 가운데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모될 것이다. 세상은 이런 우리를 알지 못하며(요일 3:1), 이와 같은 소망을 품을 수도 없다. 성경은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요일 3:3)고 말씀한다. 진리를 실행하며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고 사는 『독특한 백성』, 주님과의 영원한 통치를 바라며 복음을 증거하는 『왕 같은 제사장』, 죄로 에워싼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함을 추구하는 『거룩한 민족』(벧전 2:9)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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