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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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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12월호>
시편 33편특별히 표제가 달려 있지 않은 시편 33편은 주님께 보호받고 싶어 하는 성도를 위한 시이다. 이 시에서는 주님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성도가 그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진리를 위해 사는 일이 힘에 부치는 이에게 시편 33편은 큰 위로로 다가올 것이다.
『오 너희 의인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찬양은 정직한 사람에게 합당한 것이니라. 하프로 주를 찬양하고 솔터리와 열 줄 악기로 그분께 노래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분께 노래하며 큰 소리로 정교히 연주할지어다. 주의 말씀은 옳으며 그의 모든 역사는 진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도다』(1-4절).
"의인"의 기쁨은 『주 안에서』 이루어진다. 의인은 다른 데서 기쁨을 찾을 수 없다. 의인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육신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에서 기쁨을 찾는다는 것이다. 의인은 자신이 주 안에서 찾은 기쁨을 찬양으로 표현한다. 찬양은 주 안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의인에게 합당하고 즐겁고 좋은 것이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이는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이 좋으며 그것이 즐거움이요, 찬양은 합당한 것임이라』(시 147:1). 화나고 짜증난 얼굴로 찬양하는 의인이 있겠는가? 하나님께 불만을 품은 채 노래하는 의인이 있겠는가? 찬양은 꽃처럼 활짝 피어난 기쁨이요, 주님을 기뻐하는 의인에게 주어진 찬란한 하늘의 특권이다.
『하프로 주를 찬양하고 솔터리와 열 줄 악기로 그분께 노래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분께 노래하며 큰 소리로 정교히 연주할지어다』(2,3절). 의인들의 찬양에는 하프와 솔터리, 열 줄 악기 같은 악기들이 동반된다. 그들은 새 노래로 찬양하며, 그들의 연주는 소리가 크며 장엄하고 정교하다. 하나님께서는 모양새가 아닌 마음의 진실을 원하는 분이시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을 향한 찬양과 연주는 본질적으로 최상의 화음과 최상의 연주로 드려져야 한다. 성경은 주님을 향해 큰 소리로 정교하게 연주하라고 명령한다. 주님은 큰 소리와 정교한 연주로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셋째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천사들의 찬양과 연주가 이 땅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천상의 화음과 정교함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것은 그리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곳에서는 아담의 타락으로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드리는 이 땅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가장 원천적인 천상의 능력으로 크고 정교한 찬양이 울려 퍼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땅의 성도가 자신이 찬양을 잘하든 못하든 주님을 기뻐하며 마음의 진실을 담아 노래하는 것은, 그가 믿고 따르는 주님의 말씀이 옳고 그분의 모든 역사가 진리 가운데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은 옳으며 그의 모든 역사는 진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도다』(4절). 본 시편에서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이유를 시편 92편에서도 동일하게 노래한다. 『오 지극히 높으신 분이여, 주께 감사를 드리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 좋사오며, 아침에는 주의 자애를, 밤마다 주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되 열 줄 악기와 솔터리와 장중한 소리를 내는 하프로 하는 것이 좋으니이다. 주여, 주께서는 주의 역사를 통하여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내가 주의 손의 역사들로 인하여 기뻐 외치리이다』(시 92:1-4).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모든 역사가 기쁘지 않다면 다윗처럼 기뻐 외칠 수 없다. 진리의 말씀을 기뻐하는 성도만이 주님께서 행하신 진리의 역사로 인하여 주님을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그가 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니 땅은 주의 선하심으로 충만하도다』(5절).
땅은 주님께서 지상에 재림하시기 전에는 죄가 충만하므로 아직은 주님의 선하심으로 충만하지 않지만, 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성도에게는 주님의 선하심이 충만히 베풀어진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광 가운데서 그의 풍요함을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빌 4:19). 그러나 의와 공의가 없는 세상 죄인들은 살인과 폭력, 술, 마약, 음행, 우상 숭배에 대한 징벌로 갈수록 모든 필요 요소들이 고갈되다가 결국 대환란의 전무후무한 황폐함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의 말씀에 의하여 하늘들이 지음을 받았으며 그것들의 모든 군상도 그의 입김으로 되었도다. 그는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음을 창고에 두시는도다. 온 땅은 주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은 그를 두려워할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것이 이루어졌고 그가 명령하시니 그것이 확고히 섰도다』(6-9절).
시편 기자는 본문 4절에서 『주의 말씀은 옳으며 그의 모든 역사는 진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도다.』(4절)라고 노래했다. 위의 말씀들은 주님의 옳은 말씀으로 이뤄진 그분의 모든 역사의 중심에 창세기 1장의 창조가 있음을 노래한다. 세상의 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거듭나지 못한 마귀의 자식들로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교만의 자식들을 다스리는 왕』(욥 41:34)인 마귀를 그들의 아비로 두고 있기에(요 8:44) 그들의 교만한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두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는 우주의 역사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경의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상상으로 지어 낸 초자연적인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고 명령하신 것이 확고히 선"(9절) 창조주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두려워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God said... and it was so].』가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창 1:9,14,15,24,29,30). 말씀만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시라면 그 말씀의 권위와 능력 앞에 엎드림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말씀하시자 그것이 이루어지고 명령하시자 그것이 확고히 섰다면, 그 말씀의 하나님은 온 우주에 단 한 분밖에 없는 "참 하나님"이심이 분명하다. 『거룩한 분이 말하노라.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또한 내가 누구와 동등하게 되겠느냐?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였으며, 그들의 군상들을 수효대로 이끌어 내셨는지 보라. 그가 그들의 이름을 그의 막강한 위력으로 모두 부르시나니 이는 그의 권세가 강하고 하나도 부족함이 없으심이라』(사 40:25,26).
『주께서 이방의 계략을 좌절시키시고 백성들의 계책을 무효로 만드시는도다. 주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마음의 생각들은 모든 세대까지 서리로다. 자기들의 하나님이 주이신 민족은 복이 있으며 주께서 자기 유업으로 택하신 백성은 복이 있도다』(10-12절).
본문에서는 『이방의 계략』과 『주의 계획』이 대조를 이루고, 『백성들의 계책』과 『그의 마음의 생각들』이 대조를 이룬다. 6-9절에서 묘사한 두려우신 창조주께서는 그분의 계획으로 이방의 계략을 좌절시키시고, 그분의 마음의 생각들로 백성들의 계책을 무효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모시고 그분께서 자신의 유업으로 택하신 백성은 분명 복이 있다.
이 창조주의 백성은 이스라엘이다. 『자기들의 하나님이 주이신 민족』은 이스라엘이다. 이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도전한다. 『오 너희 백성들아, 단결하라. 그래도 너희가 산산이 부서지리라. 너희 먼 나라들의 모든 사람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는 허리를 동이라. 그래도 너희가 산산이 부서지리라. 너희는 허리를 동이라. 그래도 너희가 산산이 부서지리라. 함께 의논하라. 그래도 아무것에도 이르지 못하리라. 말을 하라. 그래도 서지 못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사 8:9,10).
대환란 때 UN의 2억 명의 군대는 『이방의 계략』과 『백성들의 계책』으로 이스라엘을 총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한 『주의 계획』과 『생각들』은 그들을 그렇게 하나로 모아 한 번에 처리해 버리시는 것이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일어나서 먹이로 삼는 날까지 나를 기다리라. 이는 내 결심이 민족들을 모으는 것임이니 내가 왕국들을 모아서 그들 위에 내 분노, 곧 나의 모든 격노를 쏟으리라. 이는 온 땅이 내 질투의 불로 삼켜질 것임이라』(슾 3:8).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심판을 어찌 헤아리며 그분의 지나간 길을 어찌 찾아내리요?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의논자가 되었느냐?』(롬 11:33,34)
『주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들의 아들들을 보고 계시는도다. 주께서 그의 처소에서 땅의 모든 거민들을 바라보시는도다. 그가 그들의 마음을 비슷하게 지으시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살피시는도다』(13-15절).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그들 모두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주의 눈』은 온 땅을 두루 살피시고(대하 16:9), 어느 곳에서나 악한 자와 선한 자를 살피신다(잠 15:3). 하나님께서는 비슷한 마음들을 가진 사람들의 아들들의 행위를 일일이 살피신다. 그들의 비슷한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악한 마음이며(렘 17:9), 그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는 동일하다. 왕이든지 거지든지 그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간음과 음행과 살인과 도둑질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눈과 하나님을 모독함과 교만과 어리석음』(막 7:21,22)이다. 이러한 것들로 더럽혀진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지옥밖에 없다.
첫째 아담의 실패로 타락해 버린 마음은 이제 바뀌어 그 행위가 달라질 수 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변화된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히 10:21,22).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로 양심이 정결케 되어 죽은 행실을 버리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이다(히 9:14). 마음이 타락한 세상 모든 죄인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의 변화를 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성경대로 믿고 섬기는 것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벧후 3:9). 당신은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이 뜻을 알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딤후 4:2).
『많은 군대로 구원받은 왕이 없으며 막강한 힘으로 구제받은 용사도 없느니라. 안전을 위해서는 말도 부질없는 것이요, 그 막강한 힘으로 아무도 구해 내지 못하리라』(16,17절).
『주의 눈』이 머무는 곳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전쟁"이다.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다. 전쟁을 겪은 세대가 하는 말은, 만일 전쟁이 터지면 다 죽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을 통해 많은 죽음을 직접 목격한 이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전쟁은 죽음의 참혹한 향연이다. 때문에 왕은 자신의 많은 군대로 구원받으려 할 것이고, 용사는 자신의 막강한 힘으로 구제받으려 할 것이며, 말을 탄 군인은 말을 의지해 구해 냄을 받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러한 것들로 구해 냄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의 눈』이 머무는 사람들, 곧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자비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구해 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쟁의 날을 위하여 말이 예비되어도, 구원은 주께 속한 것이니라』(잠 21:31).
말하자면 이것은 "신뢰를 누구에게 두느냐"의 문제이다. 전쟁을 벌이는 왕이 많은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용사가 자신의 막강한 힘을 사용해 적을 격퇴하고, 기병이 말을 타고 출전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그러한 것들을 신뢰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려 하는 것이 죄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성도는 구원에 대한 기대를 주님께 두어야 한다. 『내 혼아, 너는 하나님만 기다리라. 나의 기대가 그로부터 오는도다.』(시 62:5)라고 말하며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선택 속에 갈등하는 인생길에서 언제나 주님을 신뢰하는 길만을 택해야 한다. 이 "신뢰를 누구에게 두느냐"의 문제는 성도가 그의 인생의 갈등 속에서 풀어야 할 문제이다. 그것은 쉬우면서도, 알면서도, 결코 답을 쉽게 적어 내지 못하는 문제이다. 많은 성도들이 이 쉬운 문제의 답을 머뭇거리다 적어 내지 못해, 이 "한 문제"로 된 인생의 시험에 영점처리되고 말았다. 당신의 신뢰 점수는 몇 점인가?
『보라, 주의 눈이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 위에 있으며 그의 자비를 바라는 자들 위에 있어 그들의 혼을 사망에서 구해 내시며 기근 속에서도 그들을 살게 하시는도다. 우리의 혼이 주를 기다리니 그는 우리의 도움이시며 우리의 방패시라. 우리의 마음이 그를 즐거워하리니 이는 우리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신뢰했기 때문이라. 오 주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자비를 우리에게 베푸소서』(18-22절).
성도라고 하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보호받지 못하며 살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의 자비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도라고 하면서도 마음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그가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우물에는 그것을 판 사람이 있다. 때지 않은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 성도여, 주님의 보호를 받고 싶은가? 당신도 마음이 즐겁고 싶은가? 그렇다면 주님의 자비를 바라라.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신뢰하라. 당신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그 답답한 의심과 불신을 벗어 버리고,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맑고 청명한 믿음으로 나아오라!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자. 이는 우리가 자비를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함이라』(히 4:16).
주님을 두려워하는가? 주님의 자비를 바라는가? 인생의 고난 가운데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신뢰했는가? 그렇다면 『주의 눈』은 바로 "당신" 위에 머물고 있다. 당신은 지금 겪고 있는 그 고난에서 반드시 구해 냄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 소망을 두는 한, 주님께서도 당신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