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사 분류
“걱정”하는 그리스도인들
컨텐츠 정보
- 99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9월호>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분께서 너희를 더욱더 잘 입히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고 말하며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런 모든 것이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마 6:30-32). 이 말씀은 산상설교로서, 교리적으로는 왕국 헌법을 다루며, 다가올 천년왕국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법령들이다. 교회 시대 동안에는 왕국을 위한 이러한 규칙들이 연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왕국을 위한 것이므로 구원에 관한 내용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행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 교리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내용들이 있지만, 위의 마태복음 본문은 성경의 다른 모든 구절들처럼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말하자면 산상설교에서도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교훈들이 있는 것이다.예수님께서는 유대인 민족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언급하고 계신다. 하지만 당신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빌 4:6,19).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34에서 하신 말씀도 누구나 적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여기서의 요점은, 오늘은 오늘만으로도 충분한 문제들이 있으므로 내일의 문제까지 다룰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 남부에는 이런 말이 있다. “결코 걱정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의 요지는, 당신이 그것을 고칠 수 있다면 그냥 고치고 걱정을 멈추라는 것이다. 또한 고칠 수 없다면 걱정을 멈추라는 것이다. 어차피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다. 아무리 많이 움직여도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그저 앞뒤로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걱정,” 곧 “worry”라는 단어는 <킹제임스성경>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재미”(fun)와 “나누다”(share)라는 단어도 없다.
사람들은 결코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수도 없이 걱정한다. 생각해 보라. 때로 끔찍한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적이 있지 않은가? 나도 수십 번 그런 적이 있다. 존 웨슬리는 거룩한 삶을 살았다. 웨슬리는 걱정하는 것을 술 취하는 것만큼이나 악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걱정은 죄이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에 대해 걱정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여러분이 걱정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걱정들을 다루려고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구원 여부”에 대해 걱정한다.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 자신의 구원을 의심했던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은 사람들이었다. 마귀가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짓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토론토로, 브라운스빌로, 또 다른 곳으로 이리저리 가서 구원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구원받기를 반복한다. 그런 집회에 가서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고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자, 나는 구원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마귀와 논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귀가 내게 “너는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면 나는 말한다. “좋아, 그럼 그냥 내가 잘 지내게 내버려둬!” 당신은 내가 왜 구원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지 아는가? 왜냐하면 나는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했기 때문이며, 그것이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고칠 수 없다면,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나의 구원은 확정되어 있다. 즉 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변화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내가 이 일을 되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도록 예정된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즉 나는 결국 주님과 똑같이 될 운명이라는 뜻이다(빌 3:21). 내가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지옥에 가지도 않을 텐데 왜 걱정하겠는가?
여러 해 동안 교제한 좋은 목사 친구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20년 동안 자신의 구원을 의심했다. 부흥사가 마을에 올 때마다 그녀는 기도의 제단으로 내려가 다시 “구원”을 받곤 했다. 한번은 집회가 끝날 무렵 그 목사가 나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있었는데, 그녀가 차에 타고는 내게 자신의 구원에 대해 물었다. 약 30분 동안 얘기해 줘도 아무런 진전이 없자 나는 말했다. “죽어서 지옥에 가고 싶지 않으시죠?” “네.” “그럼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무엇을 믿고 계신가요?” “음, 저는 그 답을 알아요.” “답을 말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자매님이 무엇을 신뢰하고 있는지 말해주세요!” “음, 뭐라고 말해야 정답인지 알아요!”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마세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은 거 맞죠?” “네.” “그럼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무엇을 의지하고 있나요? 무언가를 의지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네, 예수 그리스도의 피요!” 이에 내가 “아!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뭔데요?” “자매님은 구원받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늘나라에 가야만 해요!”
내가 한 가지 말해 주겠다. 만약 당신이 구원에 대해 걱정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잘 들으라. 당신은 자신의 혼의 운명을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에 걸어야 한다. 자신의 혼을 “성경”에 맡겨야 하고, 그 복음의 말씀들을 믿어야 한다.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은 믿지 않더라도, “성경”의 말씀들은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않으시며 또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지 않으시랴? 또한 이르신 것을 이루지 않으시랴?』(민 23:19).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롬 3:4).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대답해 보라. 당신은 주의 이름을 불렀는가? 주님께 당신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했는가? 그렇게 했다면, 나는 당신의 구원에 대해 단 5분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와 친척들의 구원에 대해 걱정한다. 이것은 구원의 확실한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게 되었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모른다.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걱정은 남편이나 아내, 아들이나 딸, 누이나 형제, 또는 가까운 친구 중 누군가의 구원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결코 거듭나지 않았고, 구원받지 않은 이교도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죽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고 공언했던 전체 기간 동안 단 한 혼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5년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중요 인물들을 만나 악수했지만, 그들이 구원받았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아는가? 교황은 자신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마호메트와 똑같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임>지를 집어 들어 보았더니, 거기에 그에 대해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얼마나 신성 모독적이고 천치 같은 말인가! 당신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 준 분이 정말 누구인가? 그걸 진짜 모른단 말인가? 나는 독자들 중 그 누구도 교황처럼 살거나 교황처럼 죽지 않기를 매일 기도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당신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죽을 때가 되었는데, 성경 구절 하나 인용하지 못하고 어디로 가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로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 절대 그렇게 죽지 말라! 대신 이렇게 죽으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어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며 또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라』(딤후 4:7,8).
셋째, 성도들은 각종 청구서를 지불하는 것에 대해 걱정한다. 사실 이것은 모두가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보다 더 양심적인 법이며,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 청구서를 지불하지 않는다고 세상이 욕할 일은 거의 없다. 당신이 인색하거나 게으르지 않다면, 결국에는 청구서들을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다만 주님께 드리거나 성도들에게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또 물건을 잔뜩 외상으로 사고는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기대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빚을 지고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대한다. 이것저것 외상으로 사고 나서, 하나님께 그 빚을 갚아 달라고 요청한다. 비자카드와 마스터카드, 뱅크오브아메리카카드를 발급받아, 새 스테레오, 새 차, 새 TV, 새 옷을 사고, 호화로운 집을 산다. 그 모든 것을 가진 후에는, 자신이 일으킨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원한다. 당신은 이런 문제들을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도록 걱정하다가 위궤양에 걸릴지도 모른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걱정한다. 때로 비난받을 만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 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이 비난하는데 그것이 진실이라면, 당신이 이제부터 똑바로 살면 된다. 만약 그들이 당신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냥 잊어버리라.
사람들은 나 “럭크만”에 대해서도 별별 비난을 다한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그런 것이 끝도 없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 왜냐고? 관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하길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최선을 다해 하고 있다면, 내가 왜 다른 누군가가 하는 말에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워싱턴에 있었던 내 목사 친구 캔 블루가 나를 초청해서 집회를 가졌을 때,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세 명의 목사들이 달려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럭크만을 초청했다고요? 럭크만이 <주의 칼>과 존 R. 라이스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몰라요? 럭크만을 데려오면 당신의 교회가 망할 거라고요!” 이미 십수 년이 지난 일이다. 그런데 내가 그 집회에 갔을 때 그 교회가 묻을 닫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성인 5명이 구원받는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그 다음에 뭐라고 했냐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사역의 결과가 부족하다고 걱정한다. 만일 당신이 설교하도록 부름받았다면, 아마 이런 걱정을 할 것이다.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지 못하면 사역자인 당신은 신경이 쓰일 것이다. 이에 당신은 “그럼 어떻게 하죠?”라고 물을 것이다.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그러면 약간이라도 열매를 얻을 것이다. 개인 구령을 하고도 열매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결단을 촉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 것은, 나는 결코 당신에게 죄인이 죄의 깨달음도 없는데 결단을 촉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 구령을 할 때는 천천히, 신중하게 복음 전파를 이어가라. 그리고 죄의 깨달음이 확실히 있다면, 그때 밀어붙이라. 그러면 열매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은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인원만 15,000명이 되었던 잭 하일스 목사의 사역을 듣고서 낙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계산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아는가? 그는 인구 500만 명의 도시에서 목회하며, 75마일을 누비는 버스들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8,000명이 사는 소도시에서 당신의 교회 주일학교에 20명이 참석한다면 오히려 당신이 잭 하일스보다 더 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열매가 없는 것 같아서 불평하곤 하는데, 그래도 한 해에 다섯 번 정도는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삼 년 전에” 혹은 “십 년 전에” 내 사역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들 중 일부는 초청 시간에 앞으로 나오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로 구원을 받았다. 계속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전파하되, 그 결과를 걱정하지는 말라.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열매들 중 많은 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마침내 거두게 될 것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내 말도 그러하나니 그것은 내게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보내어 이루려 하는 일에서 번성할 것이니라』(사 55:11).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을 걱정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하고 신경 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최선을 다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기꺼이 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마음을 품는 당신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밥 존스 시니어는 “내일을 위한 최고의 준비는 오늘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당신이 오늘 해야 할 일을 한다면, 내일은 내일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될 것이다. 기꺼이 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일은 결코 없다. 당신은 말한다. “무엇을 기꺼이 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그것을 기꺼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하나님께 물어 보라. 그것을 보여 주시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행하려 하고, 또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당신에게서 마음의 부담도 사라지게 하실 것이다.
1700년대 초, 모라비안 교도들은 독일에서 그들의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헤른후트”라 불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마을이 있었다. 그들의 문장(紋章)은 “제단 앞에 서 있는 황소”였다. 그런데 그 황소 앞에는 황소에 매어 있지 않은 쟁기도 있었다. 그 문장 아래에 “어느 쪽이든 준비되어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써 있었다고 한다. 주님의 종으로서, 나는 황소와 같다(고전 9:9). 나는 제단 위에서 제물로 불탈 준비도, 하나님께서 내게 매실 쟁기를 끌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사용하실 준비가 되어 있거나, 혹은 나를 데려가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 쓰임받거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데려가시는 일,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항복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이미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부르심이 아닐 수도 있다. 당신이 확인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기꺼이 하려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거부한 적이 있다면,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한 번 이상 당신에게 상기시키셨는데도 완고함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응하고 있다면, 바로 지금 그 일을 바로잡으라. 『먼저 할 마음만 있다면 사람이 가진 대로 받으실 것이며 없는 것을 받지는 아니하시리라』(고후 8:12). 당신은 기꺼이 하려는 마음이 있는가?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