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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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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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1월호>

『파송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와 같으니 “화평의 복음을 전하며 좋은 일들의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느니라』(롬 10:15).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 준다면, 그 사람의 발은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평을 이루도록 돕는 이의 발은 참으로 아름답다. 『오 통치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의 마디는 정교한 기술자의 손으로 만든 보석들 같도다』(솔 7:1). 이 구절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름다운 발을 가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성들은 항상 자기 발이 크다고 걱정한다. 내가 젊었을 때 스윙 밴드에서 활동하던 시절, “당신은 발이 너무 커요!”라는 노래가 있었다. 그때도 나는 여자들이 왜 발이 크다고 그렇게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신발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때 여름이 되면 6월에서 8월까지 내내 델라웨어 해변에서 맨발로 뛰어놀았다. 지금도 신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가능하면 신발 없이 다니려고 한다. 그것은 내가 아직도 어른답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다. 아이들이 신발을 자주 벗어 버리고 또한 잃어버리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어릴 적에 맨발로 다녔던 탓인지 내 발은 오리발처럼 생겼다. 대학 시절에 수영을 많이 했고, 해변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기 때문에 발이 그렇게 자란 것 같다. 수영을 하면서 자랐거나 맨발로 다니는 시간이 많으면 발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부츠나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처카(chukka) 부츠 외에는 편안하게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찾을 수 없었다.

보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발”이다. 나는 보병대에서 온갖 종류의 발을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말, 벌지 전투(또는 아르덴 공세)에서 독일군이 반격을 시작하면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국은 30대 후반부터 40대까지 징집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그들을 단 6주만 훈련을 시키고는 전선으로 내보냈다. 그런 엉망인 군대는 내 생애 처음 봤다. 정말로 처참했다. 6주짜리 훈련으로는 사람을 제대로 훈련시킬 수 없다! 사실 보병 훈련은 가장 힘들고 가장 포괄적인 훈련이어야 마땅하다.

한번은 내가 훈련병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몸집이 크고 몸무게가 110kg에 육박하는 훈련병이 있었다. 그는 점점 대열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약 8km 정도를 걷고 나니 대열 맨 뒤쪽에 있었고, 내가 그를 데리러 가야 했다. “이봐, 밴 뷰런, 빨리 가자!” 그러자 그가 말했다. “더는 못 가겠어요!” 그는 아칸소주 어디 출신이었다. 나는 “좋아, 네 발을 좀 보자.”라고 말하고는 도로에 서서 그의 군화를 벗겼다. 솔직히 말해, 그는 15미터도 더 걸을 수 있는 발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발은 굴곡이라고는 전혀 없는 평발이었기 때문이다. 몸무게가 그렇게 많이 나가는 거구의 사람이 팬케이크같이 지면에 달라붙는 발로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이런 군인을 전쟁터에 보낸다니!” 그는 40대의 농부였고, 아내와 다섯 아이를 농장에 남겨두고 왔다. 그런 사람이 전쟁에 나가기 위해 평발로 걸으면서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발”에 대해 두 가지를 이야기해 보겠다. 우선은 “맨발”이 상징하는 것들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신을 신은 발”이 상징하는 것들을 살펴볼 것이다. 먼저 성경에서 “맨발”은 네 가지를 상징한다.

첫째, “맨발”은 당신이 더럽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소서.』(9절)라고 했는데, 이는 주님께 “전부 다 씻어 주세요.”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으니 그는 온몸이 깨끗함이라. 너희는 깨끗하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니라』(요 13:10). 목욕을 하면 온몸이 깨끗해진다. 그러나 하루 동안 맨발로 다니면 발이 더러워진다. 그래서 발은 다시 씻어야 한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의 죄들은 예수님의 피로 깨끗해진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발”은 더러워질 수 있다. 즉 매일의 삶 속에서 죄로 더럽혀질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이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 말을 통하여 깨끗해졌느니라』(요 15:3).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서는 깨끗함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럴 방법은 없다. 독자들 중에는 어쩌면 지난 1년 동안 하루에 단 15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난 3년 동안이나 이런 생활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살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당신은 점점 더 더러워지고, 그 더러움이 겹겹이 쌓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발”을 깨끗하게 유지하라.

구약 시대에 제사장은 성막을 드나들면서 계속 먼지로 더러워졌다. 제사장은 일절 앉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참된 “대제사장”께서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다시 영광으로 올라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주님과 함께 천상에 앉아 있지만, 이 낡은 몸은 여전히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한다. 우리는 아직 주님과 완전하게 함께 앉지 못한 것이다. 맨발로 길을 가면 더러운 것이 묻을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맨발은 “더러움”을 뜻한다.

둘째, 성경에서 맨발은 “가난”을 상징한다. 잃어버린 방탕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라고 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더럽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가난하다. 만약 당신이 아직 구원받지 않았다면, 당신은 “맨발”이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발에 신을 신겨 주셔야 한다.

발에 해로운 세 가지 행동은 모래 위를 부츠를 신고 달리거나, 아스팔트를 맨발로 달리거나, 대리석 바닥을 하이힐을 신고 걷는 것이다.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항상 놀란다. 당신은 바늘 같이 뾰족하고 가느다란 굽을 본 적이 있는가? 발목이 삐거나 부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 평생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준비를 하면서 위태롭게 산다. 또한 맨발로 여름에 뛰어다니다가 아스팔트로 된 주차장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정말로 뜨겁다. 나는 독일 보병들이 부츠를 신고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의 모래언덕을 건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세 가지 상황을 생각하면, 발바닥이 달아오르는데도 자기 발을 감싸줄 이가 없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떠올린다. 죄인들은 지쳐 있고, 진창에 빠지고, 힘들어하며 언덕을 오르내린다. 죄인은 “좋은 신발”이 필요한 것이다.

셋째, 성경에서 맨발은 “벌거벗음”을 상징한다. 『그 때 주께서 아모즈의 아들 이사야를 통하여 일러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허리에서 베옷을 풀고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시니, 그가 그대로 하여 맨몸과 맨발로 걸으니라』(사 20:2). 이 구절은 이사야의 벌거벗음을 상징한다. 세상에 첫 번째로 태어난 아기도 맨발로 태어났다. 이 세상에 올 때 사람은 맨발로 온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도 맨발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진 흙 위에 맨발로 서 있었다(창 2:25).

사람이 죽음에 가까워지면, 보통 침대에 눕히고 신발을 벗긴다. 어떤 사람들은 때로 “군화를 신은 채로 죽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말하자면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죽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죽지 않는다. 보통 신발을 벗은 채 죽는다. 미국에서는 죽은 사람을 신발을 신긴 채로 묻지 않는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맨발이다. 즉 그는 더럽고, 파산 상태이며, 벌거벗었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신을 신은 발”은 무엇을 상징할까? 그것은 세 가지를 상징한다.

첫째, 신발은 “구원”의 상징이다. 잃어버린 방탕한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자기 종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 죄인이 지옥의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발을 떼고 신발을 신게 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건이다!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안으로 데려오라.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찾았노라!”

사람이 범하는 모든 죄는 “발”이 그곳으로 데려갔기 때문에 저질러진 것이다. 잠언 6장은 『악으로 달려가는 데 빠른 발』(잠 6:18)이라고 말씀한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죄는 그 죄를 짓는 장소로 먼저 “가야” 한다. 그 어디든 상관없다. “발”이 당신을 그곳으로 데려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의 발은 신을 신게 된다. 신을 신은 발은 이전의 장소로 그를 데려가지 않는다. 이제 그 발은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이전의 죄의 장소들로 데려가지 않는다.

둘째, 신발은 “공급”의 상징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였으나 너희의 옷이 너희에게서 낡아지지 않았고 네 신도 네 발에서 낡아지지 아니하였으며』(신 29:5).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신은 철과 놋이 될 것이요』(신 33:25). “철”로 된 신발이 있다면, 꽤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고가의 명품 구두가 없을지라도, 당신이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좋은 구두를 만들 수 있는 “가죽”을 당신에게 선물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발은 “사명”을 상징한다. 모든 분야에는 그 분야에 맞는 특별한 신발이 있다. 축구 선수가 테니스화로 축구를 하지 않듯이, 골프화는 축구화처럼 생기지 않았고, 축구화는 야구화처럼 생기지 않았다. 주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시면, 그분은 당신의 발에 “화평의 복음을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게 하신다(엡 6:15). 그러므로 당신도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적합한 신발을 신어야 한다.
만약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면, 나는 청바지와 운동복 상의에 테니스화를 신을 것이다. 일부 교회에서는 잘 닦은 단단한 나무 강단을 설치하는데, 그런 곳에서 구두를 신었다가는 미끄러져 목이 부러질 수 있다. 하지만 테니스화는 미끄러지지 않는다. 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신발은 사명과 연관되며, 상황마다 각기 다른 종류의 신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기분이 좋을 때 중 하나는, 추운 밤에 늦게 집에 돌아와 신발을 갈아 신을 때이다. 당신은 그런 적이 있는가? 나는 미시간주의 눈 속에서 토끼 사냥을 하기도 했고, 12월과 1월에는 멕시코만에서 숭어 낚시를 했다. 밤에 돌아와 낡은 고무장화를 벗으면 추위에 고생한 발이 파랗게 변해 있다. 발을 문지르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따뜻하고 아늑한 슬리퍼를 신는 기분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다!

언젠가 내가 침상에 누워 있을 때, 장의사가 내 신발을 벗길 것이다. 그때는 사냥 부츠와 낚시 부츠를 더 이상 신지 못할 것이다. 그때 나는 영광의 나라로 올라갈 것이고, 주님께서 나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 당신은 이런 노래를 들어 본 적 있는가? “아, 난 이제 황금 신을 신으리라. 나는 황금 신을 신고 황금 길을 걸으리라.” 당신은 침례인 요한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는가? 『나는 그분의 신을 들 만한 자격도 없느니라』(마 3:11). 요한이 주님의 신을 들 자격이 없다면 내가 무슨 자격이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자신이 그 신발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롬 10:15). 『화평의 복음을 준비한 것으로 너희 발에 신고』(엡 6:15). 이 신발이 당신에게 맞는가? 당신과 잘 어울리는가?(빌 1:27) 당신은 마땅히 그 신발이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있는가? 『이것이 길이니 너희가 오른편으로 돌이키든지 왼편으로 돌이키든지 너희는 그 길로 걸으라』(사 30:21).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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