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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이 “원본”보다 우수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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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2월호>
우리가 위와 같이 제목을 붙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소위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은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성경이라는 형태로 모아진 적이 없는,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두루마리들과 필사본들이다. 원본들은 단 한 번도 한 권의 책 형태로 집대성된 적이 없었다. 둘째, A.D. 100년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가진 “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A.D. 100년에는 노아가 B.C. 2344년에 전한 설교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여호수아, 잠언, 이사야 등 이미 사라진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이 한 권의 성경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고한 사실들에 근거하여, 흔히 말하는 “성경적 권위”에 관한 역사적 근본 입장이 왜 터무니없는 것인지에 대해 네 가지 확실한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가 “성경적 권위”라고 할 때는 사람들이 직접 손에 들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전파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최종적이며 오류 없는 성경과 그 권위를 의미한다.1. 권위를 인정받은 <킹제임스성경>은 읽고, 암송하고,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이유 때문에 “원본”보다 훨씬 우수하다. 반면 원본은 그렇게 할 수 없다. B.C. 1000년 이후로 누구도 원본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우리가 “손 안에 있는 새 한 마리가 숲속의 두 마리보다 낫다.”라는 속담에 동의한다면, 21세기의 <킹제임스성경> 한 권이 바울이 직접 기록한 자필 원본들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주장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이해하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아둔하고 어리석은 기독교 학교의 교수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당신이 소위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원본들은 한 권의 성경책으로 묶여 있지 않을 것이고, 문장과 단락 구분도 없을 것이며(적어도 학자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장과 절 구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그뿐 아니라 원본을 읽으려면 최소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4년간 공부해야 한다. 원본들에서 얻은 내용을 영어나 자국어로 옮겨 주지 않으면, 당신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세계 인구의 90% 이상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사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10%로 상정한 것 자체가 과장이며, 실제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5%도 되지 않는다.
2. <킹제임스성경>의 신약은 그 열매들에 있어서 신약 원본들을 훨씬 능가한다. <킹제임스성경>의 열매는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열매들 가운데 있으며(계 3:8), 신약 원본은 에베소 교회 시대에 열매를 맺었다(계 2:2). 아무리 적게 잡아도, <킹제임스성경>과 그것을 번역한 성경으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바울의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을 가르치고 전한 기간 동안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보다 최소 열 배 이상 많다. 원본들은 기록된 후 100년 안에 마모되어 사라졌지만 <킹제임스성경>은 현재 400년 이상 강력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밥존스대학, 테네시템플대학, 펜사콜라기독대학, 리버티대학의 배교자들이 이 사안을 대하는 반응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우리를 “성경 숭배자”라고 거짓 비난하는 그들이야말로 실은 “필사본 숭배자”(manuscriptolaters)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필 원본”에 <킹제임스성경>이나 그 번역본에서 얻을 수 없는 뭔가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고 믿는다. 이 불쌍하고 자기 기만적이며 자아도취에 빠진 학자들은 만약 원본을 손에 넣는다면, 그 종잇조각들이 <킹제임스성경>의 본문보다 더 많이 성령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 믿는 듯하다. 이렇게 미신적인 믿음을 가진 까닭은 그들 자신이 영적이지 않고 지성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D.L. 무디와 빌리 선데이는 <킹제임스성경>의 본문을 가지고 바울과 베드로가 평생 동안 “원본”으로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바울의 회심자들과 찰스 피니, 휫필드, 웨슬리의 회심자들을 비교해 보면, 원본이 더 우수하다거나 더 능력이 있을 거 같다는 논리는 완전히 무너진다. 비유컨대, <킹제임스성경>은 달에까지 도달했지만, “원본”은 쿠바조차 도달하지 못했다. 모든 교회사가들이 (구원받았든 그렇지 않든) 동의하듯이, 교회사의 가장 위대한 시기는 1600년부터 1900년까지의 기간이다.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무오한 원본”의 능력과 권위가, 보존된 자국어 성경을 능가한다면, 성령님께서는 실수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원본보다 번역본인 <킹제임스성경>을 그 기간 동안 더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라!
3. <킹제임스성경>은 리듬감 있고 시적인 스타일로 번역되어 암송하기에 쉽다. 헬라어와 라틴어는 지구상에서 가장 딱딱하고 문어적인 언어 중 하나이다. 설령 현대의 그리스어나 히브리어가 해당 언어 사용자들에게는 시적일 수 있다고 쳐도, 그것은 성경의 “원본들”은 전 세계 인구의 5% 미만의 사람들만이 쉽게 암송할 수 있다는 뜻일 뿐이다.
배교한 보수주의자들이 허구한 날 펼치는 논리가 있다. 그들은 <킹제임스성경>만이 유일한 올바른 영어 성경이라면 “영어 성경을 갖지 못한 전 세계 인구의 40%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질문한다. 이들의 논리를 똑같이 사용해서 원본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물어 보자. “그렇다면 헬라어와 히브리어 사본들을 가지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읽을 수도 없는 전 세계 인구의 95%는 어떻게 되는가?”
만약 원본들이 “축자적으로 영감받았을” 때, 헬라어가 당시 로마제국의 공용어였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1세기 로마제국은 현재 영어권에 속한 세계 인구의 10분의 1도 채 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과 인도도 영국 시간을 기준으로 시계를 맞추고, 일본과 러시아도 영국을 기준으로 시각을 조정한다. 알래스카, 아르헨티나, 사모아, 마다가스카르, 로디지아, 시암, 시베리아, 베네수엘라, 오클라호마, 미시간, 쿠바, 온두라스, 캔자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각 나라나 주의 경도 또한 영국을 기준으로 결정한다. 사실이 이러한데 최종적인 영적 권위의 기준이 아테네나 예루살렘의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면 누가 믿겠는가?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바로 밥존스대학이나 하버드, 예일 대학의 학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애초에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티옥”에서 시작되었다(행 11:26). 재림이 있을 무렵의 예루살렘은 “소돔”과 “이집트”로 불릴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계 11:8). 어떤 나라도 팔레스타인이나 그리스를 기준으로 시각을 맞추지 않는다. 경도 역시 영국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1611년 이후로 만들어진 그 어떤 영어 성경도 <킹제임스성경>의 리듬감 있는 운율과 시적 아름다움을 갖추지 못했다. 이는 심지어 <킹제임스성경>을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는 자들조차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생각해 보라.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간직하였으니 이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함이니이다』(시 119:11). 원본은 사람들이 인용할 수도 없고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적용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해하고 마음에 간직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입에 말씀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롬 10:1-10) 일어나거나 앉을 때 그 말씀들을 말하라고 명령하셨고(신 11:19), 주님께서 그 말씀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요 8:51; 14:23), 이 명령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암송도 할 수 없는 원본을 가지고 하라는 말씀인가?
4. <킹제임스성경>이 원본보다 우수한 이유는 원본들은 <킹제임스성경>처럼 각각의 책이 하나의 책 형태로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그 순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신약 원본들은 문장들이 쉼 없이 연결되어 있고, 구약 원본에는 모음 표기가 없어서 발음하기도 쉽지 않다. 설령 원본들을 읽을 수 있다 해도, 책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에스더가 욥기 뒤에 배치되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에스더가 욥기 이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이 누가복음 뒤에 배치되었을 수도 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가 요한복음보다 앞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고린도전후서가 요한복음보다 이전에 쓰였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후서가 골로새서보다 먼저 배치될 수도 있다. 골로새서는 데살로니가전후서가 기록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원본을 구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과연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원본들로는 숫자 5가 죽음의 숫자라는 진리를 찾아낼 수도 없을 것이다. 기독교 대학의 교수들은 <킹제임스성경>의 장과 절을 보고도 이 진리를 찾지 못했다. 당신은 <킹제임스성경>이 전천년주의 신앙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는 진리를 찾아낼 수 있는가? 로버트슨, 메이첸, 와필드는 원본이 있든 없든, <킹제임스성경>의 이러한 진리를 찾지 못했다. 역대기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은 전천년적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도 그러하며,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바울 서신, 히브리-그리스도인 서신들도 전천년적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적어도 권위를 인정받은 <킹제임스성경>에는 그렇게 배열되어 있다. 그러나 ASV, NASV, NIV, RSV 등을 만드는 데 썼던 헬라어 사본들에는 이러한 순서로 성경이 배열되어 있지 않다. “필사본 숭배자들”도 원본들이 그러한 순서로 배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한 <킹제임스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숫자 13의 의미는 어떤가? 밥 존스 주니어는 필자가 이미 이러한 진리에 대해 <짐승의 표>라는 책에서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만약 적그리스도가 숫자를 사용하고, 20세기와 21세기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바와 같이 숫자에 대해 강박적인 집착을 보이는 시대라면, 과연 어떤 멍청이가 <킹제임스성경>에 계시된 숫자 체계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왜 우리가 “축자적으로 영감”을 받았지만 현존하지 않는 원본들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이유들이다. 우리는 지금 <킹제임스성경>을 손에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거룩한 성경이고, 그 성경은 여러 면에서 다른 번역본들과 다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그 어떤 신학교에서도 ASV, NASV, NIV 등의 현대 번역본들이 로마카톨릭의 공식 예수회 성경(1582년)과 같은 성경이라는 우리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했다. 이 위선적인 학자들은 “럭크만주의”가 어떻고 “성경 숭배”가 어떻고 하면서 우리를 거짓 비난하면서도 이 진실을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우리는 <킹제임스성경>을 고수한다. 왜냐하면 이 성경은 미국과 유럽의 모든 기독교 신학교들과, 일반 대학, 대학원의 교수들, 즉 그 교수들이 보수주의든 근본주의든 신복음주의든 자유주의든 무신론을 따르든 상관없이 그들 모두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마모되고 사라진 원본들보다 우수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킹제임스성경>은 소위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처럼 낡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성경을 영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현재 그 책을 가질 수 있도록 보존해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 중 어떤 이들이 <킹제임스성경>을 좋아하지 않거나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