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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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리가 비게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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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6월호>

『그때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내일은 새 달이라, 네 자리가 빌 것이므로 네가 없음이 알려지리라』(삼상 20:18).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피 중에 있었다. 사울이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울의 아들이자 다윗의 친구였던 요나단은 정말로 그런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새 달이 되면 사울의 양옆에는 요나단이 한쪽에 앉고 다윗도 사울의 사위이자 최고 전사로서 다른 한쪽에 앉아야 했다. 다윗이 나타나지 않으면 사울이 물을 것이고, 요나단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사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사울이 광분한다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작정했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게 될 것인즉, 그럴 경우 요나단은 이를 다윗에게 알려서 그를 도망가게 하려고 했다. 『네 자리가 빌 것이므로 네가 없음이 알려지리라.』 이 구절에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담겨 있지만, 본 글에서는 이를 영적으로 적용하여 실제적인 교훈을 얻고자 한다.

우선 "의자"에게도 인격이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의자는 그 의자에 "오래" 혹은 "주로" 앉아 있는 사람을 연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전기 충격 의자를 보면 누가 생각나는가? 당연히 거기에 앉아야만 하는 사형수들이 생각난다. 또 오케스트라에서는 악단 전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제1바이올린 수석 연주자"가 앉는 자리가 있다. 그가 피아노에 맞추어 자기 악기를 조율하고, 나머지 단원들은 그의 악기를 기준으로 음을 맞춰야 한다.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오래 있으면 그 자리만 봐도 그 사람이 떠오르게 된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빈 의자를 바라보고 있다고 할 때, 마땅히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대상이 거기에 없다면 몹시 그리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루살렘에 보좌를 세우시고 그 위에 앉으셔야 할 분이 계신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보좌에 앉으시기로 약속된(눅 1:32) 분이 오셔서 그 보좌에 앉으시길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그것을 인정하든 안 하든 사실상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롬 8:19-23). 공동묘지에 있는 모든 무덤은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는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벧후 1:19, 시 19:4-6, 말 4:2).

초림 때 예수님께서는 그 보좌에 앉으실 것에 대해 약속받으셨다. 『또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실 것이며』(눅 1:32). 그러나 그 당시에는 보좌에 앉지 않으셨고, 오히려 십자가와 가시 면류관만을 받으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신 것이 아니라면(딛 1:2) 머지않아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그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실 때 그 보좌가 세워지는 곳은 "화평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도시가 될 것인데, 이 화평의 도시는 1948년 이전까지만 따져도 33번이나 침공을 당했다. 즉 이곳 "예루살렘"은 세계 전쟁사에 있어서 가장 많이 공격당한 도시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 지구상에 화평이 임하게 하실 때, 바로 이 도시에서 화평이 시작되도록 만드실 것이다(학 2:9).

예루살렘에 세워질 『다윗의 보좌』에 『화평의 통치자』(사 9:6)께서 앉으시기 전에는 이 땅에 화평이 있을 수 없으며, 그 보좌에 앉으셔야 할 분께서 앉으셔야만 화평이 임하고 또 그 화평은 영속하게 된다. UN이 원하는 화평이 지상에 임하려면, 『실로』(창 49:10, "평화를 가져오는 분")께서 오셔서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퍼져 나가야 한다(사 2:3). 필자는 주님께서 속히 오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설령 그 일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무시한 채 술에 취하고 음행하며 살인하고 신성 모독적인 짓들을 자행하는 죄인들을 죽이신다 해도 전혀 괘념치 않는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충분히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의 값없는 선물을 거절했기 때문이다(살후 1:7-10). 주님께서 오시어 마땅히 차지하셔야 할 그 보좌와 왕국을 속히 취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또 하나의 의자가 있는데 바로 "아버지의 의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가족들은 아버지의 자리를 그리워한다. 좋은 아버지들이 있는가 하면 나쁜 아버지들도 많다.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주님께서 아버지를 데려가시는 것이 그 가정에 자비를 베푸시는 일이 되는 그런 아버지들도 있다. 반면에 좋은 아버지는 늘 그리운 법이다. 필자의 선친도 좋은 아버지셨다. 비록 구원받지는 않으셨지만 좋은 아버지셨다. 아버지는 우리 가정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돈을 버셨고 인격 또한 고매한 분이셨다. 선친은 미 육군 중령이셨는데 무슨 미심쩍은 일을 하신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바람도 피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머리가 좋으셨고 MIT 졸업생이셨다. 언젠가 어머니께 "아버지는 왜 더 훌륭한 사람이 되시지 못했는지" 여쭤 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약간 정신이 멍한 상태이셨는데, "피터야, 네 아버지는 사람들을 이용해 먹을 줄 모르신단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다. 나는 이것이 아버지의 인품을 대변해 주는 대목이라 생각했고 나도 그런 모습을 닮지 않았는가 싶다. 아버지의 의자는 "편안한 의자"다. 항상 바깥에서 수고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아버지께는 가장 좋은 의자를 드린다. 옛날에는 자식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버지의 의자로 다가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아버지로부터 "굿 나이트 키스"를 받곤 했다. 또한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 매를 맞는 장소도 바로 아버지의 의자 근처였다.

자리가 비면 그리워지는 대상이 또 있는데 "어머니의 의자"다. 옛날 어머니들은 특별한 의자를 사용했으니, 나무로 만든 등받이가 긴 흔들의자였다. 그리 편안해 보이진 않아도 아기를 재우는 데는 제격이었다. 물론 요즘 엄마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아이들이 엄마의 무릎에 앉아서 속상했던 것들을 다 털어놓았다. 아빠는 그런 얘기를 들어주지 않지만, 엄마는 잘 들어주고 또 마음을 달래 주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모든 걱정 근심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너희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심이니라』(벧전 5:7). 옛 찬송가 중에 "그대 지치고 낙담되는가? 오직 예수님께 아뢰라!"라는 내용의 찬송이 있다. 당신의 삶에도 오직 주님께만 말씀드려야 마음이 후련해지는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머니 역할도 해 주신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남성"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들을 자상하게 들어주신다는 점에서는 마치 어머니 같으시다. 『자기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그렇게 너희를 위로하리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사 66:13).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함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아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미 닭"으로 묘사하신 것이다.

언젠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면 당신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특히 구원받지 못하신 어머니가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사랑을 보여 드려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구원받자마자 부모님을 찾아가 그동안 마귀처럼 살면서 부모님을 힘들게 해 드렸던 것에 관해 용서를 빌며 부모님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비록 양친을 주님께로 이겨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돌아가신 후에 "부모님께 복음을 전해야 했었는데 하지 않았다."고 후회하지는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구원받고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믿으며 기도하시는 어머니나 할머니를 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나 할머니도 곁에 계시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 남은 가족들은 그 의자를 버리지 못하고 다락 같은 곳에 올려놓는다. 이따금씩 다락 안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면 그 의자가 삐걱거리기도 한다. 손자가 마귀처럼 살면서 말썽을 부릴 때도 우연찮게 흔들의자가 삐걱거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손자는 그 소리로 인해 괜히 마음에 커다란 찔림을 받고 반성하기도 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의자를 통해 할머니의 기도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또한 아기들이 앉아서 밥을 먹는 키가 높은 "아기식탁의자"도 있다. 주님께서 어린양 같은 아기를 영원한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면 가족들은 아기를 무척 그리워한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매우 자비로우셔서 자식이나 손자를 땅에 묻지 않도록 해 주셨다. 언젠가 밥 존스 시니어 목사가 어떤 백만장자의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식탁이 너무 커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음식을 나르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릴 정도였다. 자신을 초대한 그 부부는 구원받은 사람들이었고 또 좋은 사람들이었다. 식사를 하던 중 밥 존스 시니어가 비어 있는 아기식탁의자를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자녀가 있으세요?" 그랬더니 그 집주인은 헛기침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5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에게 아기를 주셨답니다. 그런데 아기가 죽고 말았어요. 주님께서 데려가신 거죠. 그래서 몇 번이고 저 의자를 치우려고 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답니다..."

필자가 또 말하고 싶은 의자는 "목사님의 자리"다. 하나님께서 프랭크 노리스와 뷰챔 빅을 데려가셨듯이 언젠가는 나도 데려가실 것이다. 물론 나의 설교 방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좋아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대부분의 회중은 나를 그리워할 것이다. 뷰챔 빅이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고 있었을 당시, 나를 부흥회 기간에 불러서 2-3일씩 설교하게 한 적이 있었다. 한번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런데 그 설교를 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뷰챔 빅이 타계했다. 그때 이렇게 설교했던 기억이 난다. "여호수아를 대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 여러분은 여기 강단을 보면서 빅 목사님이 더 이상 계시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프랭크 노리스나 뷰챔 빅과 같은 설교자들을 대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그들의 빈자리를 성공적으로 채우지 못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교회를 비우게 될 때 그 자리가 비게 된다. 성도들은 예배당에서 자신이 항상 앉던 자리에 앉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성도가 예배에 빠지게 되면 그 빈자리는 금방 표가 난다. 개인적으로는 텅 빈 교회처럼 "음산한"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담대하게 전파하는 교회일수록 더 그렇다. 이는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성도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목사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되면 세상적인 분위기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기 때문인데, 그런 교회에 아무도 없을 때 오게 되면 그만큼 큰 차이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의 회원으로서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되면 다른 성도들이 당신의 빈자리를 보면서 안타까워할 것이고, 또한 그 교회의 회원이 되려고 했던 사람까지도 "이 교회는 별 볼일 없는 교회"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다른 성도들에게는 당신이 하나님의 사역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 주게 된다.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에서 당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가 빌 수도 있음을 유념하라!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요 14:2)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된 곳이 있다고 말했다(벧전 1:4).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하늘나라에 자리를 예비해 놓으셨다. 하늘나라에 가면 당신이 정말 그곳에 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물론 구원받은 우리는 성경의 약속대로 하늘나라에 갈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영광 가운데 하늘나라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정말이지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때에는 "저 사람이 과연 구원받았을까?" 하고 여겼던 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할 것이다. 반면에 "그 사람은 당연히 있을 거야."라고 여겼는데 없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할 것이다.

자, 당신은 정말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확신이 있는가? 1900년대 "로버트 에드워드 네이버"라는 훌륭한 설교자가 있었는데 그는 어릴 적 악몽을 꾼 것을 계기로 구원받았다. 꿈에서 낮에 들은 설교 본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누구든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그는 큰 백보좌 앞에 서 있었는데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름들이 불리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마침내 성이 "N"으로 시작하는 사람의 이름들이 들렸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 천사가 "네이버!"라고 성을 불렀을 때 그는 "네, 여기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천사는 "아니, 너 말고 다른 '네이버'가 있어!"라고 말했고, 그렇게 "네이버"라는 똑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 몇 명을 더 불렀으며, 한참을 지나서 마침내 "로버트 에드워드 네이버!"라는 이름이 들렸다고 한다. 그는 목이 터져라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쳤고, 자신의 그런 고함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뒤 그 길로 구원받게 되었다. 옛 찬송가에 "새 이름이 영광 중에 기록되어 있네. 그게 바로 내 이름일세!"라는 내용의 찬송가 가사가 있었다(빌 4:3). 당신도 이렇게 노래 부를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 바로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하늘나라에서 당신을 위해 예비된 자리를 비게 해서는 안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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