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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에 의한 중생을 가르치는 “흠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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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3월호>
특정 교파에 관계없이 기독교계 안에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있는 “이단 교리들” 중 하나가 “침례에 의한 중생”(Baptismal Regeneration, “유아 세례” 포함)의 교리, 곧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침례도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짓 교리이다. 이런 사탄적인 가르침을 전파하고 퍼트리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은 단연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354-430)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오직 참된 침례는 ‘로마카톨릭’에서 주는 ‘물 침례(세례)’이며, 그 외의 모든 침례(세례)는 이단적이다.”라고 말했고, “어머니의 배 속에서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원죄를 제거하는 침례(세례)를 주지 않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으리라!”라고 선언했다.일찍이 “신(新)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어거스틴은 구원받지 않은 이교도 철학자 “플라톤”(B.C. 427-347)을 극찬하면서 그를 “아프리카의 모세”라고 하는 등의 망발을 늘어놓았고, 플라톤의 철학에 노략질당한 그는 기독교와 철학을 접목시키는 가증스런 시도를 했다. 그러면서 금욕주의, 유아 세례, 연옥, 행위 구원, 풍유적인 성경 해석, 후천년주의 종말론, 천년왕국에 관한 영적 해석 등 로마카톨릭의 거짓 교리들 대부분을 신학적으로 정립했다. 특히 그가 쓴 책 <하나님의 도성>은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을 파멸로 이끄는 “열한 가지” 심각한 거짓 교리들을 담고 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는 문자적이지 않고 비유적이다. ② 그리스도인은 “성체성사,” 곧 “미사”를 행할 때 그리스도의 실제 몸을 삼킨다. ③ 외경과 칠십인역은 영감받은 책들이다. ④ 아담은 “혼”이 죽은 것이지 “영”이 죽은 것이 아니다. ⑤ 인간은 순교를 통해 둘째 사망에서 구원받는다(행위 구원). ⑥ 호세아 6:1,2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부활과 회복은 A.D. 33년에 성취되었다. ⑦ 요한계시록 20:11의 큰 백보좌 심판에 앉아 있는 부활한 성도들은 카톨릭 사제들과 감독(주교)들로서 현재 그들이 이교도들을 심판하고 있다. ⑧ 말라키 4장은 재림에 관한 구절이 아니고 최후의 백보좌 심판을 가리킨다. ⑨ 로마서 8:29은 부활할 때의 최종 상태가 아니라, 현 교회 시대에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성장을 지칭한다. ⑩ 물 뿌리지 않은 유아들은 창세전에 선택받은 유아들이 아니기에 죽으면 지옥에 간다. ⑪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매주 일요일 로마카톨릭의 미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한 조각씩으로 나타나다가, 종국에는 완전한 몸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으니,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신정 국가’를 세워야 한다. 그 일을 교회를 통해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의 도성”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 있는 “로마”였다. 결국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불의한 결탁을 가져왔고(교회 국가), “이단 사냥”이라는 미명 아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피의 대학살”로 이어졌다. 특히 “침례에 의한 중생”과 “유아 세례”도 이런 대학살에 한몫했는데, 결국 어거스틴은 이 거짓 교리를 통해 수많은 성도들을 죽인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수십만 명의 성도들이 살해된 궁극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 그를 신뢰하고 따르는 12억 명의 카톨릭교도들도 하루하루를 “지옥행 대기자”로 살아가고 있다.
“침례에 의한 중생”의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그 근거로 자주 인용하는 말씀은 “사도행전 2:38”이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이 구절에서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for the remission of sins]... 침례를 받으라.』라는 말씀에 유념해야 하는데, 죄들을 사함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곧 죄들을 사함받은 것 “때문에” 침례를 받으라는 말씀인 것이다. 말하자면 “for the remission of sins”에서 전치사 “for”는 “목적”이 아니고 “이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이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단어를 “목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이단 교리”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를 지지하기라도 하듯, 변개된 개역성경은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로 번역함으로써 “죄 사함을 ‘얻기 위해’ 침례(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변개시켰다. 개역개정판 역시 마찬가지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을 흉내 내고 개역성경 및 개역개정판과 타협하다가 어중간한 번역이 되어 버린 정동수의 “흠정역” 역시 그런 식으로 변개함으로써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이단 교리에 동조하고 말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다시 말해 “죄들의 사면을 ‘얻기 위해’ 침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동수가 영어 “for”와 그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είς)의 용례를 정확하게 구분할 줄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오류이다. 사실 정동수는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헬라어 학자들(G. 키텔, A.T. 로버트슨 등) 역시 동일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에는 “for the remission of sins”라는 표현이 총 다섯 번 나오는데(마 26:28, 막 1:4, 눅 3:3, 행 2:38, 롬 3:25), 전치사 “for”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είς)가 다섯 구절 중 “네 구절”(마 26:28, 막 1:4, 눅 3:3, 행 2:38)에서 일관되게 사용되었고, 나머지 “한 구절”(롬 3:25)에서만 헬라어 “디아”(διὰ)가 사용되었다. 기본적으로 헬라어 “에이스”는 “안으로”의 뜻을 비롯하여 “위하여”(목적), “인하여”(이유)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디아”는 “동안에”(기간), “통하여”(도구), “인하여”(이유) 등의 용례로 사용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디아”에는 “위하여”(목적)의 의미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영어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은 헬라어 “에이스”가 사용된 “네 개의 구절”(마 26:28, 막 1:4, 눅 3:3, 행 2:38)과 헬라어 “디아”가 사용된 “한 개의 구절”(롬 3:25)을 모두 전치사 “for”로 번역했다. 특히 로마서 3:25에서는 헬라어 “디아”를 포함한 “헬라어 구문 전체”가 나머지 네 개의 구절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지만, 영어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은 다섯 구절 모두를 똑같이 “for the remission of sins”로 번역했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헬라어 구문을 같은 의미로 인지하고 동일한 의미로 번역했음을 보여 준다. 곧 “목적”이 아닌(헬라어 “디아”에는 “목적”의 용례가 없음을 다시 한 번 주목할 것) “이유”의 의미로 번역한 것이다.
한편 “헬라어의 용례”뿐만 아니라 “교리적인 의미”로 보더라도 “목적”이 아닌 “이유”로 번역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 시대부터 줄곧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죄들을 용서해 오셨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도 “죄의 용서,” 곧 “죄 사함”은 있었다.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범법자가 결코 깨끗게 되지는 아니하리니 그 조상들의 죄악을 그 자손들과 그 자손들의 자손들 삼사 대까지 미치게 하느니라.” 하시니라』(출 34:7). 죄가 온전히 제거되거나 깨끗하게 되지는 못했을지라도 “죄를 용서받고 사함받는 일”은 구약 시대 성도들에게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는 이것이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마 26:2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거 구약 시대에 이미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십자가 위에 매달려 새 언약의 피를 흘리신 것이지, 죄들을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다. 만일 죄들을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면, 그분의 “피의 효력”은 구약 시대 동물의 피의 효력과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에서도 동물의 피를 통해 얼마든지 “죄들을 사함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의 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으니, “구속,” 곧 “죄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구약 시대에는 “죄 사함”(remission)이 있었어도 “구속”(redemption)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물의 피”가 지닌 한계였다.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범법자가 결코 깨끗게 되지는 아니하리니』(출 34:7).
바로 이런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계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용서하는 것은 물론, 죄를 온전히 깨끗하게 하고 제거해 버렸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 즉 “영원한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피로 한 번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느니라』(히 9:12).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새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 『이런 연유로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죄한 것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그 영원한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히 9:15). “죄 사함”을 위해 죽으신 게 아니라 “구속”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요한이 광야에서 침례를 주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막 1:4). 『그가 요단 강 주변에 있는 온 지방에 가서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눅 3:3). 침례인 요한은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구약에서 죄들의 용서를 받았으니) 회개의 침례를 받으라고 선포했다. 죄들을 사함받기 “위하여” 회개의 침례를 받으라고 선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선포하려 하심이요』(롬 3:25).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죄들을 사하셨기 때문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아 영원한 구속을 이루시고 그분의 의를 선포하신 것이다.
정동수가 흠정역을 번역할 때 하나님께서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헬라어와 전치사 “for”의 용례도, 죄 사함과 구속에 관한 성경적 교리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지한 자가 함부로 “할례받지 않은 손”으로 감히 성경 번역에 손을 댔으니, 교회들 안에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시므로(고전 14:33) 흠정역의 배후에는 혼란을 야기하는 마귀가 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침례에 의한 중생”을 가르치는 또 하나의 변개된 성경, 곧 “흠정역”을 통해 혼란케 하는 그가 속히 『베어져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2).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