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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에서 성취되지 않은 요엘의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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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2월호>
2:14-21 『그때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함께 일어서서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아, 이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으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지금은 겨우 세시니 너희가 짐작하는 것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니라. 이것은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바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들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으리라. 그러면 너희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 또 그 날들에는 내가 내 남종들과 여종들 위에도 내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하리라.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이적을, 아래로 땅에서는 표적을 보이리니, 피와 불과 연기라. 그 위대하고 찬란한 주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흑암으로, 달이 피로 변하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느니라.』본문은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난해한 부분 중 하나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주석가, 목사와 교사들은 요엘 2:28-32이 사도행전 2장에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되었으나 해가 흑암으로 변한다든지 달이 피로 변하는 현상들은 문자적으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예언은 “영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많은 학자들은 구약 성경의 대부분의 예언들, 특히 종말에 관한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고 영적으로만 믿게 되어,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계획하시고 이루시던 왕국이 사도행전에서 영적인 왕국으로 바뀌어 버렸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는 완전히 관계를 청산하시고 교회만을 다루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직면한 가장 강력한 보수주의 노선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L.R. 토마스는 존 칼빈, 알포드, A.T. 로버트슨, 유세비우스, 어거스틴, F.F. 브루스, 필립 샤프, 매튜 헨리 등의 “경건한” 신학자들을 모아서 이 지상에 있게 될 유일한 왕국이 사도행전 2장에서 요엘 2장의 성취와 더불어 시작되는 영적 왕국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경건하고 헌신되고, 성별된 보수주의 학자들”의 노선에 일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야 하고, 성경은 기록된 그대로를 뜻한다는 것을 믿지 말아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믿음을 저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의 육신으로 그런 군단(막 5:9)에 대항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스스로 진리를 드러내시는 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사용하고자 한다.
『너희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아...』(14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말하는 대상은 유대인이다. 그 무리 속에 그리스도인은 단 한 명도 없다. “거하는”이란 단어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명절 때 올라와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5절(『당시 예루살렘에는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머물고’ 있었는데』)로 볼 때 명백하다.
『지금은 겨우 세시니...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니라』(15절). 상습적인 술꾼은 이 구절을 사용해서 만일 13절의 “새 포도주”가 발효된 술이 아니라면 베드로는 이런 식으로 답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코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모르는 데서(마 22:29) 기인한 무지이다. 마태복음 25:26에서도 정확히 이와 같은 식으로 답변이 주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고소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다음에 그것을 근거로 그들에게 대답한 것이다.
『이것은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바이니』(16절) “이것”이 1-5절의 “방언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한다. 이런 오류가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살펴 보자. G.C. 모건은 6절의 “이것”과 12절의 “이것”, 16절의 “이것”, 33절의 “이것”을 나란히 연결시켰다. 그것은 좋은 시도였지만, 모건은 (존 R. 라이스처럼)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성경을 수평적으로 통독해야 함을 잊어버렸다. 그는 우선 “사사로운 해석”에 대한 경고를 받아들였어야 했다. 성경이 사사로운 해석을 금하는 것은 원래 “예언”(벧후 1:21)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부분에서 선지자 요엘의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구약의 2/3을 거부하는 “복음주의 개혁주의자들”이 파 놓은 근본주의의 흑암으로 빠져들기 전에, “이것은...말씀하신 바이니”가 요엘 2장의 성취라고 가정해 보자. 즉 요엘 2:28-32가 사도행전 2:17과 사도행전 2:18에서 성취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우리는 몇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1. 성령께서는 사도행전 2장 어디에서도 모든 육체에게 부어지지 않았다. 성령께서는 열둘(혹 120제자)만을 충만케 하셨을 뿐, 3000명의 개종자에게도 “부어지지” 않았으며, 사도행전 17:34의 개종자들에게도 부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성령을 선물로 받았지만(행 2:38,39) “부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 오순절 전후로 신약 어디에서도 “모든 육체” 위에 성령께서 부어지신 적은 없었다.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는 영으로 거듭났으며 “육신 안에” 있지 않다(롬 8:9). 성령께서는 거듭날 때 성도의 육신을 만지시지도 않는다(골 2:11-14). 왜냐하면 그것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할례이기 때문이다(롬 7:4,5).
3. 사도행전 2장에서는 아무도 꿈을 꾸지 않았으며(17,18절 참고) “그들이 예언하리라”는 말씀은 요엘 2:29에 없다.
4.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더 깊이 살펴볼 수 있다.
a. 사도행전 2,3,4,5,6,7,8,9장 등에는 어떠한 연기 기둥도 없다.
b. 사도행전 어디에도 해가 어두워지거나 달이 피로 변한다는 예언이 성취된 곳은 없다.
c. 요엘은 “시온 산”에서의 구해냄에 대해 말하고 있다(욜 2:32). 거기에는 성전이 있으며 그것은 “예루살렘 안에”(욜 3:32) 있다. 그것은 영적으로는 “소돔과 이집트”(계 11:8)로 불린다.
사도행전 2장뿐만 아니라 성경의 어떤 부분이든지, 가르치기 전에는 반드시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너무나 열심인 나머지 타당한 이유도 없이 “이것”(행 2:16)을 사도행전 2:1-5와 연결시킨다. 요엘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어디 있는가? 요엘은 요엘서 어디에서도 강풍과 갈라진 불의 혀들과 “다른 언어들”에 대해 예언하지 않았다.
날 때(거듭날 때)부터 우리의 습관은 우리의 신학 체계를 성경 본문에 맞추는 것이다. 교수들, 이단들, 칼빈주의자들, 세대주의자들, 근본주의자들, 목사들, 은사주의자들, 지옥이 없다는 사람들, 신유주의자들, 성경 학도들, 카톨릭 사제들, 신학자들, 그리스도인 유명인사들, 학자 연맹 등을 28년 간 상대해 온 경험을 종합해 보면, 자신이 가르치는 신학과 성경 구절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 구절을 억지해석하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주로 “헬라어 원문”에 호소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도 그것이 그럴 듯하지 않으면 한 구절에 한두 단어를 첨가시키거나 빼낸다. 이렇게 해도 말씀이 자신의 신학 체계로 바뀌지 않으면 그 의미가 애매한 구절을 들어서 의미가 분명한 구절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와는 달리, 요엘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베드로는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사도행전 1:16에서는 성경이 이루어졌다고 말했음에도). 그는 단지 “이것은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바이니”라고 말한다. 먼저 “이것”(this)이 마태복음 16:18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마태복음 16:18에서는 “이”(this)라는 단어가 “반석”(the Rock)인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인지(로마 카톨릭 교리대로), 아니면 “반석”(the rock)인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가리키는 것인지 혼동되게끔 사용되었다. 그러나 성경은(고전 10:2-4, 벧전 2:3-6) “반석”이 누구인지를 명백하게 말해준다. (반석은 베드로도, 그의 신앙고백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시몬 베드로의 “이것”(행 2:16)은 1-6절을 언급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그것은 뒤따르는 17-20절의 인용을 언급하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요엘이 말한 바를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겠습니다. 요엘이 말한 바는 ‘이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이것’은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바이니”). 베드로가 이스라엘을 향해 인용한 것은 사도행전 2:1-6의 사건이 일어날 것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요엘의 예언이 “마지막 날들”(17절)에 일어나리라는 것이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인 스템과 벌링거는 요엘이 이스라엘 국가를 향해 마지막 날들에 관해 쓰고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 2장은 “그리스도의 몸의 시작”을 언급하는 것일 수가 없다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앞에서 말한 사도행전 1:7이 다윗의 왕국의 회복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논리만큼이나 잘못되었다.
사도행전 2:1-6은 마지막 날들을 위한 준비이며, 그 일을 뒤따를 상황에 대해서는 구약의 수십 구절에서 묘사하고 있다. 대환란과 “주의 날”은 구약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주제이다. 베드로는 “‘이것들’(these)은 요엘이 말한 것의 성취”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만일 갈라진 혀들, 강풍, 다른 언어들을 요엘서 2장의 성취로 언급하고 있었다면 그는 “‘이것들’은 요엘이 말한 것의 성취”라고 했을 것이다. 사실 “다른 언어들”은 요엘서가 아니라 이사야 28:11,12의 성취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누가복음 23:34의 그리스도의 기도가 그들을 위해 응답된 후에 “두 번째 기회”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공회가 공식적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신명기 21:1-9을 성취하였을 것이다. 그런 후에 그리스도의 몸의 신비에 대한 계시없이 솔로몬의 노래 2:10-13, 이사야 26:19-21, 시 50:1-10의 휴거가 있고 나서 다니엘의 70째주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템과 벌링거는 사도행전 2장에서 아무도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오해한다. 실제로 사도행전 2:1-6은 요엘 2:28-32보다는 에스겔 39:29의 성취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이스라엘 집”만이 언급되고 베드로는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이 분명히 알 것은』(36절)이라는 말로 그의 메시지를 결론짓기 때문이다. 모건은(Ibid., p.55) “새로운 경륜”에 관해 말하면서 오순절은 “성령께서 모든 육체에 부어진 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모든 육체”에 부어진 예는 사도행전 어디에도 없다.
“위대하고 무서운 주의 날이 오기 전에”(욜 2:20)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요엘이 말한 바를 살펴보자.
1. “구해냄”은 예루살렘 밖에 있는 골고다(갈보리 산, 히 13:13))가 아니라 시온 산에 있는 도시(예루살렘)에서 있을 것이다.
2. 이때의 구원(행 2:21)은 “구해냄”(욜 2:32)의 형태였다.
3. 구원받게 될 사람들은 “남은 자”들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계시록 12:17, 스카랴 8:6,12, 스파냐 3:13, 아모스 5:15 등 많은 다른 구절에서 발견되는 “남은 자”와 정확히 같다.
4. 요엘 2:23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사도행전 2장과 연결될 수 없다. 요엘서에 따르면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첫째달에 내리며, 오순절은 둘째달 2주가 더 지나서 있다. 그러므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성령의 초림과 20세기에 일어날 “오순절의 부흥”을 뜻한다는 말은 성령께서 기록하신 말씀을 거슬르는 고의적인 거짓말이다.
요엘 2:23의 비는 “시온의 자녀들”(23절)에게 내리며 좋은 수확을 얻게 하기 위해(22,26절) 밀밭과 포도원에(24절) 내린다. 그 구절 어디에도 “이른 비와 늦은 비”(23절)가 오순절 동안이나 그 전후에 성령의 “부어 주심”과 연관된다는 말은 없다.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리겐과 교황들과 보조를 맞추어 왔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을 영적으로 해석하고는 자신들에게 적용시켰다(행 1:6주석 참고).
하나님의 성령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주실 때는 “그 후”(요엘 2:28)가 될 것이다. 야고보가 천년왕국 때 이방인들의 회심에 대해 말하고 있는 사도행전 15:16,17에서 이것이 어떻게 언급되고 있는지 주의해 보라. “그 후”는 그 주제(예를 들어 히 8:10)에 관한 모든 문맥을 볼 때 환란 이후이다. 불과 피와 “구름 기둥들”(욜 2:30)은 태평양, 원자폭탄만큼이나 문자 그대로의 뜻이 될 것이다. 요엘은 “그 날들에”(요엘 3:1,2) 이스라엘이 죄사함을 받고(redeemed) 회복될 것이라고(눅 1:68-79 참고) 말한다. 이 대환란의 마지막 날들에 수반되는 현상은 요엘 3:9-21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모든 “경건한”보수주의 학자들이 이같은 사실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요엘이 하나님의 성령으로(벧후 1:19-21) 말했던 만큼 확실하게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을 따르고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자가 되고자 한다면 말 잘하는 무천년,후천년 학자들의 무리를 따르라.(이들은 요엘 2-3장이 미래에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바울이나(갈 1:10) 예수 그리스도를(시 69:6) 따르고자 한다면 성경을 따르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우리의 권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책 중의 황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진리를 드러낼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1절). 주석가들은 종종 여기서 베드로가 “구원의 계획”을 설교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 구절을 로마서 10:13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죄인들을 다룰 때는 사도행전 4:12와 로마서 10:13을 사도행전 2:21과 연결시키고, 골로새서 2:12를 사도행전 2:38과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절에서 “건전한 교리”를 얻으려면 사도행전 2:21은 요엘서에서 인용한 것이며, 이 시점에서 요엘이나 사몬 베드로가 죄인들을 위한 피의 속죄와 영적 할례(골 2:11,12)를 알지 못했음을 인지해야만 한다. 그들은 “회개와 죄사함”(눅 24:47)을 요한의 침례(막 1:4와 행 2:38 비교)라는 관점에서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베드로가 코넬료의 집에 있었을때 그는 “죄들의 사함”이 믿음으로만 획득될 수 있음(행 10:45)을 알고 매우 놀랐다.
우리는 해당 구절의 단어나 문자를 단 하나도 변개시키지 않고 각 절의 문맥 속에서 절과 절을 비교함으로써 진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고전 2:13). 이것이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