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주석 분류
은과 금은 나에게 없으나
컨텐츠 정보
- 11,384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6월호>
3:1-11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니 모태에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한 사람이 실려왔는데, 이는 그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려는 것이더라.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 하는 성전 문에 내려 놓더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하더라.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주목하여 말하기를 “우리를 쳐다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더라.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나에게 없으나 내가 가진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으로 그를 잡아 일으키니 그가 즉시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서 뛰어 일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더라.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그가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하던 그 사람인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경이와 놀라움으로 가득 차더라. 고침을 받은 그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있을 때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서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불리우는 행각 안으로 그들에게 달려가니라.』본문의 처음 구절들은 사도행전 2:46 의 연장이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니』(1절)
사도들은 아직까지도 시편 5:7과 28:2에서 언급된 저녁 기도를 하러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다. [한편 다니엘이 기도했던 시간은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였다(단 6:10).] 1절에 “함께”(together)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조금 뒤에 베드로가 “우리를 쳐다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를 보라”고 말하는 데 더 익숙한 시몬 베드로에게 이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행 1:15 주석 참고). 그러나 여기 “하나가 되어”(one accord, 2:1,46)라는 말이 나온다. 잠재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묶여져 있는 것이다.
시기, 분쟁, 야망, 사소한 논쟁, 성격마찰, 거짓 정보 등으로 이 교제의 띠는 너무도 자주 방해를 받지만, 교제의 띠란 성경적인 것이다(엡 4:1-3). 그리스도인이 지역 모임(행 20:7)을 통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합류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설교하는 지역 모임에 속해 있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학교에 가지 않는 학생과 같으며, 부대에 합류하지 않은 군인이나, 오케스트라가 없는 연주자나, 경기를 할 팀이 없는 축구선수와 같다.
모리아 산에 있는 성전이 “더 아래에 있는 도시”보다 더 높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올라갔다.”
『아름다운 문』(2절).
“아름다운” 문에 대한 유일한 정보는, 그것이 헤롯 성전에 있는 아홉 개의 문들 중 하나이며 “고린도의 놋쇠”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요세푸스, <고물(古物)> XV. 11,3). 동쪽을 향해 있던 그 문은 성전 바깥에 있다. 더멜로우는 그 문이 “니카노의 문”으로 불렸으며 높이는 50큐빗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정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전적으로 세속적이다. 성경에 따르면 성전의 문들은 아홉이 아니라 열 두 개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태에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한 사람이 실려왔는데, 이는 그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려는 것이더라』(2절).
우리는 이 사건에서 몇 가지 영적인 적용을 해 볼 수 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묘사하는 가장 위대한 영적 진리들에 직면했을 때 노울링(렌돌, 브루스, A.T. 로버트슨, 래드와 마찬가지로)은 완전히 잠잠해진다. “영적 왕국”만을 다루며, 계시록 20:1-5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경멸하는 이 “영적인” 주석가들은 성경에서 영적인 진리들을 찾는 데는 너무나 “영적”이지 않다.
1. 죄인은 소망 없이 태어난다(시 51:5, 행 3:2).
2. 그 죄인의 어머니가 그 출생과 관계된다(욥 25:4, 행 3:2).
3. 죄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밖에 있다(계 22:15, 행 3:2).
4. 그는 영적 거지이다(막 10:46, 행 3:3).
5.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한다(행 3:5).
6. 그는 자신의 진짜 필요를 알지 못한다(행 3:5).
7. 구원이 돈보다 낫다(행 3:6).
8.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라도 입의 말을 통해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행 3:6).
9. 구원은 즉각적이다(행 3:7).
10. 새로 믿은 사람은 걸을 수 있기 전에 설 수 있어야 한다(행 3:8).
11. 뛰게 된 후에는 하나님을 더 잘 찬양할 수 있다(행 3:8).
12. 간증은 공개적이어야 한다(행 3:9)
13. 그의 말로 다른 사람들을 개심할 수 있게 해야 한다(요 4:29, 행 3:10 비교).
“영적 메시지”를 구해 오던 “영적인” 주석가들과 “경건한” 주석가들이 어떻게 해서 이 모든 것을 놓쳤는가?
노울링은 처음 다섯 구절에서 여섯 군데를 고치고는, “일어나”(6절)라는 단어에 와서는 그가 55페이지에 걸쳐 <킹제임스성경>을 고치는 데 사용했던 필사본 본문을 던져버린다. (여기서 노울링은 바티칸사본, 시내사본, D의 본문을 거부하고 A,C,E의 본문을 택하였다.) “일어나”라는 말은 밥 존스 대학에서 추천하는 NASV에도 없다. 그것은 NCCC의 공산주의 성경, 즉 공동성서(NRSV)에도 없다. 그 단어들을 거부한 헬라어 본문은 웨스트코트, 홀트, 네슬, 메츠거, 알란드의 본문이다.
<킹제임스성경>의 본문은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이 기록되기 200여 년 전에 기록된 글에서도 그 인용된 것이 발견된다.
노울링(Knowling), 해켓(Hackett), 래드(Ladd), 닐(Neal), 브루스(Bruce), 빈센트(Vincent), 로버트슨(Robertson), 커스터(Custer), 데이어(Thayer), 디엠(Thieme), 스펜스(Spence), 데이비스(Davis), 트렌치(Trench), 렘지(Ramsey), 메이어(Meyer), 하우슨(Howson), 알포드(Alford), 그리고 로크만 재단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최종권위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최악의 비평가들을 모아 성경을 고침으로써 그들의 생계를 유지할 뿐이다. 이런 거만한 “근본주의자들”을 제쳐 두고, 본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에 신실한 것을 축복하신다. 시편 55:17에 언급된 세 시간의 기도는, 재미로 말하자면, 오늘날 주 중에 갖는 수요일 저녁 기도 모임과 똑같을 것이다. 수요일 밤에 20-100명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보다 재미없는 일은 없다. 사실 이 기도 모임이 너무나 재미없기 때문에 그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요일의 모임은 설교 예배나 복음전파 형식의 예배로 변화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기도 모임”은 주일 저녁 예배의 축소판이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가장 작은 일”에 신실했고, 200명이 개심했다.
2.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할 권리가 있다. 만일 우리가 말하는 대로 우리가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에 의해 의롭게 되었다면,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성령의 인격으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죄없고 영원한 도성에 가게 될 것이라면, 자선금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세상에 제공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3. 이 시대의 구원은 즉각적이다. “기도로 번뇌”할 필요도 없으며(바울은 구원받은 후에 그렇게 했다-행 9:9,11),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분투할” 필요도 없으며, “끝까지 견딜 것”을 희망하며 “주의 손에 붙어 있을” 필요도 없다. 이 남자는 즉각적으로 힘을 얻어서 즉석에서 뛰었다. “그리스도 안으로 점점 자라나는 것” 같은 것은 없다. “교회 안에서 성장”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당신이 만일 구원을 받았다면 당신은 (죽어가던 강도처럼) 눈깜짝하는 순간에 구원받은 것이다. 어느 순간엔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때가 없었다면 그 사람은 개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사람의 기독교는 마태복음 23장과 누가복음 18:22의 기독교이다.
4. 걷기(9절) 전에 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서기 전에는(7절) 아무도 걷지 못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롬 5:6, 행 3:7)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주요 주석가들 중에서 아이언사이드, 켐벨 모건, 매튜 헨리는 독자들에게 영적으로 씹을 만한 것을 조금 준다. 그러나 가련한 코넬리우스 스템은(사도행전 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바울이 나타날 때까지 이스라엘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너무 애쓴 나머지 전체 구절(1-11절)을 이스라엘에게 적용시키고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실제적 적용도 하지 않는다. “한 거지와 한 국가”(A Beggar and a Nation)라는 제목 하에서 스템은 개인적인 적용은 전혀 하지 않고 전체 구절을 교리적으로만 적용한다.
“자기의 걸음을 살피는” 조심스런 독자라면(잠 14:15) 그 거지는 이스라엘의 유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은 “모태에서부터 앉은뱅이”가 아니었다. 구절의 의미로 볼 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옮겨져서 어딘가에 놓여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성전 밖이 아니라 성전 안에 있었다(히 3:10,11). 이스라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아무것도 구걸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사도들을 바라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의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마 17:5).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마 10:40) 등의 구절들도 목적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그때 사도들은 가정마다 방문하는 순회 복음전도자들이었으며, 아무도 그들로부터 무엇인가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국 복음이 환란 때 이스라엘에게 전파될 때 이스라엘은 즉시로 “뛰지” 않는다. 지상 지옥이 3년 반 동안 펼쳐진 후 재림 때까지 이스라엘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는 아무도 설교할 수 없는 때이다(슼 13:1-4).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시작된 곳을 올바로 찾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루는 비유도 엉뚱한 곳에 적용한다. [성경은 절반, 아니 3분의 1, 3분의 2, 10분의 9만 공부하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책이다. 성경은 하나의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공부해서 특정한 세대를 교리적으로 다루는 몇몇 구절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는 행각...』(11절)(요 10:23 참조). 아마도 이것은 이방인들의 뜰의 동쪽편에 있었을 것이다(요세푸스, <고물(古物)> XX. 9,7). 그 행각은 아마도 열왕기상 5,6,7장에서 솔로몬이 건축한 것이 폐허가 된 후 그것을 다시 건축한 것일 것이다.
3:12-15 『그것을 보던 베드로가 그 백성에게 대답하기를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히 여기느냐? 마치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어찌하여 우리를 주시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었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심하였는데 너희가 빌라도의 면전에서 그를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그를 넘겨 주었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심하였는데 너희가 빌라도의 면전에서 그를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신 분이며 의로우신 이를부인하고 도리어 살인자를 놓아 주기를 구하였도다. 너희가 생명의 창시자를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들이라』
12절의 내용은 많은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자기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이 되었다. 그는 나이 40이 넘은 불구자를 치유해 준 공을 차지하기를 분명하게 거부한다. 한편 이 부분의 문맥은 2:22과 마찬가지로 유대인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12절).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유대 민족을 향해 또 한 번 연설을 한다. 여기서부터 3장 끝까지 죄인 개개인의 죄들에 대한 피의 속죄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의 아들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3절).
이것은 누가복음 7:39과 계시록 5:12에서 언급된 영광이며, 누가복음 24:26에서 다시 한 번 언급되었다. 이것을 “그의 영광의 보좌”(마 25:31)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 보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막 8:38), 그리고 자기 자신의 영광(마 25:31)으로 오실 때 앉으실 보좌이다. 시몬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지극히 큰 영광”(벧후 1:17)은 한 장소로, 골로새서 3:4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이 장소는 그 표현이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의 장소이거나 하나의 사건이거나 하나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일”을 말하기도 한다(요 12:27,28 참조). 로마서 9:4과 마태복음 4:8에서는 또다른 뜻으로 쓰였다. 이렇게 다양한 뜻을 가진 말을 가지고서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를 신봉하는 성경 거부자들은 하늘의 보좌(행 2:33)와 다윗의 보좌(행 2:30)를 혼합해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재 위치는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도, “그의 영광의 보좌에” 계신 것도 아니다. 그분의 현재 위치는 계시록 1:14-17과 마태복음 17:2에서처럼 영화롭게 된 상태이다.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심하였는데...』(13절).
예수님을 놓아주기로 했던 빌라도의 결심은 그가 그리스도께서 박해받으시는 이유를 알았다는 사실(막 15:10)과, 그리스도께서 무죄하심을 세 번이나 선언한(요 18:38; 19:4,6)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그의 인격적 결함으로 실행되지 못하고 만다(막 6:26에서 헤롯이 겪는 딜레마를 참고할 것). 세상과의 우정을 유지하고자 애쓰면서(요 9:12) 그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뜻에 넘겨준 것이다. 빌라도는 이중인격자이다. 가시적인 기사와 표적을 인정하는 양심의 소리는 헤롯이나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심하게 화인 맞은 탓에 진리가 그 덴 자리를 대체할 수가 없었다. 빌라도, 헤롯, 사울, 펠리스, 아합, 아그리파 등은 모두 진리를 직면했고, 진리로 찔림을 받았고, 진리로 동요하기까지 했음에도 진리에 복종하지 않은 대표적인 예들이다.
『...거룩하신 분이며 의로우신 이를...』(14절)
『... 생명의 창시자』(15절).
여기서 시몬 베드로는 통쾌한 설교를 한다. “너희가 그를 넘겨 주었고”(13절), “너희가...그를 부인하였으니”(13절), “너희가 거룩하신 분...을 부인하고”(14절), “너희가...살인자를 놓아주기를 구하였도다”(14절), “너희가 생명의 창시자를 죽였으나...”(15절). 사람들이 놓아주기를 원했던 쪽은 바라바였다. 그들은 생명을 앗아간 자를 정당화시키고 오히려 생명을 주시는 분을 정죄했다(잠 29:27).
『그의 이름을 믿음으로 인하여 그 이름이 ...』(16절).
사도행전 3:6의 주석을 다시 한 번 보면 수많은 학자들이 “이름으로”(6절)를 설명하면서 앉은뱅이를 즉석에서 일으킨 그 이름을 제거하려 한 것을 볼 수 있다.
『...정녕, 그를 통하여 나온 믿음이 이 사람을...온전하게 치유한 것이라』(16절).
그 사람이 그 이름(16절)을 믿었던 믿음은 그가 믿은 분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 2:20과 에베소서 2:8,9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이 세 구절 모두가 영어 본문에서 명백하게 일치하는데도, 보수주의 학자들은 그 구절들을 가지고 온갖 오류를 만들어낸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