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사도행전 주석 분류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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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5월호>

2:37-4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기를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찌하여야 하리이까?”라고 하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한 것이며, 또한 먼 곳에 있는 모든 사람과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실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이라.”고 하더라. 또 여러 가지 다른 말로 열심히 증거하고 권고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이 사악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고 하더라. 그러자 그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은 침례를 받더라. 그리하여 그 날에 약 삼천 명의 사람이 더 늘었더라. 그들이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와 교제, 빵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데 전념하더라.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임하였으며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적이 행해지더라.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으면서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쓰며 또 자기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더라.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하나가 되어 꾸준히 성전에 모이며, 또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떼고, 즐거움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더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그 교회에 날마다 더해 주시더라.』


천년주의(30,34절), 무천년주의(16-20절), 오순절파(1-12절)라는 기독교계의 가장 커다란 이단들을 다루었지만, 우리는 이제 이 장을 지나기 전에 또 다른 이단교리와 부딪쳐야 한다.
그것은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이단교리이다. [사도행전 2장은 갈라디아서 3장처럼, 자기 의를 내세우는 죄인과 정서적으로 불안한 그리스도인, 모든 성경을 은유적으로 푸는 철학자, 성경을 부인하는 인본주의자, 지적으로 왜곡된 신학자, 그리고 미혹당한 학자들의 보금자리이다.]

『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37절). 이 단어는 칼이나 창으로 찔려서 생긴 상처를 묘사하는 것으로, 히브리서 4:12과 짝을 이룬다. 사도행전 9:5에서 이 구절과 연결되는 단어가 A.T. 로버트슨 박사와 밥 존스 대학이 추천하는 성경(NASV)에는 삭제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는 훌륭한 참조 구절을 잃어버리게 된다. “찌르다”는 말은 두 구절 모두에서 무엇인가에 찔린 양심을 말하고 있다. “그들의 머리”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37절)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찌 하여야 하리이까?』(37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기서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즉 이 구절은 구원을 위한 교리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통치자에 관한 민족적인 메시지를 전해들은 사람들이다. 사도행전 2장에는 “구원의 계획”이 나오지 않으며, 적어도 사도행전 8-28장에서 설명되는 것과 같은 구원의 계획은 없다.
사도행전에는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이 나온다.
1. 이스라엘 - 『우리가 어찌 하여야 하리이까?』(행 2:38)
2. 회심한 죄인 -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행 10:30)
3. 구원받지 않은 이방인 -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행 16:30)
이 세 가지 질문 중 앞의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물 침례”이고, 그 두 질문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38절).
지난 18세기 동안 사도행전 2:38은 중생의 수단으로서의 물침례, 은혜의 매개체로서의 물침례, 구원에 필수 요건으로서의 물침례, 죄사함의 필수 요건으로서의 물침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여기에서 말하는 침례 또한 마태복음 28:19,20에서 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2세기의 이레내우스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교도에게 세례를 주고, 세례가 요한복음 3:5의 성취라고 생각하게 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이 구절은 또한 모든 오순절주의자들이 설교해 왔던 구절이며, 또 이 구절은 1800년 이후로 알렉산더 캠벨과 그의 추종자들이 붙들어 온 교리적 중심이었다. 아마도 마태복음 7:1,12를 제외하고, 성경에서 다른 어떤 구절보다도 사도행전 2:38을 근거로 해서 지옥에 가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도행전 2:38은 하나님께서 선정하신 통치자를 살해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율법 아래 있으며, 조개나 돼지고기나 메기나 게를 먹지 않는 유대인들이다.
사도행전 2:38은 규례들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기 의를 내세우는 죄인들의 출발점이 된다. 이런 의식주의적인 체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캠벨추종자들이 어떻게 로마서 8:2을 왜곡시키는지 살펴보자. 캠벨추종자들에게 있어서 구원 받는 방법은 다음의 것들을 포함한다.
1. 회개
2. 믿음
3. 고백
4. 침례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반대하여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마귀도 회개하고 믿고 고백하고 침례받을 수 있다(마 10:1; 27:3, 요 6:70,71). 그러고도 그는 하늘 대신 끝없는 구렁으로 갔다.
2. 파라오와 발라암도 회개했지만 바깥 흑암으로 갔다(벧후 2:15-17, 유 11,13절, 롬 9:18).
3. 마술사 시몬도 “믿고” 침례를 받았지만 성령의 선물을 받지 못했으며 신약적 의미의 구원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캠벨추종자들은 침례받은 성도들도 구원을 잃어 버릴 수 있다는, 로마 카톨릭과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즉 시몬이 구원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로마서 8장, 요한복음 5:24, 요한복음 10:27-30, 고린도전서 1:7,8, 데살로니가전서 5:23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입장을 취하고 난뒤, 믿고 침례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다시 침례받지 않고 구원받는가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자들이다.
4. 코넬료와 그의 집안 사람들은 침례받기 “전에”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행 11:7-15 참조).
5. 파라오와 유다는 “고백”했지만 둘 다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사도행전 2장에서 어떤 사도도 사도행전 2:38에 따라 침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열두 사도는 모두 누가복음 3:4-16에 따라 침례를 받았으며, 그들 모두는 사도행전 2:1-5에서 자동적으로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그 일이 있은 지 3년 동안 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본문은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는 사용될 수 없으며, 침례는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물로 침례를 받지 않으면 “성령의 선물”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행전 10:44-47에서 믿을 때에 성령이 임하게 될 때까지 과도기적인 기간에 펼쳐졌던 일시적인 해결책이었을 뿐이다. 본문에서는 침례받은 이후에 성령의 선물이 임했으나 10장에서는 침례받기 이전에 성령께서 임하신 것이다.
죄사함과 관련해서 성경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을 주목하라.
1.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막 1:4)
2.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마 26:28)
3.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롬 3:25)
4.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행 2:38)
이것들 중에서 “인하여”(for)가 “때문에”(because of)라는 의미 말고 다른 뜻으로 쓰인 것이 있는지 보라. 없다.
창세기 4:1-4부터 요한복음 1:29사이의 기간에는 죄들이 “사해졌으며”(remitted, 이것은 일시적으로 덮는 것을 의미한다), 죄들은 황소와 염소의 피를 근거로 용서되었다(히 10: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렇게 말씀하셨다(출 34:7). 헬라어 학자들은 “사함”(remission)을 “구속”(redemption)으로 오해했으며, 히브리서 9:22을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피로 적용시키는 바람에 히브리서 9:22의 피는 율법에 따른 것임을 잊어버렸다. 신약 어디에도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가 하나님께서 죄들을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로 쓰인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점에서 죄인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1.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막 1:4)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용서하셨다. 이스라엘의 집행유예 기간은 끝났고 메시야가 오고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이 회개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고 물 아래로 가야 했던 것이다.
2.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마 26:28)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죄들과 불의”를 용서해 오셨다. 그러나 그 죄악은 결코 깨끗케 되지는 못하였다(출 34:7). 이제 과거에 “사함받은” 이 죄들은 깨끗하게 되고 구속되어야(히 9:15)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사실과 연관해서 자신의 피가 흘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셔야 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불완전한 근거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히 10:4)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오신 것이다!!(요 1:29 참조)
3.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롬 3:25)
이 말의 의미는 문맥 안에서 너무나도 완전히 설명되고 있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킹제임스성경>에는 그 구절이 다른 구절들과 연결된다. 여기서 만일 헬라어 단어의 뜻만을 지나치게 고수한다면(행 2:2을 볼 것) 진리의 계시를 놓칠 것이다. 죄인이 공정한 댓가를 받았던 구약에서 죄들을 사하신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었다. 이해가 안 간다면 사무엘하를 읽어 보라. 다윗은 용서는 받았어도(시 32:1-5; 130:4; 103:3) 죄에 대한 댓가는 치렀다.
4.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행 2:38)
이 문제에 관해 다른 해답은 전혀 없다. 성경 스스로가 독자들에게 진리를 제시한다. 모든 참조 구절들을 볼 때 “for”는 “그것들이 이미 용서되었기 때문에”로 정의된다.
이 구절에 대한 알렉산더 캠벨의 해석은 완전히 빗나갔다. 성경 어디에서도 “죄들을 사함 받기 위해 침례받는 것”을 말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심지어 아나니아도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죄들이 용서함 받기 위해 물침례에 의존한다면(어떤 사람들은 또 침례를 세례로 바꿈으로써 혼란을 가중시킨다.) 골로새서 1:14로 가서 로마서 5:4의 의미를 알 때까지 거기 숨어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한 것이며, 또한 먼곳에 있는 모든 사람과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실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이라』(39절).
우리는 아직 중요하고도 위험한 부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R.A. 토레이와 존 R. 라이스는 이 구절을 가지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은 후에 “능력의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다. 즉 39절의 말씀이 사도행전 2:38과 침례에 의한 중생 등 앞의 모든 내용들이 “회개”하고자 하는 모든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을 위한 신약 교리로서 확증해 준다는 것이다.
아담 클라크는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에베소서 2:8-10에 의해 구원받고 물침례를 받기 전에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을 말한다고 주장한다(행 10:44-48 주석 참조). 그러나 이것은 (주의 기도에서 “우리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의 명명법임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현재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골 1:2),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온 집”을 향해 막 연설을 마친 후에 (그리고 “그들이” 그의 말에 반응했다. 37절) 나오는 “우리 하나님”은 분명히 유대인에게 해당되는 명칭이다.
‘영적인 적용’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교리적으로 “우리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성경 용어이다(느 4:4,9,20, 시 94:28; 115:3; 116:5, 단 3:17, 슼 9:7).
다니엘 9:7의 단어들이 오순절 메시지의 상황과 이름, 장소, 사람들, 배경과 일치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 “유대 사람들”
2.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
3. “온 이스라엘”
4. “먼 곳에 있는”
5. “모든 나라”
그런데 어떻게 39절을 “먼 곳에 있는” 구원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만일 “먼 곳에” 있다면 이방인들은 그 약속을 받기 위해 물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약속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는 흘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며, 그들은 오순절에 사도행전 2:6-11에 나열된 지역들로부터 온 사람들이다.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침례를 받더라... 교제... 기도... 함께... 날마다... 꾸준히... 즐거움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41-47절).
사도행전 2장의 배경은 유대인과 연관되어 있으며, 오늘날의 “신약 교회”는 재산과 소유물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44,45절 참조, 만일 현재에도 재산과 소유물을 공유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개인적 경험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민족적 경험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역 교회를 위한 참으로 아름다운 “영적 적용”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며(41절), 진리를 받아들인 후에 침례를 받아야 하고(41절), 계속해서 서로 교제해야 하며(42절), 함께 기도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42절). 여기서 더 나아가 함께 만나야 하고(44절), 함께 나누어야 하며(44절), 단지 주일만이 아니라 매일 증거해야 한다(46절). 꾸준히 하나님을 찬양하고(47절) 기뻐하며 물질적 축복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46절).
여기서 신약의 기독교가 태동한다. 그것은 아직 바울에게도 계시되지 않았고, 그 뿌리는 여전히 유대의 민족적, 종교적 생활 속에 깊이 내재해 있지만, 본문의 “초대” 교회는 부활 이후의 “지역 교회”이다. 지역 교회는 오순절 전에 시작되어 1978년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사도행전 2장의 지역 교회 역시 중생한 죄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오늘날 구원받은 죄인들이 물로 침례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물로 침례를 받았다. 아직까지는 의롭게 됨이나 구속의 위대한 진리가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았음에도 성경적 기독교의 원리들과 태도들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 첫 번째 구성원들을 받아들였다. 십자가 사건 전에 있던 지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유기체가 되었다. 성전 경배가 여전히 존재하지만(46절), 그것은 머지않아 달라지게 된다(행 8:1-4). 사도행전 15장에서 구원받은 유대인들이 성전 경배의 외적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증거를 위해서였으며(고전 10:29), 바울 역시 같은 식으로 말했다. 아직까지는 그리스도와 모세의 사도적 표적들이 존재하며(43절), 사도들의 “교리”는 사도행전 1:3에서 발견되는 40일 간의 개인 지도까지 포함해서 창세기부터 말라키까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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