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주석 분류
주님의 마지막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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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1월호>
1:6-9 『그러므로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주께 물어 말씀드리기를 “주여, 그 때에 이스라엘에 그 왕국을 회복하시겠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는 그 때나 시기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셨느니라.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니라. 주께서 이런 일들을 말씀하신 후에 그들이 보는 데서 위로 들려올라 가시니 구름이 그들의 시야에서 주를 가리더라. 주께서 올라가실 때에 그들이 하늘을 주시하고 있는데, 보라,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말하기를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올라 가신 이 예수는 너희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더라. 그후에 그들은 올리브 산이라 하는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다닐 수 있는 거리더라. 그들이 들어 가서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거기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와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 시몬과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머물고 있더라. 이들 모두가 여인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주의 형제들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기도와 간구에 전념하더라.』이제 우리는 오만하고 비판적인 마음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자들을 위해 성령께서 장치해 두신 첫 번째 ‘덫’을 만나게 된다. 사도행전에는 10개 정도의 ‘덫’이 나온다.
1. 사도행전 1:6 - 구약의 약 1/8의 성취를 다루는, 주의해야 할 구절.
2. 사도행전 2:16 - 요엘서의 인용. 그 즉시의 상황에 적용되지 않음에도 증거 구절로 인용됨.
3. 사도행전 3:19 - 이스라엘의 문자적, 영적 회복을 믿지 않는 학자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함정.
4. 사도행전 7:43 - 오늘날 이스라엘이 사용하는 국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그것을 마귀적이라 칭함.
5. 사도행전 13:48 -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제한된 속죄”를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
6. 사도행전 14:13 - 우주에서 온 방문객들과 제사장들 사이의 유대를 암시.
7. 사도행전 15:16 -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한 약속들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자를 위한 “죽음의 코너”.
8. 사도행전 17:22 -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대학원생의 얼굴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는 이중으로 장전된 엽총.
9. 사도행전 19:35 - 우주에서 온 방문객들은 여자 배우자를 갖게 될 것이다!
10. 사도행전 20:28 - 하나님께서 ‘피’를 가지고 계시다는 명확한 진술.
『그러므로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6절). 그들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함께 모였지만(4절 참고), 이번에는 특별한 날에,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히 모여 있는 것이다(『...그들이 보는 데서 위로 들려올라 가시니...』, 9절). 그 시기는 그들이 마가복음 16:14-19의 명령과 마태복음 28:19,20의 명령과 누가복음 24:45-49의 명령을 들은 때였다. 이 점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제 곧 살펴보겠지만, 주석가들은 “주여, 그 때에 이스라엘에 그 왕국을 회복하시겠나이까?”라고 물은 제자들의 질문이 ‘무지중에’ 한 질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대인 사도들은 왕국에 대해 너무나도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개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새롭게 된(마19:28) 지상의(사11:1-11) 예루살렘(마25:31)에서 다윗의 보좌(행2:30)에 앉아 야곱의 집(눅1:32)을 다스리는 메시야의 왕국인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에서 그리스도와 유대인 왕국에 연관된 구절들의 올바른 의미를 배웠다(눅24:45). 구약의 저자에게서 개인 교습을 받은 후에 어찌 그리 어리석은 질문을 했겠는가?(벧전1:10,11 참조)
『“그 때에 이스라엘에 그 왕국을 회복하시겠나이까?”』(6절)라는 질문은 유대인 제자들이 유대인 메시야에게 했던 가장 논리적이고 성경적인 질문이다. 같은 저자(누가)는 누가복음 1장에서 그 문제를 매우 분명하게 다루고 있다. 『... 또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실 것이며 그는 야곱의 집안을 영원히 통치할 것이요 그의 왕국은 무궁하리라』(눅1:32,33). 『우리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대로』(눅1:73).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은 구약의 500구절 이상이 다루고 있는 너무나도 중요한 주제이다. 더구나 “너희에게는 그 때나 시기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요...”(7절)라는 대답은 이 질문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증”하는 것이다. 주님은 “너희는 잘못 질문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다시 왕국을 회복시켜 주시지 않으실 것이다.”라든지 “왕국의 영적 상태를 너희가 아직도 모르는구나.”라고 대답하시지 않으시고, 다만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기다리라!”고만 대답하셨다.
90% 이상의 주요 주석가들이 이 뜻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실제적인 “천국”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이 두 나라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사도행전 7장까지는 휴거와 7년 환란(단 9)을 준비하면서(시 50, 사 26, 솔 2) 구약이 성취되는 중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사도행전 1-7장에서 그 문제는 엘리야의 예언 성취와 더불어(마17:11) 진행되어 가고 있었고, 적그리스도는 구렁에서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계17:8), 모세는 미카엘이 나팔을 불자마자(단12:1,2) 튀어나와(말4:4,5) 설교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회가 나타나기 이전에 초림과 재림 사이가 이렇게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교육을 받은 학자라도 사도행전 1-7장의 신비를 풀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은 다윗의 보좌에 계시지 않는다. 주님은 지금 아버지의 보좌의 “오른편”(히12:2, 행2:33)에 앉아 계신다. 많은 주석가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영광의 보좌”(렘14:21)와 셋째 하늘에 있는 보좌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가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8절). 이스라엘에게 하신 왕국에 관한 약속들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두 가지 사항 사이에 대립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땅 끝까지”)이 이스라엘 왕국의 축복에 동참하리라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주제가 구약에서 너무나 많이 나오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에 관한 구절들을 별 어려움 없이 교회시대로 가져올 수 있었다(롬15:9,10,11,12; 9:25,26,27,28; 10:20,21 참조, 사도행전 15:14-16 주석 참조).
이러한 구절들은 구약성경에서 왕국의 축복에 참여하는 이방인들의 모습이 바울에게 교회가 계시되면서 교회가 갖게 되는 영적인 축복으로 바뀌어 적용된 구절들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모든 구절들을 교회로 가져온다. 그러나 구약의 이방인 왕국의 축복이 교회로 연결된 것은 부분적이고 또 일시적인 것이다. 교회시대가 끝나면 다시 구약에서 예언한 대로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왕국의 축복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 코넬리우스 스템은 사도행전 1:18이 우리가 위탁받은 사항이 아니라고 말한다. 스템은 마태복음 28:19이나 누가복음 24:47은 우리가 실행해야 할 명령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스템에 의하면 우리가 위탁받은 것은 고린도후서 5:18 뿐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 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스스로 우리와 화해하셨고 화해의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으니』(고후5:18).
그가 말하는 것은 사도행전 1:8이 유대인에게 주어진 왕국의 위탁사항일 뿐 교회와는 관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9장 이후이기 때문이다(그들 중에는 교회의 시작을 사도행전 28장 이후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들은 물침례도 교회시대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사실인 것 같지만, 마가복음 16장, 마태복음 28장, 누가복음 24장, 그리고 사도행전 1장의 4개의 위탁사항과 바울 자신이 기록하고 실천했던, 바울이 위탁받은 것 사이의 “틈”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바울은 “뒤따르는 표적”(행19:6)과 함께 마가복음 16장에 따라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즉 바울은 마가복음 16:18의 명령을 성취시킨 것이다. 그는 열 둘 가운데 뱀을 집은 것으로 기록된(행28:4) 유일한 사람이다. 또한 바울은 마가복음 16:15에서 명령한 대로 “전세계”에 가서 자기 자신의 증거처럼(행20:26)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회개와 죄사함”을 전했으며(눅24:47), 그것은 바울이 “몸의 신비”(행20:21)에 대해 알았다고 한 오랜 후에 명확한 용어로 설명된 것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26:17에 따라 모든 민족을 가르쳤는데(마28:20), 물론 주께서 사람들에게 침례를 줄 목적으로 그를 보내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침례를 준 것은 분명하다(행16,17,18,19).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찢을” 뿐이다. 그들은 말씀을 찢어 놓기만 할 뿐,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하는 것이 없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상명령”을 교회에게 가려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탁받은 것은 지옥이 꽁꽁 얼어붙을 때까지 진리, 온전한 진리, 진리만을 설교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의미에서 주 예수를 증거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통치하러 오실 유대인 메시야로서의 그의 사역도 증거해야 한다. 이것은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하신 그를 증거해야 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고린도후서 5:18-21과 조화를 이루는 반면 누가복음 1:30-34과 조화를 이루는 구절도 많이 있다. 우리는 가정(예루살렘), 이웃(유대), 도시 전체(사마리아), 나라 전체(지구의 끝)에서 그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명령은 시작하라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으실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교사역은 필수적이고, 명령이며, 일차적이고, 섭리적이다. 우연이거나 선택적, 부차적,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땅 끝까지』(8절).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말을 해서 전파하는 데 느렸기 때문에 산헤드린이 그들을 후원해 주어야만 했다(행8:1)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결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사도행전 1:8의 명령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것은 “용기부족”과 “지상명령에 대한 충실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코넬리우스 스템은 제자들이 왕국의 수립을 기다리기 의해 예루살렘에 머물렀다고 말한다. 그는 사도행전 1:8의 명령은 은혜 이전의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을 위한 지상명령(Great Commission)이며, 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사도행전 8:1로 보아도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나가서 전파해야 했다. 마태복음 10장의 명령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왕국을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갈보리를 전후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느 세대에 있는 누구에게도 예루살렘에 머무르라는 명령은 내려지지 않는다. 제자들은 이 명령을 수행했는데, 베드로는 7-20년 후에 카이사랴와 바빌론에서 설교를 했고, 그때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리스도께 돌이키지 않은 상태였으나(마태복음 10장에서는 그들이 불신과 박해에 직면하리라고 진술하고 있다.) 사도들은 사마리아(행 8)와 “땅 끝”까지(바빌론!, 벧전5:13) 가게 된다.
『...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8절). 교리적으로 이 구절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 구절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필요한 땅 위의 어떤 성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교리적 적용(딤후 2:15)에만 성경을 제한시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잘못 나누는 것이다.
『주께서 이런 일들을 말씀하신 후에 그들이 보는 데서 “위로 들려올라 가시니”...』(9절). 이 글의 저자는 공인 의사였다. 그의 문체는 그가 당시 최고 수준의 학식을 가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같은 저자가 누가복음에서 같은 사건을 기록할 때에도 『주께서...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니라』(눅24:51)고 말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니라”는 부분은 NASV와 RSV에서 빠져 있다. 원문비평학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저자의 문체에 가장 잘 맞는” 본문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승천을 말하고 있는 본문에서는 저자의 문체를 제쳐 놓고(그들의 최고 권위인 바티칸사본마저 제쳐 놓고) 이 부분을 삭제시켜 버렸다. 그러나 본문은 여러 필사본에서 증거되며, 특히 시내사본이나 바티칸사본보다 오래된 파피루스 75에서 강력히 증거된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에서 “...그들이 주를 경배하고”(눅24:52)도 NASV에서는 빠져 있으며, 많은 새 번역본들과 <공동성서> 등에도 빠져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의 절대적 권위”나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과 “믿을 만한 번역본들” 등을 여전히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공격한다(눅 24:52).
『...너희를 떠나 하늘(헬라어 : 우라누스)로 들려올라 가신 이 예수는 너희가 하늘(헬라어 : 우라우스)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NASV는 첫째 하늘을 “sky”로 번역했고, 둘째 하늘은 “heaven”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1:9,10에서 “sky”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heaven”이 그를 받아들였다(행3:21).
『... 이(same) 예수는... 그대로 오시리라...』(11절). “그대로”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의 상황이 초림 때의 상황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1. “같은” 나라가 권력을 잡을 것이다. - 로마
2. “같은” 사람들이 그 땅에 있을 것이다. - 유대인
3. 세계적 언어가 쓰일 것이다. - 그때 당시는 헬라어
4. 주께서는 셋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 그리고 첫째 하늘로 “내려오실” 것이다(고후12:1-4). 그는 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다(계1:7).
5. “흰 옷을 입은...두 사람” -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할 것이다(요한계시록 주석 참조, 계11:3-8).
6. 이 “같은 예수”는 글자 그대로 “위로”(up) 올라가신 것처럼, 글자 그대로 “아래로”(down) 내려오실 것이다. 우주시대의 과학자들에게는 위아래의 절대 구분이 없는 것 같지만 성경은 북극성이 “위”이고 그 반대가 “아래”라고 말한다.
사탄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 오실(눅4:9) “방향”을 알았다. 그는 “만나”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도 알았다(요한계시록 12:14 주석 참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은 천사들(눅 24:4,23)이거나 모세와 엘리야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은 이 구절과 연관해서 말라키 4:4-6과 다니엘 12:5를 공부해야 한다.
『그후에 그들은 올리브 산이라 하는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다닐 수 있는 거리더라』(12절). 안식일에 다닐 수 있는 거리는 7과 1/2 스타디온으로 여겨지고 있으며(큐빗이 18인치라면 약 3000피트) 대부분 출애굽기 16:29와 민수기 35:5이 안식일에 다닐 수 있는 “최대” 거리에 대한 근거 구절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것은 요세푸스와 탈무드 신봉자들에 따른 것일 뿐이다.
안식일에 다닐 수 있는 거리는 반 마일 조금 더 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노스겐, 브래스, 렌돌, 벨서 등은 누가복음 24:50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베다니”에 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1:18에 따르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15 스타디온 거리이다. 이것은 안식일에 “합법적으로” 다닐 수 있는 거리의 두 배이다. 그래서 ASV(1901)는 누가복음 24:50에 “베다니까지”(as far as to)를 “베다니 맞은편”이라고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런 시도 뒤에 감추어진 동기는 성경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민수기 35:5에 있는 도시들의 외곽이 성벽에서부터 3000-3500 피트 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베다니까지”는 베다니 성 경계에서 무려 3000 피트까지를 포함한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이다. 큐빗이 22인치라면 그 거리는 4000 피트에 근접하게 된다. 본문은 안식일에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어 전혀 문제가 안된다.
주께서 영광으로 되돌아가시기 전에 이 지상에서 사도들이 들었던 마지막 메시지는 재림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재림에 대해 논쟁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을 율법학자들이 아니라 증인들(8절)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상에서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은신처를 구하고 있다. 우리는 표적이 아니라 한 음성(딤전4:16)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 구름에 앞서 흙덩이가 우리를 덮는다 해도 죽음은 여전히 우리를 속박(요11:44)에서 풀어 주고 놓아 주어야만(고전15:55) 할 것이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주의 “형제들”』(14절). 이것은 신약에서 마리아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다. 기도나 말이나 행위로 마리아를 영예롭게 하는 곳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신구약 어느 필사본에도 마리아의 “무염시태”(無染始胎-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고 하는 카톨릭의 교리, 역자주)나 “몽소승천”(蒙召昇天-마리가가 예수님처럼 하늘로 올라갔다는 교리, 역자주)이나 “영원한 처녀성” 같은 것은 없다. 사도의 역사를 단순히 피상적으로만 읽어본 사람일지라도 마리아의 이름이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순절 이전이나 이후에도 그녀는 교회의 문제들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행 1,2장). 카톨릭의 우화는 이교도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마리아는 오순절 전에 함께 모여 기도했던 몇몇 여인들 중에 있던 구원받은 죄인이었을 뿐이다. 성경의 마리아와 로마 카톨릭의 마리아는 너무도 다르다.
『...주의 형제들과 더불어...』(14절). 여기에는 주 예수를 믿지 않았던(요7:5) 주님의 동생들이 포함된다(마1:25, 막6:3, 눅2:7). 그러나 우리는 나중에 사도들의 무리에서 이들을 발견하게 된다. “주의 형제”인 야고보는 그 무리의 지도자이며(행12:17; 15:13; 21:18), 유다서를 쓴 사람도 주의 형제들 중의 하나였다(막6:3). 로마 카톨릭은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이라는 거짓말을 위해서 여기의 “주의 형제”를 “주의 사촌”이라고 말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를 가장 많이 속인 사람은 바로 제롬이었다. 라틴 벌게이트, NASV 등 많은 새로운 번역본들이 1582년의 예수회 성경과 일치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들 모두는 마태복음 1:25에서 “첫태생”을 삭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