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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치고, 혼을 망치는 배교한 교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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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7월호>
지난 5월, 한겨레 신문은 「전광훈 “대가리 박는다, 실시” 한마디에 ‘엎드려뻗친’ 교인들」이라는, 눈을 의심케 하는 기사를 냈다. 보도에 따르면 전 목사는 할당치만큼의 참여자를 집회에 데려오지 못한 각 지역 광역위원장들로 하여금 머리를 땅에 대고 뒷짐을 지도록 했다. “니들 때문에 나라가 망해.”라는 질책도 이어졌다. 그에게는 그런 “엽기적인” 일을 벌여서라도 탄핵에 이어 치러진 대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는 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전 목사는 어떤 주요 교단에서도 “이단”으로 “확정 판결”을 받지 않았다.)이 기사는 전 목사와 김문수 당시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와의 관계도 함께 다뤘다. 김 전 후보가 후보토론회에서 전 목사에 관한 질문을 받자, 정치적 관계는 없고 요즈음에는 그 교회에 간 적도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교회가 제대로 깨어서 기도하고 광장에 나와서 헌신하는 게 없었다면 우리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가 이 수준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까”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토론회에서 김 전 후보는 교회를 비롯한 여러 종교들이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전 목사를 우회적으로 옹호했다. 김 전 후보는 스스로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과거의 민주화 운동 때, 좌익으로 몰려 신변이 위험해지는 것을 피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안으로 들어가서 운동을 이어갔다는 점도 함께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기틀이 갖춰지는 데에 “기독교”는 분명 큰 공헌을 했다. 얼마 전 한국 기독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KBS 특집으로 방영된 <기적, 사람을 향하다>라는 다큐멘터리도 같은 내용이었다. 여기서 뉴브런즈윅 신학교(언더우드의 모교)의 김진홍 교수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1898년 독립협회 사건을 겪으며 큰 감명을 받았던 점을 소개했다. 즉 언더우드가 서구인들의 눈에 매우 미개했던 한국인들에게 자신들이 모르는 ‘민주 정신’이 있다는 생각을 가진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이 나라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그리스도신문>을 통해 언더우드를 위시한 당시 선교사들의 사역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기도 했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그 신문을 보면 기독교 관련 내용은 ‘조금’ 있고, 나머지는 닭을 어떻게 키워야 되느냐, 식용 식물을 어떻게 키워야 되느냐 같은 게 주로 많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 전 위원장은 언더우드가 농업, 공업 따위를 <그리스도신문>을 통해 다뤘던 것을 “직업 소명설”과 연관시키면서, 직업에는 귀천이 있을 수 없다는 사상과 반상(양반과 상인)의 차별을 없애는 데 기독교가 크게 기여했다고 봤다.
다큐멘터리는 6,70년대에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사역을 1961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한 조지 오글을 통해 조명했다. 선교회의 간사를 지냈던 이민우 씨는 “기독교인 수를 늘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자.”라는 게 그 사역의 목표였으며, 그래서 인간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등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고, “민주적인 노조”가 탄생하는 배경을 제공했다고 전했다.
요컨대, 이 땅에 “기독교”를 들여온 선교사들의 목표는 늘 경제적, 제도적 발전과 그를 통한 구휼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활동을 벌이면서 사람들이 교회에 소속된 사람, 즉 “기독교인”이 되거나 “기독교에 호감”을 갖게 되는 일을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요, “복음 전파”라고 믿었다. 그들은 교회의 역할을 “빈곤, 범죄, 노동, 위생, 보건, 차별, 반민주적 제도 등의 문제 해결”로 보는 “사회 복음 운동가들”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그들은 이역만리 땅에 와서 여러 장벽을 극복해 가며 의학, 기초 과학, 공학, 언문, 언론, 교육, 제도의 발전에 공헌했다. 이 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돌파한 명실상부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그들의 덕택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그들에게 감사할 수가 없다. 그들은 이 나라에 성경적 기독 신앙이 자리 잡지 못하게 만든 원흉들이요, 결과적으로 수많은 한국인들을 지옥으로 보낸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는 사람들의 영원을 지옥에서 하늘나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꿔 놓는(요 5:24) 참된 복음의 일꾼들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는 “기독교”를 처음 들여온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이 아니라 사회 복음이라는 “다른 복음”(고후 11:4)을 전한 탓에 생긴 일이다.
실제로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교회, 선교회, 미션 스쿨 등에 사람들이 운집했어도, 정작 죄로 인한 지옥의 형벌, 십자가 구속 사역, 주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값없이 받는 구원, 그리고 구원의 영원한 보장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회중들은 개인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는 데까지 가지 못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 일에 대해서 과감하게 단언할 수 있다. 이제는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10년, 20년 전만 해도 그 옛날 해외 선교사들에게 직접 수혜를 입으셨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왕왕 계셨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지옥에 가지 않는지 아세요?”라고 물으면 속 시원한 답변이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선교사들의 사역에 있어서 제대로 된 복음 전파는 뒷전이었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까닭이다.
당시 선교사들이 전파했던 예수님은, (적어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내 죄들로 인해 대신 죽으신 하나님”이라기보다 “훌륭한 사상가”에 가까웠다. 예수님은 “늘 약자의 편에 서셨던 분”이요, “차별받던 소수가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해 주신 분”이요, “타인의 어려운 삶을 동정하고 그 개선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분”으로서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온다. 그래서 교회들은 “약자들을 돕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거나,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력을 형성한 뒤 정치권에 압력을 넣고 여론을 형성하는 일에 매달리거나, 심지어는 “기도회”나 “예배”를 빙자하여 광장에 모인 뒤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상대하셨던 것은 “약자”가 아니라 “죄인”이었다(마 9:13).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는 그가 비록 “강자”라 해도 기탄없이 자신의 곁에 있게 하셨다. 삭캐오는 세리장에 부자였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집에 구원을 선포하셨다(눅 19:1-10). 주님의 제자였던 아리마대 요셉도 부자였다(마 27:57). 요셉과 함께 주님의 시신을 수습했던 니코데모(요 19:39)도 유대 사회의 지배층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부나 권세 자체를 문제 삼으신 적이 없었다.
반대로, 주님께서는 설령 어떤 사람이 “약자”라 해도 항상 그의 입장을 대변해 주지는 않으셨다. 그런 일은 “불의”이기 때문이다(레 19:15). 왕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종이, 일백 데나리온을 꿔준 동료 종에게 빚 독촉을 했다는 비유를 기억하는가?(마 18:23-35) 주님께서는 “각박한 세상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라며 그 종을 두둔해 주지 않으셨다. “왜 어떤 사람은 왕이고 어떤 사람은 종이냐?”라며 신분제 자체를 문제 삼지도 않으셨다. 다만 자신도 부채가 있기는 매한가지였으면서도, 남을 정죄하며 스스로를 “적법하다”고 생각하던 그를, “악하다”고 평가하셨을 뿐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긴다면, 주님께서는 설령 그가 “약자”일지라도 구원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초림 당시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시는 데는 관심이 전혀 없으셨다. 그런 문제는 재림 때 주님께서 “정권”을 잡으시면 저절로 해결되는 사안이다(사 9:6,7). 초림하신 주님의 관심은 온통 “죄 문제”에 있었다.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에 달리셨던 목적도 거기에 있었다(마 20:28).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세상의 정치인들과 기자들을 만나며, 대규모 집회를 통해 정치적 생각을 전달하는 데는 힘쓰면서도, 정작 “복음”을 전파하는 데는 소홀한 이 나라의 교회들은 실로 “배교했다”라는 평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던 목적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이 무언가를 하기에 앞서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선 죄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복음을 전했더라면, 적어도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소망 없이 죽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런 판단은 더욱 또렷해진다.
필자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작태를 보노라면 울화통이 터진다. 주님께서는 더 격한 감정을 품고 계실 것이다(눅 11:52). 목사들이여, 셋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울화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내 사역을 통해 죄인들이 구원받는가?” 하고 자문해 보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았겠습니까?”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예”나 “아니오”로 답하라(마 5:37). “예”라고 답할 수 없다면 사역을 그만두라. 당신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배교의 역군”일 뿐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