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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 정화된 은 같은 <킹제임스성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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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0월호>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성경이 필사되고 확산되면서 “번역본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구시리아어역본>(A.D. 120-150)과 “페쉬타,” <구라틴어역본>(A.D. 120-150)은 2세기 초에 번역된 것으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된 보존된 성경들이다. 이 번역본들 외에도 초기 번역본들 중에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된 보존된 성경은 “울필라스”가 고트어 알파벳을 만들어서 번역한 <고트어역본>(A.D. 330), “메스롭”이 아르메니아어 알파벳을 만들어서 번역한 <아르메니아어역본>, <그루지아어역본>(A.D. 440), “사이릴”과 “메도디우스” 형제가 슬라브어 알파벳을 만들어서 번역한 <슬라브어역본>(A.D. 792-816) 등이 있다.

성경 번역은 16,17세기 유럽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1534년에는 독일의 <루터성경>이 번역 출간되었고, 1535년에는 프랑스의 <올리베탄성경>이 출간되었으며, 1602년에는 스페인의 <레이나발레라성경>이 나왔고, 1607년에는 이탈리아의 <디오다티성경>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1611년에는 영국에서 <킹제임스성경>이 출간되었다. 이러한 성경들 중에서 <한글킹제임스성경>의 저본인 <킹제임스성경>이 번역될 때까지 있어 온 영어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겠다.

성경을 영국인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A.D. 735년 5월 감옥에서 죽은 노섬브리아의 수도자였던 “베너러블 비드”(Venerable Bede)가 자기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번역한 앵글로 색슨어로 된 “요한복음”이다. 또한 베너러블 비드로부터 약 200년 후에 영국 왕위에 오른 알프레드왕(King Alfred)은 앵글로 색슨어로 “시편”을 번역하기도 했다.
널리 보급하기 위해 출판된 첫 완역본 영어 성경은 1380년경 존 위클리프에 의해 번역된 <위클리프성경>이었다. <위클리프성경>은 보존된 히브리어 원문과 헬라어 원문에서 번역된 성경은 아니었다. <위클리프성경>은 라틴어 번역본에서 번역되었으며, 그것도 4세기 후반부에 제롬(Jerome)에 의해 만들어진 변개된 번역본인 <라틴 벌게이트>에서 번역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이 이러하다 해도 영국인들에게 모국어로 된 성경을 보급하고자 했던 위클리프의 순수한 노력과 열정이 결코 폄하될 수는 없을 것이다.

존 위클리프는 1324년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제였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의 신학 교수였다. 그의 믿음은 성경을 통해서 생겨난 것이었는데, 그는 흔히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샛별”이라고 불리며, “종교 개혁 이전의 개혁가”로 불리기도 한다. 마틴 루터처럼, 로마카톨릭의 오류와 부패에 대한 위클리프의 저항은 처음엔 몇 가지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 말씀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통하여 바른 성경적 실행을 향해 분투했는데, 로마카톨릭이 가한 많은 기소와 박해를 받은 후에, 랜캐스터의 공작인 존 오브 곤트(John of Gaunt)의 보호하에서 생활하다가 1384년 러터워스에 있는 자신의 목사관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41년 후에 로마카톨릭의 콘스탄츠 공의회의 명령에 따라, 무덤에서 뼈들이 꺼내지고 불태워져 근처 시내인 스위프트에 뿌려졌다.

로마카톨릭의 박해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성경>의 완역본은 매우 많이 필사되었다. 그의 완역본의 필사본은 그의 신약성경 필사본만큼이나 많이 존재하며, 성경 낱권의 필사본들도 그 수가 많다. 그 필사본들은 가독성도 뛰어나고 필체도 매우 아름답다. 이것은 그 필사본들이 만들어질 때 아름다운 필체를 가진 전문적인 필사가들에 의해 매우 정성 들여 필사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위클리프성경>의 필사본을 보존하는 데도 정성을 많이 기울였음을 알 수가 있다. 위클리프의 성경 번역은 인쇄기 발명 이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양이 필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값이 매우 비쌌다. <위클리프성경>의 신약성경 가격은 부목사 한 사람에게 줄 연봉 정도의 금액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영어 성경의 보급이 필사에만 의존되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영어 성경의 존재가 당시 로마카톨릭 학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 당시 로마카톨릭 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헨리 드 나이턴(Henry de Knyght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 위클리프가 성경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했다.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성직자들과 학자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들은 그 사역을 시대적 상황과 사람들의 필요에 맞추어 평신도와 힘없는 사람들에게 실행해야 한다. 그런데 위클리프에 의해 성경이 라틴어에서 영어로 바뀌자, 성경 말씀이 평범한 것이 되어 버렸고, 평신도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읽을 줄만 안다면 여성들도 성경을 직접 보게 되었다. 말하자면 당시에 성경은 가장 학식 있는 사람들인 성직자들과 성경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 교회의 성직자와 학자들의 높은 재능 앞에 놓여 있던 성경이 이제는 평신도들에게도 영원히 평범한 것이 되어 버렸다.”

필사를 통해 보급된 영어 성경에도 이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면, 나중에 인쇄를 통해 보급되었을 때 로마카톨릭이 어떠한 격분을 일으켰는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로마카톨릭의 롤런드 필립스(Rowland Phillips) 신부는 1535년 런던 세인트폴스 대성당 노천 설교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인쇄를 뿌리 뽑아야 한다. 아니면 인쇄가 우리를 뿌리 뽑을 것이다!”

영국인들에게 자국어로 된 성경을 제공하기 위해 처음으로 “인쇄된” 성경은 <틴데일성경>이다. <틴데일성경>은 성경 원어에서 직접 번역된 첫 영어 성경이기도 하다. 첫 인쇄를 통해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만 출간되었으며, 두 복음서는 1524년 함부르크에서 인쇄되었다. <틴데일성경>의 신약성경 전체는 1525년 쾰른과 보름스에서 인쇄되었다. 1537년에는 틴데일과 늘 동행했던 마일스 커버데일(Miles Coverdale)의 후원하에 성경 전체가 인쇄되었다.
<틴데일성경>이 금속 활자로 인쇄된 첫 성경은 아니다. 금속 활자로 인쇄된 첫 번째 성경은 마인츠에서 구텐베르크(Gutenberg)와 푸스트(Fust)에 의해 1450년에서 1455년 사이에 출간된 “라틴어 성경”이었다. 영어로 인쇄된 최초의 성경은 흔히 “참회의 시편”이라 불리는 일곱 편(6,32,38,51,102,130,143편)의 시편에 대한 주해였다. 이 책은 1505년에 출판되었으며, 저자는 로체스터의 주교 존 피셔이다.

틴데일은 그의 성경이 출판되기 약 1년 전에 순교했다. 그래서 성경 일부의 번역을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구약의 역대기하까지와 신약 전체, 즉 신구약성경의 3분의 2는 틴데일의 번역이지만, 구약의 나머지 3분의 1은 틴데일의 친구이자 동역자였던 토머스 매튜(Thomas Matthew)의 번역이다.
본질적으로 틴데일의 번역본은 공인 역본인 <킹제임스성경>의 기본 틀을 제공한 성경이다. 틴데일의 번역본은 전체 본문의 약 70%가 <킹제임스성경>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틴데일은 대법관 모어 경(Lord Chancellor More)에게 한 답변에서 “나는 하나님께 주 예수 앞에 우리가 서게 될 날에 대하여 기록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양심을 어겨 하나님의 말씀에서 한 구절이라도 바꾸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또한 즐거움, 영예, 부와 같은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진다 해도 나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틴데일은 자신의 증언처럼 신실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소양에 있어서도 번역자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반대자인 토머스 모어(Thomas More) 경에게 했던 답변에서 그는 “헬라어, 라틴어, 특별히 반드시 알아야 할 히브리어, 성경 구절들에 대한 지식과, 설교의 올바른 방식, 히브리어 차용어 발음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점에 대해 고위 성직자들을 비난한 바 있다. 한때 틴데일의 대필자였던 조지 조이(George Joye)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등에 대한 틴데일 선생의 높은 실력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 틴데일 선생에게 답변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라고 증언한 적이 있다. 조이가 언급한 “등등”에 해당하는 언어들이 무엇이었는지는 허먼 버셔스(Herman Buschius) 교수를 통해 알 수가 있다. 루터의 친구였던 스팔란틴(Spalantin)은 일기에 틴데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버셔스 교수가 보름스에서 나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신약성경 6,000권이 인쇄되었다고 한다. 그 신약성경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보름스의 한 영국인(틴데일을 말함)에 의해 번역되었다고 한다. 그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영어, 프랑스어 이렇게 일곱 언어에 능통했으며, 어떤 언어로든 그가 말을 하면 원어민이 말하는 것처럼 유창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틴데일이 영어 성경을 번역할 충분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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