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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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란 것은 성경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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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3월호>

요즈음 신학적 담론에서는 “영성”이라는 키워드가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다. 배본철 성결대학교 명예교수는 “영성”에 관한 논의가 “21세기를 맞이한 현대 기독교회와 신학계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술의 발달로 인해 조성된 위기감은 안 그래도 뜨거웠던 “영성”에 대한 관심에 기름을 부었다.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따라할 수 없는 영역이요,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켜 줄 최후의 보루라고 여긴 사역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영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륜교회를 설립한 김은호 목사는 올해 1월 기독일보와의 대담에서 “어떤 데이터나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면, 성도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검색을 해 봅니다. 그래서 정말 깊은 영성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 영성이 없으면 목회하기가 더욱 힘들어진 요즘입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신학적, 목회적 고민과는 거리가 먼 교인들도 “영성”에 관심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작년 5월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교인들 가운데 무려 83.9%가 영성 생활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교회 출석률이 점점 저조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인 결과였다. 최근 교인들이 소위 “SBNR”(Spiritual But Not Re- ligious), 곧 “종교적인 열성은 없어도 영적인 것에 대해 관심은 있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데이터이기도 했다. 같은 달 교인들에게 담임목사로부터 가장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는 “충만한 영성”(18%)이라는 응답이 “설교 능력”(13.7%)이라는 응답을 앞지르는 일도 있었다.

지난 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영성” (spirituality)이란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는 2014년 미국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최근에 와서 영성에 대한 추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새로운 트렌드로 볼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성”은 로마카톨릭이 60년대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회 이후 고안해낸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회를 통해 대대적인 개혁과 “평신도 친화 정책”을 펼쳤다. 그 일환으로 공회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하고, 인류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천명했다. 이에 따라 일상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면, 설령 말씀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훈련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되었다. 그간 미덕으로 강조되던 “수도원에 틀어박힌 성직자들”의 “경건”이 아닌, “천직에 열중하는 평신도들”의 “거룩함”이 카톨릭교도로서의 삶의 중심으로 제시되는 순간이었다(이들이 말하는 “경건”과 “거룩함”이 성경적인 개념과 괴리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구태여 설명하지는 않겠다). 이러한 일대 전환이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복잡한 규례를 잘 몰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얼마든지 위대해질 수 있다는데, 누가 싫다고 했겠는가? 이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는 로마카톨릭의 “진보적” 행보는 당대 세계의 정치, 종교계로부터도 박수갈채를 받았다. 사회복음적이고 종교 통합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그 당시 사회는 그런 변화가 퍽 달가웠던 것이다.

공회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카톨릭은 그들의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려면 “거룩함”이라는 “구시대적 표현”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인지 “거룩함”을 “영성”이라는 “현대인들의 언어”로 갈음하기 시작했다. 공식 석상에 나타난 교황들은 카톨릭교도들에게 “영성”을 강조하면서, “노동 자체가 영적인 것이다.”라는 둥, “고요한 삶에 영성이 있다.”라는 둥, “테러 발생 지역에서 봉사하는 게 나의 영성이었다.”라는 둥 떠들었다. 그러니 “영성”이라는 말은 비천한 몸을 입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인격을 예찬하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고안된 단어였던 것이다.

이미 대세가 된 “영성 강조”의 흐름에 각 교단의 신학자들이 하나둘 편승함에 따라, 이제 “영성”은 신학교에서 “영성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해서 가르칠 만큼 신학의 큰 줄기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영성”은 그에 걸맞은 “세련된” 정의도 갖게 되었는데, “영성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산타클라라대학교의 예수회 신학교 명예교수 산드라 M. 슈나이더스는 “영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 주체에 속한 하나의 요소로, 인간은 그 능력을 통해 절대자와의 관계에 있어 스스로를 초월하는 통합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대에 신학적으로 논의되는 “영성”이란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하면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신비종교나 영지주의 따위와 그 궤를 같이하는 개념인 것이다. 물론 교인들은 이렇게까지 고민해 보지는 않았을 테고, 그저 하나님과 가까워짐으로써 얻게 되는 초자연적 직관(?)이나 하나님께로부터 우대받는(?) 정도, 혹은 고상한 인품 같은 것을 “영성”이라고 여기는 듯하지만 말이다.

문제의 핵심을 말하자면, 성경에 “영성”이란 것은 없다. 단순히 성경에 나오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비성경적인 개념이라는 뜻이다. “4차원의 영성”이니, “영성 학교”니, “영성 목회”니 하는 말들이 제아무리 제도화된 교계에서 통용된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 구도(求道)의 자세로 자신의 인생에 충실하면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진다는 말씀이 있던가?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 “영성”이 있었던 한 농부를 박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성”에 대해서 “악하다”고 평하기까지 하셨다(요일 3:12). 우리는 그가 누군지 안다. 바로 의로웠던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 “카인”이다.

“영성학”은 그 대전제, 곧 우리 “인간 주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한다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우리의 주체인 “혼”에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이 아직 “사망”한 상태가 아님에도(계 21:8)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저마다의 미신에 빠져 살아가기 일쑤다(행 17:22,23).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면 “사망”한 상태에 있는 “영”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엡 2:1-7). 그러면 성령님께서 그 거듭난 영과 하나가 되셔서 그 사람에게 주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도와주기도 하신다. 자학(왕상 18:28), 금욕(골 2:21-23), 외모(삼상 16:7), 자기기만(갈 6:3, 요일 1:8) 등으로 “우회로”를 찾아내려고 발버둥을 쳐봤자, 이 시대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혹자는 “영성”이란 “거룩함”이나 “경건”과 같은, 영적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요소들과 비슷한 것인데 왜 문제가 되느냐며 의아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어휘들을 무분별하게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다가는 사탄의 계략에 걸려들기 십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제시하여 혼란을 조장하는 것이야말로 사탄의 전매특허다(고후 11:13-15).

“영성”과 “거룩함, 경건”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결정적 간극이 있다. 바로 “영성”은 “개인”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영성”을 운운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어떤 개인의 삶, 경험, 노력, 혹은 그 사람 자체와 같은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소위 “뛰어난 영성”의 소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끼리도 그 “영성”을 나타내는 양상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들은 배를 곯아가며 남들을 도운 일로, 어떤 이들은 강단에서 발휘하는 번뜩이는 재치로, 심지어 어떤 이들은 타인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것으로 그 “영성”을 높이 평가받는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영성”이란 영적인 사람만이 소유한 무엇인가라기보다 사실상 “업적”이나 “장점” 혹은 “자아” 따위와 훨씬 가깝다. 그러니 혹자의 “영성”을 칭송하거나 인간 자신의 “영성”을 개발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높이는 가증한 짓이 된다.

반면 “거룩함”과 “경건”은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다. 우리의 “거룩함”의 출처는 어디인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이시다(고전 1:30). 그렇다면 “경건”의 출처는 어디인가? 그 의미 자체가 “하나님 같음”(godliness)인 데서도 알 수 있거니와 그 출처 역시 “하나님”이시다(벧후 1:3). 그래서 “자기 부인” 없이는 어떤 사람도 “거룩”할 수 없고, “경건”에 이를 수 없다. 애당초 우리 안에는 그런 선한 것이 있지도 않다(롬 7:18). 그것들은 모두 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들이기에, 누구에게서나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거룩한 사람,” “경건한 사람”은 하나같이 성경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들을 멀리하고 또 미워하는 것이다.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는 시대요,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아첨꾼들의 시대에(딤후 4:3) “영성”이 주목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말씀을 따라 옳고 그름에 대한 객관적 판별을 추구하는 일보다, 느낌을 따라 “영성”에 대한 주관적 체험을 추구하는 일이 훨씬 인기가 있을 수밖에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자기 눈에 옳은 대로”(판 21:25) 성경에도 없는 영성을 추구하는 자들의 영적 상태에 무슨 개선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정말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분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친구라면 모름지기 “나의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모든 것들”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요 15:15)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읽도록 하라.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좇을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정말로 그분께 밀착하도록 하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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