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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로와 그리스도인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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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3월호>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지낼 때가 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에 낙심하여 죽기를 구했다(왕상 19:4). 위대한 사도 바울 또한 고난으로 인한 극심한 압박 때문에 삶의 절망에까지 이르렀다(고후 1:8). 그럼에도 그가 맡은 바 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던 동력은 하나님의 위로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의 완성을 위해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또한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 1:3)으로서 사역에 필요한 위로를 더해 주신다.오늘날 이 세상에서는 “위로자”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세상이 너무나 많은 짐을 지우기 때문이다. 죄악과 우울한 일들,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들, 감당하기 힘든 환경과 상황, 반복되는 실망과 낙심, 이 모든 것 때문에 인생의 짐은 종종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교회가 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위로”하는 것이다. 인생의 시험 속에서도 다시 걸어갈 힘을 주는 사람들, 낙심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 신뢰할 수 있고 상처 주지 않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위로”하는 일이다. 위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행동은 결국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교회는 사랑과 격려와 위로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유지되는 곳이어야 한다. 그 결과 교회가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최대한 성장할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위로를 받으며, 또 어떻게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에게 위로를 주는가?
첫째,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위로자”시다. 『또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겠고, 그분께서 또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시리니 그가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리라』(요 14:16). 성령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내주하시는 한, 그리스도인은 구속의 날까지 하나님의 위로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된다. 사울이 회심하여 교회를 박해하던 일을 멈췄을 때, 교회들은 평안을 누리고 든든히 세워져 갔으며, 주를 두려워함과 성령의 위로 가운데 행하였고 수적으로 성장했다(행 9:31).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하게 교회와 성도를 위로하기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않고 소멸케 하지 않는 가운데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갈 5:22)를 맺으며 살아갈 때 그의 삶은 위로로 가득 차게 된다.
둘째, 성경이 인내와 위로와 소망을 준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서 서로 같은 생각을 갖게 하사 한 생각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길 원하노라』(롬 15:5,6).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그들 모두 시험을 견뎠고, 하나님께서 구해 내셨으며, 그들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 나쁜 상황, 불가능해 보이는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선을 이루셨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인내를 주고 위로와 소망을 준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이다.
셋째, 말씀의 선포는 위로가 된다. 『그러나 예언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며 세워 주고 권면하고 위로하느니라』(고전 14:3). 참된 설교는 성도를 세우는데, 그 안에는 격려와 위로가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날카롭고 통렬하게 책망하시고 나서(사 1-39장) 말씀의 궁극적 목적을 이렇게 선언하신다.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의 하나님이 말하노라』(사 40:1). “심판”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회개”는 끝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길이며, “말씀”은 언제나 위로이다. “교리”의 목적은 성도를 짓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안으로 이끌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롬 12:1).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설교 노트에 이렇게 썼다 “목회자의 본분은 성도를 영적으로 먹이고 양육하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믿어라, 믿어라!’라고만 외치나,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양을 먹이지 못한다... 만약 지금 양들(성도들)을 먹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죽이는 일(즉 영적으로 쇠약하게 하는 일)을 한다면 내년에는 새로운 양떼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즉 적합하지 않은 책망이나 꾸짖음, 또는 성도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말만 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죽음을 야기하는 일에 가깝다고 했다. 참된 설교는 책망에만 그치지 않고, 지친 혼들을 따듯하게 감싸 안아 위로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넷째, 신실한 성도들의 교제는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통로 가운데 하나는 “사람의 방문”이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 직분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공격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 때, 위로로 충만해져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차고 넘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원인은 “디도의 방문”이었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를 오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며』(고후 7:6). 디도는 문제를 들추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 있는 동역자를 세워 주고 회복시키는 방문자였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고, 교회는 박해를 받아 내일이 불확실할 때, 투기고는 이 모든 부정적 상황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아닌, 진실과 신실함으로 사실을 알려 주어 교회를 위로했다. 『이제 너희는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나에 관한 것을 알게 되리니 사랑하는 형제요, 주 안에서 신실한 일꾼인 투기고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내가 이를 위하여 그를 너희에게 보내노니 너희가 우리에 관한 일을 알게 되고 아울러 그가 너희의 마음을 위로하리라』(엡 6:21,22). 바울에게 있어서는 성도들의 형편을 진심으로 마음에 두는 디모데의 방문 자체가 하나님의 위로였다(빌 2:19). 이뿐만 아니라 유스토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위로가 되었다(골 4:11).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을 주로 사람들을 통해서 위로하신다.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의 도구”이다. 신실한 성도와의 교제는 하나님의 위로가 된다. 성도들이 나누는 교제의 특징은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다(히 10:24).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로 찾아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문제로 다가가는 사람인가?”
무엇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로가 된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어둡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크다. 바울은 죽음의 현실 앞에서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 그가 보낸 서신의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형제들아, 잠든 자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모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가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살전 4:13). “슬픔”은 인간적이고, “눈물”은 믿음의 결핍이 아니지만, “절망”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정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하는 “잠”이다. 휴거는 이미 주와 함께 있는 성도가 그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게 되는 날이다. 휴거가 주는 위로는 더 이상 사망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 고통이 없다는 데 있다. 휴거가 이루어지면 더 이상 믿음으로 붙들어야 하는 대상도 없다.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는 일(살전 4:17)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갈망의 종착지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재림”이 주는 구체적인 위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위로”와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닌 재회의 약속이라는 위로,” “주님과 영원히 함께한다는 위로,” “모든 상처와 눈물이 최종적으로 치유된다는 위로”이다. 성경은 이 땅에서의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궁극적인 위로는 다가올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분의 최종적인 평가를 통해 완성된다.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어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며 또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라』(딤후 4:8). 바울의 이 고백은 감옥에서 사형을 앞두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온 말인데, 단 하나의 절망적인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위로할 수 있는 “위로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라(고후 1:3,4). 마음이 약하여 낙담한 자들을 위로하고(살전 5:14) 서로를 세워 주라(살전 5:11). “그리스도인”은 위로의 능력으로 한 마음이 되어 평안 가운데 살 수 있어야 한다(고후 13:11).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