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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권위에 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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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0월호>
신약성경에는 바울이 서신을 보낸 두 젊은 목사, 디모데와 디도가 나오는데, 이들은 각각 에베소와 크레테 지역의 교회를 맡은 사역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바울이 공통으로 제시한 메시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디모데에게는 『아무도 너의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딤전 4:12)라고 하였고, 디도에게도 『이런 것들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를 가지고 책망하여 아무도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딛 2:15)라고 한 것인데, 사역자는 젊을수록 “업신여김”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기 마련인 것 같다. 연소한 데다가 병약하기까지 했던(딤전 5:23) 디모데는 업신여김이 얼마나 빈번했는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그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명령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를 업신여기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내가 형제들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겠노라』(고전 16:11). 독자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사도 바울마저 외모로 판단하여 업신여겼다는 점을 알고 있는가?(고후 10:10) 그러니 젊고 병약한 디모데야 두말하면 잔소리가 되는 것이다. 영적 권위를 가진 사역자를 외모로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육신적인 사람들”의 전형적인 습성이다. 사역자는 이 점을 감안해서 사역에 임해야 한다. 교회에 유입되는 사람들이 모두 성숙한 믿음을 소유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 두 목사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무엇인가? 디모데에게는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딤전 4:12)라고 했고, 『항상 거짓말쟁이들이고 악한 짐승들이며, 게으른 탐식가들』(딛 1:12)인 크레테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디도에게는 그들을 엄히 꾸짖고 모든 권위를 가지고 책망하여(딛 1:13; 2:15) 아무도 디도 그 자신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불복종하고 헛된 말과 속임수를 일삼으며, 더러운 이익 때문에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쳐서 집들을 온통 뒤집어 놓는 자들의 입을 영적인 권위로 책망하여 틀어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딛 1:10,11).
그런데 교회를 다스리고 바로잡는 데 사용해야 할 영적 권위를 오해하는 자들이 있다. 위로부터 주어진 권위를 성도들을 지배하는(벧전 5:3) 육신적인 권위로 착각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필자가 알았던 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반듯하고 섬김에 대한 욕구가 대단해 보였다. 그는 우리 킹제임스성경신학교에서 강사를 해 보겠다고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아무나 강단에 세워 강의하게 할 수는 없기에 테스트 겸 그가 가르치고 싶어 하는 과목을 시범으로 강의하게 해 보았다. 그는 나름대로 교안을 작성하여 교수들 앞에서 강의했는데, 듣고 보니 그 과목의 가장 기초가 되는 핵심도 모르는 문외한임이 드러나 강의하기에 적합지 않은 인물로 결론을 내렸고 그 사실을 정중하게 고지했다. 그런데 그 후에 들려오는 소문은, 그가 자신은 강의를 잘했는데 자기를 평가한 교수진의 폄훼로 강사직을 못하게 됐다고 불평을 터뜨리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는 연륜이 깊은 교수들보다도 자기가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고, 상한 자존심을 그런 식으로 위로했던 것이다. 신학교 강사직을 섣불리 꿰차고 앉아 뭐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려 했던 것인데, 한마디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성향이 다른 사람보다 절대적으로 농후한 인물이었다.
그로부터 약 2년 뒤, 그 일이 기억에서 거의 사라질 즈음, 한 지역 교회의 설교자 자리에 공백이 생기자 그는 자신이 설교해 보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허락을 받고 지방으로 내려가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그 후 성도들의 모임에서 “개 버릇 남 못 주듯” 그 으뜸이 되려는 성품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그는 목회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자기 옆을 지나가는 성도와 자신을 의도적으로 구별 짓는 거만한 표정을 지었고, 걸어가다가 서로 마주쳐서 개인적으로 악수할 때는 턱과 목에 힘을 잔뜩 주고 매우 오만한 태도로 손을 내밀고는 말없이 쓱 지나가 버리곤 했다. 필자는 그런 그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변질의 징후가 매우 빨리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는 설교하는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그 교회를 통째로 삼키려 했으며, 결국 교제권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자기가 가진 몇 줌 안 되는 인문학적 소양으로 신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설교도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그는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영적으로 파산한 것이다. 성경 교사들을 시기하고 그들과 다투기까지 하며, 영적 권위를 스스로 취해서 지역 교회를 제멋대로 쥐고 흔들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면, 그는 스스로가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자임을 직접 입증한 것이다. 『만일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며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요,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것이니라. 이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 그러나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그 다음은 화평하며, 친절하고, 양순하며, 자비와 선한 열매들로 가득하고, 편견이 없고, 위선이 없나니 의의 열매는 화평케 하는 자들의 화평 안에 뿌려진 것이니라』(약 3:14-18).
영적 권위를 오해한 자들의 특징은,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교회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한다는 데 있다. 요한삼서에는 그와 같은 인물로 “디오트레페”가 나오는데, 그 역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여 시기와 다툼을 일삼았다. 『내가 그 교회에 편지를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트레페가 우리를 영접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가 행하는 일들을 기억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헐뜯고,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형제들도 영접하지 아니하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들을 방해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도다』(요삼 1:9,10). 디오트레페가 목사로 있던 그 교회에는 선교 여행을 하는 복음 전파자들을 영접해서 대접하고 지원하려는 신실한 성도들이 있었는데, 디오트레페는 목사로서의 권위에 집착하여 복음 전파자들을 영접하기를 거부했다.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형제들과 자신이 영적으로 비교될까 봐 그들을 시기했던 것인데, 그래서 그는 그들을 영접하려는 성도들까지 출회시켜 버리는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으뜸이 되기를 좋아했던 그는 베드로의 가르침과는(벧전 5:3) 반대로 양 무리 위에 군림하기를 좋아했는데, 양 무리의 본이 못 되면서 그들을 지배하려고만 했던 자들은 비단 1세기만 아니라 지난 2천 년 교회사 기간에 줄곧 존재해 왔다. 그와 같이 “목사의 권위”를 내세우며 성도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특징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에 있는데, 디오트레페 역시 구령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가 전무했기에, 도리어 열매 맺는 형제들을 시기하고 출회시켜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영적 권위를 욕망하고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죄성은 루시퍼에게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민족들을 연약하게 하였던 네가 어찌 땅으로 끊어져 내렸느냐! 이는 네가 네 마음속에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가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일 것이요, 내가 또한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의 높은 곳들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사 14:12-14). 하지만 피조 세계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자신이 그것을 품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높아지려 할수록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성경에 계시된 영적 원칙이다. 『네 상품이 풍부함으로 그들이 폭력으로 네 가운데를 채워서 네가 죄를 지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리라. 오 덮는 그룹아, 내가 불의 돌들 가운데로부터 너를 멸하리라』(겔 28:16). 교만은 멸망에 앞서 있으며 거만한 영은 몰락에 앞서 있는 법이다(잠 16:18). 결국 루시퍼는 셋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산”에서 쫓겨났는데, 이것은 단순한 위치 변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사탄이 된 이후로 권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의 권위는 다음과 같이 다섯 단계로 추락하게 된다. ① 사탄은 셋째 하늘에서 그의 권위를 최초로 상실했다(겔 28:16). ② 그다음은 초림 때 둘째 하늘에서 그의 권위를 상실하여 첫째 하늘로 떨어졌고(눅 10:18), ③ 미래의 대환란 때에는 현재 첫째 하늘에서 공중 권세의 통치자로(엡 2:2) 있는 그가 그 권위를 상실하여 땅으로 쫓겨날 것이다(계 12:9). ④ 그리고 지상 재림 때가 되면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 내던져지게 되어 땅에 대한 권위마저 상실하게 된다(계 20:1-3). ⑤ 사탄이 마지막으로 쫓겨나는 것은 천년왕국 끝에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잠시 풀려나와 불못에 던져질 때인데(계 20:10), 이것이 바로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던 사탄이 맞이하게 될 최후이다.
천사장 미카엘은 이 사탄을 만났을 때 그의 영적 권위로 인해 감히 대적하지 못했는데, 이 점을 유다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러한 더러운 꿈을 꾸는 자들도 육체를 더럽히며 다스림을 경시하고 권위 있는 자들을 비방하는도다. 그러나 천사장 미카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더불어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그를 모독하는 비난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느니라.”고 말하였느니라』(유 1:8,9).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미카엘을 시켜서 무덤에 있는 모세의 몸을(신 34:5,6) 파내 오라고 하신 일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의 몸이 필요하셨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집약된다. 즉 모세의 혼은 신명기 34장에서 그가 죽었을 때 셋째 하늘로 올라갔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혼이 그의 몸과 결합하여 마태복음 17장의 변형산 사건 때 엘리야와 함께 나타나기를 원하셨고, 또한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모세가 엘리야와 함께 지상에 나타나 거짓 선지자와 대결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계 11:5,6; 13:13,14).
하지만 미카엘이 모세의 몸을 가져가려 했을 때 사탄이 나타나서 제지했다. 성경은 이때 그 둘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고 말씀하는데, 아마도 사탄은 성경을 들먹거리며(단 12:2)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 모세는 미래의 부활 때까지 그 몸이 땅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면서 천사장 미카엘을 코너로 몰았을 것이다. 권위에 있어서 보좌를 덮는 그룹이었던(겔 28:14) 사탄이 천사장보다 위에 있었으므로, 미카엘은 감히 그를 비난하지 못하고 다만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느니라.』(유 1:9)라고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미카엘은 사탄이 지닌 영적 권위에 함부로 대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대환란 때가 되면 상황이 반전될 것이다. 사탄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둘째 하늘에서마저 권위를 상실하여(눅 10:18) 첫째 하늘로까지 추락한 『공중 권세의 통치자』(엡 2:2)를, 미카엘이 자신의 천사들과 함께 싸워 땅으로 쫓아 버리는 것이다! 『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을 대항하여 싸우고 용과 그의 천사들도 싸우나 그들이 이기지 못하여 하늘에서 더 이상 있을 곳을 찾지 못하더라. 그리하여 그 큰 용이 쫓겨나니 그는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옛 뱀, 곧 온 세상을 미혹하던 자라. 그가 땅으로 쫓겨나고 그의 천사들도 그와 함께 쫓겨나더라』(계 12:7-9). 영적 권위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 권위로 하나님을 대적하면 반드시 버림받게 되고, 그러한 권위 역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의인을 벌하는 것도, 공평함을 인하여 통치자들을 때리는 것도 선하지 아니하니라』(잠 17:26). 즉 하늘로부터 주어진 권위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도피 생활을 하면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던 다윗이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가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삼상 24:10)였기 때문이다. 미카엘이 사탄에게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느니라.』(유 1:9)라고 말한 것처럼, 다윗 또한 『주께서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시고, 주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기를 원하나, 내 손으로는 왕을 해치지 아니하리이다.』(삼상 24:12)라고 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코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땅의 입을 벌려 삼켜지게 하신 것은 그들이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대적했기 때문인데(민 16장), 이처럼 영적 지도자의 권위는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자신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영적 권위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영적 권위라 해도 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권위를 가진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며, 무엇보다 모든 면에서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벧전 5:1-4, 딤전 4:12). 또한 거기에는 겸손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겸손은 높임을 받는 일의 선두주자이고(약 4:10, 벧전 5:6), 겸손할 때 영적 권위가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교단에서 수여한 목사 안수증은 영적 권위와 무관하다. 이 마지막 때에는 그런 종잇장을 흔들면서 가짜 권위로 회중을 지배하는 자들이 강단을 더럽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니콜라파들을 미워하신다고 성경에서 두 번 말씀하셨다(계 2:6,15). 하나님께서는 참된 영적 권위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며 보호하신다. 우리 역시 영적 권위를 사랑해야 한다. 겸손함으로 옷입고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벧전 5:5). 바로 이것이 지역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질서”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