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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를 예비하는 뉴에이지 운동 - 대중문화로 다가오는 뉴에이지 운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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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8월호>

오늘날 “뉴에이지”에 대해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저 대중음악의 한 장르 정도로 인식할 것이다. 클래식 음악과 팝 음악의 절충인 크로스오버 음악과 유사한 형태로, 뉴에이지 운동이 뭔지도 모르는 무수한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장르이다. 물론 이것은 뉴에이지 운동의 본질이 아니며, 이 운동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문화적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도 뉴에이지 운동은 꽤 성공적이다. 그 운동의 본질이 뭔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뉴에이지라는 말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으니 말이다.

뉴에이지 운동과 반기독교적 정서
이 운동은 지극히 사탄적인 운동이다. 하지만 지극히 선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파괴적인 현상을 치유하는 대안으로까지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의 속성이 반영된 것뿐이다(고후 11:14). 뉴에이지 운동은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New Age)를 여는 운동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 질서(New World Order)를 통해 이룩되어야 한다. 이것은 현 시대가 낡은 질서 속에 있는, 타파되어야 할 낡은 세계라는 것이 전제가 된다. 그러면 그 타파되어야 할 낡은 질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온갖 권위주의적이며, 권력자들의 이득을 위해 싸움만 일삼는 힘의 질서다. 종교 문화적으로도 우수한 집단과 열등한 집단이 있어 항상 지배, 피지배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질서, 지역적으로 말하면 서구 사회 중심의 질서이며, 종교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적 질서이다. 그래서 뉴에이지 운동은 본질적으로 반기독교적 운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구 시대에서 세상을 구할 구세주로서 적그리스도를 맞이하자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의 본질이다. 그래서 뉴에이저들은 “마야트레야”에 대해 자주 말하곤 하는데, 마야트레야란 쉽게 말해서 “미륵” 부처다. 우리 나라를 비롯 동양인들에게는 쉽게 다가오는 불교 사상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신비롭고 새로운 사상이며, 이 세상의 새로운 대안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뉴에이지 운동은 불교에 한정되지는 않으며, 다만 불교나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들의 신비적인 모습들을 하나의 모델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기다리는 마야트레야, 즉 미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이다.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유는 그가 평화의 사도로 오는 자이며, 인류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 그가 “평화로 많은 것을 멸하리라.”(단 8:25)고 말씀한다. 분명 그는 파괴자일 것이지만, 그는 자신의 슬로건을 “평화”로 제시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 말에 속아 그를 참다운 평화의 사자로 받아들일 것이다.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나, 오늘날 그 갈망은 어느 시대보다 더 크다. 인류는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려 왔으며, 점점 커지는 전쟁 속에서 그 열망은 더욱 커졌다.
그러면 평화에 대한 갈망과 반기독교 사상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사람들은 이 둘을 한꺼번에 외치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뇌리 속에 “기독교=전쟁”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 기독교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이 아프간,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면서 반미, 반기독교 정서가 확산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외에도 십자군 전쟁이나, 제국주의 전쟁들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반기독교 사상을 외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그러한 전쟁들은 성경적 기독교 신앙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며, 특히 십자군 전쟁은 로마카톨릭의 확장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전혀 기독교와 관계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러한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뉴에이지 운동의 가장 큰 슬로건인 “평화”를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반기독교적 정서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의 대중문화적 현상
19세기 미국에는 두 가지 사상적 흐름이 생겼다. 하나는 에머슨, 쏘로우, 휘트만 등의 시인으로 대표되는 "초절주의"(transcendentalism)이고, 또 하나는 마담 블라바츠키로 대표되는 "신지학"(theosophy)이다. 초절주의(초월주의)는 삶을 초월하자는 의미가 있으며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추구했다. 종교적으로는 청교도주의를 탈피하여 신비주의를 추구했다. 신지학은 신비주의가 동양종교와 결합된 것인데, 미국으로 건너온 힌두교 구루(Guru)들의 활동을 통해 확장되었다. 이것은 현대 뉴에이지 사상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기독교 사회인 미국을 뒤바꾸지 못했다. 이러한 사상이 서구 사회를 바꾸기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엉뚱하게도 히피(Hippie) 문화인 것이다. 히피(hippie)는 모든 사회적 통념,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극단적인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운동으로서, 기존 사회에 반항하는 젊은이들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찢어진 청바지와 통기타와 장발, 록 음악 등으로 상징되는 이 히피 문화는 반전 평화 운동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런데 이 문화는 기존의 기독교적 전통질서를 파괴하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들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평화”의 이미지를 동양 종교들에서 찾게 된다. 이로써 뉴에이지 운동은 대중문화 속에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뉴에이지 운동이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좀더 대중적인 문화적 접근이 필요했다. 히피 문화보다 좀더 온화한 이미지를 띤, 뉴에이지 운동의 목적인 평화와도 부합되는 이미지의, 그러면서도 동양의 신비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리고 대중적으로 쉽게 다가올 수 있는 분야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바로 뉴에이지 음악이다.

(1) 뉴에이지 음악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뉴에이지 음악은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어서 너무나 대중적이 되었다. 록 음악은 싫고 클래식 음악은 너무 어려운 사람들에게 뉴에이지 음악은 차분한 뉴클래식의 분위기를 가져다 주었다. 90년대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음악들이나 오늘날 이루마의 음악들은 유명한 뉴에이지 음악들이다. 그들의 음악들은 일단 차분하다. 어떻게 보면 발라드풍으로 대중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같지만, 비슷한 리듬을 반복함으로써 신비적 음색을 내어 꿈과 몽환의 세계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이 신비적 분위기는 인도의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 TM)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조용한 명상이 아니다. 자아를 뛰어넘어 우주로, 영계로, 자연으로, 신들에게로 나아가려는 그런 초월 사상을 갖고 있는 명상이다.
그리스 출신의 야니라는 뉴에이지 음악가는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재즈 밴드를 섞고, 고전과 현대의 장르를 섞어가면서 연주하는데, 문제는 그의 사상 자체가 모든 것의 혼합을 통한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혼합이라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 혼합될 수 없고, 가치관들이 혼합될 수 없다. 절대 진리를 버리고, 오직 인본주의를 위해 자아를 버릴 때에만 혼합될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그런 바탕 위에 세우려는 평화다. 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악을 제거하신 후 그분의 의로운 통치 가운데 화평을 이루신다 하셨다(사 2:4).
더 큰 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에서 뉴에이지 음악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전자악기와 세팅 드럼 등으로 세상적 록 음악 형태의 복음성가들이 불려졌고, 기독교적 대중 음악인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결국은 세상에서 유행하고 있는 뉴에이지 음악을 CCM이나 복음성가로 채택해 사용해 버리는 것이다.

(2) 반전 평화 운동
음악으로 주도되는 뉴에이지 문화가 구체적으로 내놓은 현상 중 하나는 반전 평화 운동이다. 이것은 참으로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뉴에이지와 아무런 관련없는 사람들도 전쟁은 싫어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온 인류의 염원일 것이다. 하지만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전쟁을 기존 세계의 가치관이 낳은 산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단순한 전쟁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관들을 파괴하려 한다. 오늘날 세상은 너무나 많은 전쟁 속에 지쳐 있기 때문에 “반전 평화”가 절대적 가치로 여겨질 정도이며, 전쟁만 없다면 모든 것들을 허용하고 싶은 분위기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전쟁만 없으면 무엇을 해도 된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가치관들이 있기 때문에 설사 국가 간에 확실한 조약을 맺어 전쟁을 금지한다 해도, 그 안에서 수많은 갈등과 싸움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갈등마저도 없애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뉴에이지 운동가들이다. 어떻게 사회적, 인종적, 종교적, 성적 갈등을 극복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 모든 것들을 용납해 주자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죄가 된다 하더라도 피흘리지만 않으면 용납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히피들이 이 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것이다. 동성연애자, 마약중독자, 성도착자, 인권운동가 등이 이 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반전운동과 이들에 대한 인권운동은 함께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세상은 이러한 죄인들에게 너무도 관대하다. 왜 그런가? 뉴에이지 운동 영향 때문이다.

(3) 동양 종교들의 문화적 접근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뉴에이지 문화 현상 중 하나는 “참선,” “요가” 같은 동양 종교의 유행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우리 같은 동양인들에게는 전혀 “뉴”(new)가 아니다. 옛날부터 불교와 도교 문화 속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불교의 중들은 이 일을 계속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것들이 종교의 틀 속에 있지 않고 문화적 차원으로 부상해 있다. “도”(道)를 닦는 단체들이 늘어나고, “단”(丹)학을 연구하는 모임들, “마음수련”이라는 이름으로 “선”(禪, 참선)을 행하는 모임들, 건강 프로그램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은 “요가” 등이 만연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종교적 명상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그들 모두가 그 종교의 신도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도들이 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인들도 가담하곤 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를 “초월”한 뉴에이지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에서도 명상을 하고, 태권도, 검도 같은 도장에서도 명상을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뉴에이지 문화들이다.

(4) 마이클 잭슨을 통해 본 뉴에이지 문화
얼마 전에 죽은 미국의 팝 스타 마이클 잭슨은 이 모든 뉴에이지 문화의 선봉장이었다. 그는 생전에 수많은 히트곡들을 남겼는데, 그는 그 음악들과 그의 명성을 통해서 뉴에이지 운동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곡 중 “We are the World”라는 곡이 있다. 그 노래는 지구상에 굶주리고 피흘리는 사람들을 돕자는 일종의 캠페인적 노래다. 당시 수많은 유명 팝 가수들이 합창으로 그 노래를 부르면서 이 세상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고 외친, 어찌 보면 상당히 감동적인 노래다. 하지만 그 가사를 보면 이런 말들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가족 중 일부입니다. 우리가 곧 세계입니다. 우리는 한 자녀들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인류 통합을 추구하는 가사다. 그는 “하나님”을 말했지만, 이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자녀라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거대한 한 가족이라면 분명 마귀의 가족이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의 아비는 마귀이기 때문이다(요 8:44). 또한 그가 “하나님”이라고 부른 그 신은 바로 “이 세상의 신”인 마귀인 것이다(고후 4:4).
그는 참으로 모든 권위와 질서,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 질서까지 부정하고 파괴하려 했던 뉴에이지 운동가였다. 그는 세상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사랑하며 살기를 노래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세상은 마약중독자, 성도착자, 동성연애자들이 판을 치는데도 단지 전쟁만 안하는 세상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원하는 “뉴에이지”인 것이다. 그의 장례식은 많은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일종의 공연처럼 행해졌는데, 그 공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참석자들은 “We are the World”를 불렀다. 그때 무대 뒤 스크린에는 온갖 뉴에이지 문양들로 그 가사를 장식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뉴에이지의 세상으로 나아가자고 노래한 자였다. 하지만 그 세상에 대한 진실은 곧 적그리스도가 지배하는 마귀의 세상인 것이다.

다니엘서에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정보가 자세히 들어 있는데, 그 중 오늘날의 뉴에이지 운동과 연관된 정보들이 주목할 만하다. 그중 하나는 “평화”다. 그는 예루살렘을 평화로이 입성할 것이고(단 11:24), 평화를 가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할 것이다(단 8:25).
또 하나는 그가 “때와 법을 변경”(단 7:25)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마이클 잭슨을 비롯한 수많은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그 적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기존의 가치관들과 질서들, 혹은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에 심어 놓은 양심의 법들마저 변경시키고 있다. 세상은 더 이상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생물학적 성(性)도 바꿔 버린다. 그들이 원하는 새 시대는 이러한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 즉 적그리스도에 의해 변경된 새 질서를 통해 이룩되는 평화의 세계다.
하지만 그 세계는 결코 평화롭지 못할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대환란 때는 전쟁들이 있을 것이고(계 6:4), 무엇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계 19:11-18). 진정한 “뉴에이지”는 적그리스도가 심판받은 후에 펼쳐질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이다. 그때 세상은 참으로 평화롭게 될 것이며, 전쟁이 그치는 것은 물론 자연계에까지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사 11장). 이것이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새로운 세상의 염원 아니겠는가? 전쟁도 없을 것이고, 굶주림과 질병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바람과 다른 것이 있으니, 그곳에는 죄인들이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신들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한 세상 평화”를 추구하지만, 진정한 뉴에이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의 세상”인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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