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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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든지 덥든지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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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12월호>

성경은 마지막 교회 시대인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를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시대"라고 말씀한다(계 3:15).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이런 모습이 형성되었겠지만, 특히 "평균주의"란 것이 라오디케아 교회들의 미온적인 모습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평균"이란 어떤 집합의 적절한 특징을 나타내거나 요약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평균주의는 이 평균(값)을 사용하여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다. 이것은 1840년 벨기에의 천문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아돌프 케틀레가 제시한 "평균적 인간"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이 개념을 영국의 유전학자 프랜시스 골턴이 1890년대에 "계층 개념"으로 발전시켰고, 이를 토대로 1900년대 초 미국의 경영학자 프레드릭 테일러가 "표준화 시스템"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평균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전 세계에 널리 퍼뜨림으로써, 세계 도처에 평균주의 이상이 심겨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대다수 국가들의 대학, 기업, 군대, 정부, 단체 등 사회 전반에서 이 "평균주의" 개념이 부지불식간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향 때문에 평균적인 신체지수, 평균적인 재능, 평균적인 지능, 평균적인 성격, 평균적인 학생, 평균적인 직원, 평균적인 뇌 등과 같은 것들이 당연시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말았는데, 사실 평균주의는 "모순된 가정"에서 출발한다. 곧 "에르고딕 이론"(ergodic theory)이라 불리는 가정이다. 이 가정에 따르면, ① 어떤 그룹의 모든 구성원이 동일하고, ② 그 그룹의 모든 구성원이 미래에도 여전히 동일할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경우 그 그룹은 에르고딕으로 인정된다. 동시에 에르고딕으로 인정된 그룹은 그 그룹의 평균값을 활용하여 개개인에 대한 예측을 이끌어 내도 무방하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 모든 구성원은 동일하지 않고 미래에도 여전히 동일하지 않을 것이기에 에르고딕 그룹으로 분류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주의는 그것이 "같을 것"이라는 모순된 가정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순된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는 평균주의는 세계 도처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람들에게 "평균(중간)만 하자!"라는 생각을 주입시키고 있다. 바로 이런 생각이 기독교계 안으로도 스며들어 와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온적인 태도"를 부추기면서 하나님께서 토해 내실 정도로 미지근한 교회들을 양산하고 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온적인 태도는 "타협하는 태도"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지식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비진리와 타협하고 있는 라오디케아 교회들은 "정통"으로 자처하지만 실상은 "배교한" 교회이다. 말하자면 입으로는 정통 신앙을 가졌다고 떠들어 대면서도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따라 자신의 믿음을 바꾸면서 미온적이고 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피터 럭크만 목사는 "성경을 통해 더워질 만큼 하나님께 가까이 있지도 않고, 세상에 의해 차가워질 정도로 멀리 있지도 않다."라고 말하면서 차지도 덥지도 않은 아주 어중간한 위치의 배교한 교회들의 실상을 꼬집어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뜨뜻미지근한 채로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저 눈앞의 이익만을 쫓기에 급급한 이 썩어 빠진 교회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상태가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었다고 책망하신다(계 3:17).

거리를 걷다 보면 종종 전도한답시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계세요,"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교회에 나오면 좋아요" 등의 아주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교인들을 본다. 이런 미적지근한 전도 방식이 자기 교회의 "교인 수"를 늘리는 데 효과적일지는 몰라도 정작 죄인들을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시키지는 못한다. 결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말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죄인들을 향해 그들의 죄들을 강력하게 일깨워 주고, 죄인은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경고하며, 또한 이 모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그들의 혼을 이겨와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꼭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야 되겠어요?"라는 말로 사람들의 권리를 하나님의 권리보다 더 중시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가치판단을 유보한 채, 이도 저도 아닌, 곧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성경과 신약 교회사를 통해 만나게 되는 믿음의 용사들은 평균주의에 함몰되어 그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겁쟁이들이 아니었고, 하나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 불같은 열정을 내뿜는 사람들이었다. 노아는 세상 사람들의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떠나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그 명령에 순종하여 떠났으며, 다니엘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내보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또한 사무엘과 선지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히 11:32).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열성으로 여러 가지 위험과 죽음의 위협 앞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런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온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주님께 기꺼이 내어 드리는 데 있어서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들의 정욕대로 행하면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고(벧후 3:3), 또한 자신들과 함께 같은 방탕에 휩쓸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비방을 서슴지 않는(벧전 4:4), 곧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은 이들의 순교자적인 죽음을 파리 죽음보다 못하게 여기고 있다. 어리석은 교회 역사가 필립 샤프는 이런 순교에 대해 "병적인 광신주의"라고까지 폄하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들을 "불꽃"으로 삼으셨고(히 1:7), 이들의 죽음을 "값진 것"으로 여기셨다(시 116: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보여 준 믿음의 용사들 앞에서 차지도 덥지도 않은 그저 그런 믿음의 행보를 보일 때, 과연 그들이 우리를 보며 얼마나 안타까워할지 생각해 보라!

비록 성경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들이 나오기는 하지만(신 5:32; 17:11; 28:14, 수 1:7), 문맥을 잘 살펴보면 이 말씀들은 "평균주의"에서 말하듯이 "평균이나 중간만 하라."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 더욱 밀착하고 주님을 더 올바르게 따르라는 표현이다(시 125:5, 잠 4:27). 말하자면 하나님을 목표로 두고 있는 성도가 죄와 연루되어 시간을 낭비한다든지, 주님께로 향하는 곧은길을 놔두고 다른 길로 우회하여 간다든지,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는 믿음을 가진 자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눅 18:8). 가지고 있는 믿음마저도 온전히 지켜 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임의로 믿음의 "중간 지대"를 만들어 놓고 "다른 사람보다는 더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현 상태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므로 다른 사람의 믿음과 비교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직 주님과 자신만의 관계 속에서 적당히 중간 정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열정과 최선을 다해 주님의 일을 더욱 넘치게 하고(고전 15:58), 믿음의 경주에서 이기려고 애를 써야 한다(딤후 2:5). 하나님께서는 "미온적인 분"이 아니시다.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도, 평등주의자도 아니시다. "상대적인 진리"를 위한답시고 올바른 균형을 꾀하고자 불평등한 가치들을 조정하는 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극단주의자이시고 성별주의자이시며 양단간에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는 분이시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 백이든 흑이든, 위의 것이든 아래의 것이든, 하늘나라이든 지옥이든, 뜨겁게 믿든지 아니면 아예 믿지 않든지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너는 우리 편이냐, 우리의 대적 편이냐?』(수 5:13)라는 질문을 받을 때 지체 없이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표명해야 한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라는 말씀이 이 배교한 교회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임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교회 시대는 배교로 끝날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까지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생겨서야 되겠는가? 손에 들려 있는 올바른 성경과 진리의 지식에 대한 불같은 열정으로 그 순수한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한다. 미지근한 자세를 가진 사람은 언제든 마귀와 세상과 육신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럭크만 목사는 요한계시록 3장에 대한 주석을 쓸 때 이러한 말로 마무리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의 생애의 마지막 시기, 혹은 주님께서 오실 때, 교회사에서 가장 찬란했으며 계속해서 빛날 필라델피아 교회 기간에 신성한 약속으로 내가 받았고, 교황들이 미워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으며, 학자들이 멸시했던 종교개혁 성경인 <킹제임스성경>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서서 담대하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선포할 시간과 은혜와 능력과 육신의 힘을 주님께서 내게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기도는 없다.』 이처럼 주님을 위해 진리의 기치를 드높이는 일에 관한 한,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열정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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