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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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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2월호>
성경에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이 미리 지어지거나 알려진 인물이 여섯 명 나온다. 우선 “이스마엘”(창 16:11)과 “이삭”(창 17:19)이 그렇다.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개혁을 주도한 왕인 “요시야”의 이름은 태어나기 약 350년 전에 알려졌고(왕상 13:2), 페르시아 왕 “코레스”의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250여 년 전에 알려졌다(사 44:28; 45:1). 이스라엘의 왕이신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침례인 요한”이라는 이름은 태어나기 약 9개월 전에 지어졌고(눅 1:13), “예수님”의 이름 역시 탄생하시기 9개월 정도 전에 미리 지어졌다(마 1:21).하나님께서는 “이름들”에 대한 관심이 유독 남다르시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에는 그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지어 주시는 것이다. 성경의 열세 번째 책인 “역대기상”에는 4분의 3 이상이 이름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계보”만 줄지어 나오는 1장부터 9장까지를 읽다 보면, 웬만한 집중력과 인내심이 없고서는 쉽게 잠들고 만다. 피터 럭크만 목사가 밥존스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을 당시, 1학년 학생들은 구내식당에서 함께 식사할 때 탁자에 둘러앉아 밥을 먹기 전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의무적으로 성경 구절 하나씩을 암송했다고 한다. 한번은 아주 괴짜인 친구 하나가 자기 차례가 되자 이런 구절을 암송했다. 『서쪽 파르바 둑 길에 넷, 파르바에 둘이더라.』 어디에 있는 구절인지 감이 오는가? 혹이라도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마음에 무슨 감동이 밀려오는가? 강력한 찔림이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강한 도전을 받게 되는가?
당시 럭크만 목사는 영적으로 어려서 그와 같은 구절들이 참 이상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존재, 구원과 죄에 대한 심판, 하늘나라와 지옥, 믿음, 거룩하고 성별된 삶 그리고 기타 중요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그런 내용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는지 참으로 이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는 데 약 3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즉 성경은 “종교 서적”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책”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앞에서 그 괴짜 친구가 암송한 구절은 이름들로 가득한 “역사서”인 “역대기상 26:18”에 나오는 말씀이다. 바로 이런 이유, 곧 성경이 “역사책”이란 이유로 세상은 그토록 성경을 싫어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 속에 깊숙이 개입하시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의 주인공이자 주관자이신 주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이 원하는 역사를 인간 마음대로 써 내려가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그분께서 친히 기록하신 역사책인 성경을 인류의 역사 바깥으로 최대한 멀리 밀어내려고 무척 애를 쓴다. 하지만 그 책을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인류에게는 더 극심한 고통과 재앙과 파멸만 불러올 뿐이다.
사실 성경을 읽다가 이름들이 길게 나열되는 내용과 같은 구절들을 만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내용”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읽기도 지루하고 따분하여 무슨 영적인 교훈들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는 대충 읽거나 아예 읽지도 않고 건너뛰어 버리는 것이 다반사이다. 일례로 출애굽기 35-40장에 나오는 성막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가 그렇고, 또한 무사히 “출애굽”해서 나오면 레위기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율법의 상세한 내용들로 어려움을 겪게 되고, 또 어떻게 레위기를 잘 지나갔더라도 곧바로 이어지는 민수기 1-8장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계수된 숫자들이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임무에 관해 기록된 내용들에 직면하면서 또다시 지루함을 느끼는 것이다. 역대기상 1-9장, 23-26장에 나오는 계보들이 그렇고, 에스라 8,10장, 느헤미야 7,11,12장의 명단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에스겔 40-48장에서 천년왕국 시대의 성전을 묘사하는 상세하고 복잡해 보이는 내용들에 이르면, 용어들이 전혀 익숙하지 않고 그 전체적인 그림도 머리에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아 금세 따분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런 구절들에서는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건너뛰며 읽었으면서도 “저는 성경을 다 읽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결코 정직한 태도가 아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내용들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벧후 1:21) 말씀들이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딤후 3:16) 유익한 말씀들이며, 『영원히 하늘에』(시 119:89) 세워진 말씀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마 4:4) 산다고 했을 때 그 “모든 말씀”에 포함되는 말씀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지루하고 따분해 보이는 길고 긴 족보나 계보 또는 명단을 역사책인 성경에 기록해 두신 것인가?
1. 우선 “인생의 기본적인 속성”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 주신다. 인생은 그렇게 신나는 삶이 아니다. 인생은 매우 단조롭고 지루하며 진저리나고 따분한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일어나서 먹고 싸고 일하고 잠자는 삶을 매일같이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민요가 있는데, 여기에는 무언가 이 따분한 삶에서 탈출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이 이 지루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보려고 마약을 하고, 담배와 술에 절어 있고, 음행과 간음을 추구하고,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며, 정욕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 좀 더 자극적인 것,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을 쫓아다닌다. TV, 영화, 잡지, 게임, 스마트폰, 가상현실 등의 영상 매체들은 바로 그런 더러운 정욕을 채워 줄 만한 것들을 앞다투어 양산해 낸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는 이런 것들만이 이 지루하고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것이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들도 똑같은 인간이기에 삶이 단조롭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그 지루한 삶을 벗어나는 방법은 세상 죄인들의 방법과 사뭇 다르다. 우리는 마귀가 세상을 통해 제공하는 “자극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한다. 『나, 나는 의 가운데서 주의 얼굴을 보리니 내가 깨면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우리는 어떤 일이라도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만족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이라』(고후 3:5).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구령하고, 이제 얼마 후면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소망과 하늘나라, 천년왕국, 영원 세계에서 누릴 기쁨으로 만족하면서 이 지루한 삶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해 주신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고서야 광야에서 노새를 발견한 “아나”(창 36:24)라든지, 장막에 거하는 자들과 가축을 기르는 자들의 조상인 “야발”(창 4:20), 하프와 오르간을 다루는 자들의 조상인 “유발”(창 4:21),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이방인들의 때”에 세계를 제패할 국가들의 명단(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을 성경에 기록해 두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역사책 안에는 군대를 소집하는 내용이나(민 1장) 145회 이상의 전쟁이 언급되고, 그중 열 번의 전쟁에는 사상자들의 수까지 제시되어 있으며,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나 다윗과 함께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운 사람들의 명단도(삼하 23:8-39) 기록되어 있다. 또한 종교나 신앙, 하나님을 향한 믿음, 사후의 삶, 십계명 등과 관련해서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크든지 작든지 영향을 미쳐 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의 지루한 명단을 기록하는 데 상당히 많은 지면이 할애되고 있다. 에스라 1장에서는 금그릇, 은그릇, 금대야, 은대야 등이 언급되고, 민수기 7장에는 “숟가락”이란 단어가 15번이나 등장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깊숙이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막”에 관해 아주 구체적으로 기술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피의 속죄, 중생 등에 관한 내용보다도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신다.
한편 인류의 역사 속에 누군가를 등장시키시기 위하여 기나긴 명단의 계보를 제시하시기도 한다. 일례로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등장시키시기 위해 “셈의 계보”를 제시하셨고(창 11:10-32),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킬 구원자 “모세”를 언급하시기 위해 “레위의 계보”를 기록하셨다(출 6:16-27).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위대한 왕 “다윗”을 등장하게 하시려고 룻기 말미에 “파레스의 후대에 관한 계보”를 언급하셨고(룻 4:18-22),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역사 속에 보내시기 위해 “아브라함의 계보”(마 1:1-17)와 “아담의 계보”(눅 3:23-38)를 준비하셨다. 무엇보다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엡 1:21) 이름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계보를 따라 이 땅에 태어나셔서 33년 반 동안 역사 속에서 사셨다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왜냐하면 역사를 주관하시지 않는다면 인류가 죄 가운데 멸망하더라도 그냥 내버려 두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시작하신(창 1:1)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시지 않는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3. 구원받은 성도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이름에나 관심을 두시지 않고,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사람들의 이름에만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신다. 그렇다고 관심만 가지시는 것은 아니며,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셔서 영원히 세워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기록해 두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명단이라든지, 교회 시대에 주님을 가장 신실하게 섬긴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명단,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용사들의 명단 등을 기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감으로 주어진 책이기에 성경에 기록된 이름들 역시 영감으로 주어진 말씀들이다. 이 이름들에 더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으며, 결코 변경시켜서는 안 되는 이름들이다. 아무리 그 이름들이 세상이 보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가장 대수롭지 않은 자들의 이름들일지라도,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영원히 남아 있을 이 “책”에 영원히 기록되어 있어야 할 영원한 이름들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특히 에베소서 3:15에서는 하늘이나 땅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가족, 곧 매 시대, 매 경륜 속에서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모든 가족에게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여해 주셨다고 말씀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이름을 하늘에 있는 “생명의 책”에 기록해 두셨다. 성경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는 책이자(히 4:12) 영원히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벧전 1:23-25)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의 책”이다. 또한 “성경”과 “생명의 책”은 모두 많은 이름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가? 반드시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라는 말씀대로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된다. 『내가 유오디아에게 권하며 순두케에게도 권고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생각을 가지라. 내가 또한 참된 동지인 너희에게 청하노니 복음 안에서 나와 함께 애쓰고 또 클레메와 나의 다른 동료들과도 함께 수고한 이 여인들을 도우라. 그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있느니라』(빌 4:2,3). 바울은 구원받은 그 두 여인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있다고 마치 그것을 실제로 본 것처럼 말한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된 것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성경에 그렇게 씌어 있기 때문이다. 곧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제거하신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또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소위 “알라의 예언자”로 자처하는 마호메트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어디에서 죽을지, 또 어떻게 죽을지, 심지어 “죽은 뒤에 어디로 갈지” 전혀 알지 못했다. 반면에 모세는 자신이 언제, 어디에서 죽을지 알았고, 엘리야도 언제 자신이 하늘로 들려 올라갈 것인지 알았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이삭도, 여호수아도, 베드로도, 바울도 알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죽음의 때”가 언제인지 알고 계셨고, 또 “어떤 방법으로” 죽으실지 그리고 죽음 이후에 어떻게 다시 살아나실 것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 일들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자기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안다. 지구상의 75억 명의 사람 중에 이 사실을 확신하고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당신은 어떤가? 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지금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