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주의 분류
순복음교회의 거짓 교리가 낳은 또 하나의 희극(喜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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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08월호>
- 구원과 성령세례는 먼 사건이 아니다 -마귀도 “한 사람”을 찾고 있다
성경과 역사를 통해 볼 때, 마귀는 다양한 형태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해 왔음을 알게 된다. 과거에는 주로 고문이나 화형과 같은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면, 오늘날은 그 방향을 바꾸어 정신적, 영적인 방법으로 고도의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때로 갈수록 교리적인 혼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성령께서도 분명하게 경고하셨던 바다.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딤전 4:1).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리”에 관해 언급을 하면, 으레 “교리적인 논쟁은 하지 맙시다”라는 식으로 그 중요성을 간과해 버린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이 “교리를 위한 것”(딤후 3:16)임을 안다면 그런 말은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물론, “교리”가 “교훈”으로 변개되어 있는 <개역성경>으로는 그 첫 번째 목적조차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성경적인 교리가 바르게 정립되어 있지 못하면 어떤 영적인 교훈도 바르게 적용할 수가 없다. 또한 성경적인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굳건히 해주는 근간이 되기 때문에, 바른 교리가 없으면 믿음의 뿌리를 견고히 내릴 수가 없는 법이다. 오히려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게 된다.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마귀가 이와 같은 자신의 교리들을 교회 안에다가 효과적으로 침투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바로 “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일꾼 한 사람을 찾고 계시듯이, 마귀 또한 자신의 목적에 합당한 “한 사람”을 찾고 있다. 그는 인간을 상대해 온 경험이 6,000년이나 되기에 이 “한 사람”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나 신앙생활의 기간 자체가 그다지 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그 “한 사람”을 찾게 되면 먼저 강단에 세워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게 한 뒤,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권위를 부여해 놓는다. 그후 거짓 교리를 그에게 주입시킴으로써 그의 말을 신뢰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하고 결국에는 그들 모두를 다 한 구덩이에 빠뜨리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식 교회에 ‘은사주의’ 교리가 마치 성경적 교리인 양 자리 잡고 있지만, 그것만큼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파괴시키는 거짓 교리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 이를 퍼뜨리기 위해 마귀는 “한 사람”을 시의 적절하게 사용해 왔던 것이다(우리는 이미 그의 거짓된 열매에 대해 지난 호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송오, 「조용기, 그가 구원받은 목사인가?」, 성경대로믿는사람들, 통권 148호(2004년 7월호), pp.4-15 참고.
지난 6월 25일자 <순복음신문>의 한 칼럼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세례”라는 제목으로 임형근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의 새신자국장)의 글이 실려 있었다. 그는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 사건’에 나타났던 몇 가지 특징들을 언급하는 가운데, 「오늘날 모든 한국 교회가 구원과 함께 성령세례를 체험할 때 한국 교회는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 하지만 그의 글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많은 부분에서 오류를 드러내고 있는 바 새신자들의 믿음을 세워 주기는커녕 오히려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지게 하여 파선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마귀의 전략대로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거짓 교리가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있기에 여기서 그의 잘못된 교리를 성경적으로 바로잡고자 한다.
“사도행전 2:38”을 신약 교회의 구원의 교리로 정립하는 오류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경륜으로 볼 때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책이다. 이 기간에는 과도기 특성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 다루시는 대상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모든 구절들을 신약 교회의 교리로 가져오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뒤따른다. 또한 교리가 중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러한 과도기적인 특수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은사주의’와 같은 심각한 이단 교리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임목사는 ‘믿음과 세례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사도행전 2:38에 나오는 『회개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는 말씀을, 각각 ‘세례자가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할 두 가지 자세’ 곧 ‘죄에 대한 의식적인 고백’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연결시켰다. 곧 ‘회개’와 ‘믿음’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 된다. 물론 그의 이러한 주장이 로마카톨릭의 주장처럼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신약 교회의 구원의 교리로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물로 침례를 받지 않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 구원 계획(롬 3:28,29)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본 구절이나 앞뒤 문맥 어디를 살펴봐도 신약적인 구원 계획(고전 15:1-4)은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속(엡 1:7, 골 1:14)도 나타나 있지 않다. 당시 마음에 찔림을 받아 베드로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들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로서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이들이었는데, 당시 베드로는 메시야를 죽였던 바로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설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온 집이 분명히 알 것은』(행 2:36) 설교의 대상이 이방인 죄인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임을 주목하자. 여러분은 마음에 찔림을 받은 그들이 했던 첫 질문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들의 질문은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가 아니라,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찌하여야 하리이까?』(행 2:37)였다. 이처럼 사도행전 2:38은 하나님께서 선정하신 통치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해 주고 있는 구절이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말하고 있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임목사가 언급한 ‘예루살렘 성도들의 즉각적이고 순종적인 반응’이란 것도 은혜 시대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근거 구절로 내세운 사도행전 5:32의 『순종』은 사도행전 2:38의 선상에서 물침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 ‘교회 시대의 구원 계획’이나 ‘복음에 순종’(롬 6:17; 10:16; 16:26)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 구절은 ‘이스라엘은 물침례 없이는 성령의 선물을 결코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이다. 만일 이런 뜻이 아니라면 베드로가 사도행전 10장에서 물침례를 받기도 ‘전에’ 코넬료를 포함한 이방인들에게 성령의 선물이 부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행 10:45). 그 이방인들은 사도행전 2장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달리 물침례 없이 오직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행 10:44). 같은 책에서 이렇게 상반되는 교리가 등장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과도기적인 특수성 때문이다. 만일 은혜 시대의 구원과 관련된 교리를 확립하고자 한다면 바로 여기 사도행전 10장의 ‘이방인이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구원”과 “성령세례”가 가깝게 놓여 있다는 비성경적인 교리
은사주의자들은 한결같이 “구원과 성령침례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임목사는 말한다. 「구원이 성령세례는 아니지만... 오늘날은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할 뿐 “예수님 믿으면 구원도 받고 성령의 선물도 받습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섬기는 교회의 “한 사람”으로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조용기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순복음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성령세례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그것은 중생한 자의 2차적인 영적 체험임을 믿습니다.」 조용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서울: 서울말씀사, 2002), p.98.
「성령세례는 예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믿을 때에 자동적으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는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도들과 교회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생의 체험과 더불어 성령세례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조용기, Ibid., pp.99,100.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게 된 원인들 중의 하나는 위에서 언급되어진 사도행전 2:38의 말씀을 신약 시대의 구원의 교리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구절 안에서조차도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따른 구원’ 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 자체’를 구분해 놓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임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구원이 곧 성령세례는 아니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 둘은 밀접하게 가까이 놓여 있었다.」는 “향상된 계시(?)”를 밝히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기만 하면 (즉시로)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루살렘 성도의 성령 체험을 고려할 때, 성령이 누구신지 바로 인식하고 구원받은 자는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오늘날도 구원과 성령세례가 결코 시간적으로 거리가 먼 사건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순종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그 시간 차를 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단 말인가? ‘구원과 성령침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교리도 말이 안 되지만, ‘순종이라는 반응을 전제로 구원과 성령침례가 아주 가까이 놓일 수 있다는 교리’는 또 그 무슨 코미디란 말인가?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시간 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2,000년 전에 이미 ‘중생’ 곧 ‘거듭남’(구원)과 ‘성령침례’는 동일한 경험임을 선포하셨다. 또한 그런 경험을 한 수많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구름 같은 증인들로 내세우실 수도 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고전 12:13). 『너희가 너희를 부르시는 한 소망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한 몸과 한 성령이 계시니 한 분 주요, 한 믿음이며, 한 침례이고』(엡 4:4,5). 이 두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한 몸』, 『한 성령』, 『한 침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고전 12장) 보이지 않는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말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위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에게 약속(행 1:5)하셨던 대로, 오순절 날 ‘성령침례’가 이루어졌고(행 2장)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이 시작되었다. 오순절은 매년 정해진 때에 오는 한편, 성령님은 어떤 해, 어떤 정한 때에(행 2: 1),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유기체인 하나의 몸 안으로 침례 주시는(고전 12:13) 세대를 열고 계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 강림하셨다. 이는 유기체인 몸으로서의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성령이 오심으로써 성령침례가 이루어졌고,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형성되었으며 이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성도들이 이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성령침례만이 있을 뿐이다. 더 이상의 오순절 사건은 없으며 1회적인 사건으로 끝나게 되는데, 이는 성경과 지난 2,000년의 교회사가 증명하고 있다.
또한 『구원받는 사람들을 그 교회에 날마다 더해 주시더라.』(행 2:47)와 『주께 더해지더라.』(행 11:24; 5:14)는 구절들을 비교해 볼 때,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사람들은 이미 형성된 그 몸 안으로 “더해지는” 곧 그 몸 안으로 “들어가는” 성령침례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믿는 순간 일어나는 일이다. 사도행전 10장의 코넬료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주목해 보라. 에베소서 1:13에서는 그 동일한 경험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서 그분을 신뢰하였으니 또 너희가 그분을 믿고서 약속의 그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니라.』 “듣고서... 신뢰하였으니... 믿고서...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니라” 이 사이에는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어떤 틈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간격이 길든 짧든 관계 없이 어떤 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한 사람”이 되라
임목사는 이제 결론을 맺고 있다. 「예루살렘 성도들을 향한 베드로의 설교는 결코 세례 또는 구원이 곧 성령세례임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구원과 성령세례가 시간적으로 가깝게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줄 뿐이다. 초대 교회가 구원과 함께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도 모든 한국 교회가 구원과 함께 성령세례를 체험할 때 한국 교회는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요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초대 교회에 있었던 역사처럼, ‘구원과 성령세례’를 함께 받음으로써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구원과 성령침례’를 동시에 경험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역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고 있다.
무지하면 주의 일을 하려고 나서서는 안 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가 혼자만 파선하는 것이 더 나을는지도 모른다. 한 교회의 새신자국장으로서 중책을 맡고 있는 임목사가 자신의 거짓 교리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을 양산해낼지 참으로 생각만 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다수가 진리를 실행한 적은 거의 없었다. 진리를 외친 것은 늘 소수였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찾으려 했으니 그 사람은 장벽을 쌓아 그 땅을 위하여 내 앞에서 갈라진 틈에 서서 나로 그 성읍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이라. 그러나 나는 아무도 찾지 못하였노라』(겔 22:30). 그런데 만일 이 땅에 진리를 실행하는 그 소수마저 없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독자들 제위의 상상에 맡기겠다. 교리적인 혼란의 가중으로 진리와 비진리의 경계가 무너진 이 마지막 때,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경계에 서서 진리를 굳건히 지키는 소임에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한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