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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1 - 끊임없는 대적들 (예레미야 26-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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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11월호>
예레미야는 그 백성이 바빌론으로 잡혀간다는 예언을 했다. 즉 부정적인 예언이며, 반민족적인 예언이다. 따라서 그는 그 예언으로 인해 온 백성에게 미움과 박해를 받는다. 그러나 그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가장 큰 그룹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즉 종교지도자들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일치한다. 예수님께서는 일반 백성들보다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으셨다. 예레미야나 예수 그리스도나 모두 하나님께서 보내시어 말씀하게 하신 분들이다. 반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셨음에도 보내심 받았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거짓을 예언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라 속인다. 그들의 거짓이 들통나지 않으려면, 참된 선지자를 죽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와 예수님이 박해받으신 이유이다.1. "실로"같이 만들리라(26장)
예레미야 26장은 "여호야킴이 치리하기 시작할 때"(1절)의 일이다. 따라서 아직 아무도 포로로 잡혀가기 전이다. 첫 번째 포로는 여호야킴 제3-4년에 시작된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 포로되기 직전 상황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최후통첩"과도 같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계신다. 『그들이 경청하고 각자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내가 그들의 행위의 악함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행하고자 한 재앙에서 스스로 돌이키리라』(3절).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지 아니하면 『그때는 내가 이 집을 실로같이 만들며 이 성읍은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가 되게 하리라.』(6절)고 말씀하신다.
"이 집" 즉 성전을 실로같이 만든다 하셨다. 지금 예레미야는 "주의 집의 뜰"에서 선포하고 있는 중이다(2절). "실로"같이 만든다는 말씀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황폐해진 주의 집을 뜻한다. 실로는 성전이 세워지기 전 성막이 있던 자리였다. 그러나 사무엘이 젊을 때, 즉 아직 엘리 제사장이 있던 시절 그곳에서 들고 나갔던 언약궤는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에서 빼앗기고 만다(삼상 4장). 그후로 실로는 황폐하게 되는데, 시편 78:60에서는 『실로의 성막, 곧 그가 사람들 가운데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라 말씀한다. 즉 실로는 파괴된 주의 집의 원형이다. 일반적인 성읍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계셨던 그 거룩한 성소가 파괴되고 황폐화되는 비참한 모습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그분과의 언약을 깨뜨리며, 온갖 죄악들을 행하고 형식적 경배를 드리면서 거짓을 일삼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 임재해 계셔야 할 이유가 없다. 이사야는 그러한 헛된 경배에 하나님께서 지치셨다고 책망했다(사 1:11-15). 하나님께서 그러한 성전을 놔두셔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예레미야의 이 저주의 예언에 분개했다(8,9절). 그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 작정하고 고관들과 백성들 앞으로 예레미야를 끌고 온다. 하지만 그 고관들과 백성들이 오히려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보다는 현명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레미야가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16절).
예레미야는 지속적으로 주께서 자신을 보내셨음을 강조했다(12,1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리하셨다(요 5:36; 6:29,40; 7:28 등). 본문에서 백성의 장로들은 히스키야 때의 미카 선지자를 예로 들어, 예레미야를 죽이는 것이 부당함을 주장했다(17-19절). 예레미야처럼 미카도 『시온은 밭처럼 갈아 엎어지고 예루살렘은 퇴적더미가 되며 그 집의 산은 산림의 높은 곳들같이 되리라.』(18절)고 저주를 선포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아들었던 히스키야왕은 오히려 겸손해져 회개했었다.
반면 여호야킴왕은 예레미야와 같이 이 성읍에 대해 저주의 예언을 했던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는 선지자를 죽였다(20-23절). 여기에 두 왕의 대조가 제시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무거운 짐이 된다 할지라도 히스키야는 그 말씀에 복종했고, 여호야킴은 그 말씀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극명했다. 히스키야는 앗시리아를 물리쳤고, 여호야킴은 바빌론에 정복당한 것이다.
2. 멍에들의 표적(27장)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레미야는 묶는 띠와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건다(2절). 이 표적은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의 멍에를 메게 된다는 뜻으로, 바빌론에 멸망하여 사로잡혀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표적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방 왕들에게도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그 멍에를 에돔, 모압, 암몬, 투로, 시돈 등의 왕들에게도 보내라 하셨다(3절). 즉 느부캇넷살은 그들 모두를 정복하는 대제국을 세울 것이다. 당시 그 왕들은 여호야킴에게 사신을 보내어 연합을 획책했었지만, 그 어떤 연합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7절에서는 『또 모든 민족들이 그의 땅의 때가 이를 때까지 그와 그의 아들과 그의 아들의 아들을 섬길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바빌론 왕들을 대대로 섬길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특별하게도 문자적으로 적용되었다. 바빌론은 느부캇넷살이 정복한 이후 아들(에윌므로닥), 사위(네리그릿살, 나보니두스), 손자(벨사살)까지만 왕위를 잇다가 멸망한다. 사위도 아들이기 때문에 결국 "아들"과 "아들의 아들"(손자)까지만 섬기면 "그의 땅의 때"(바빌론의 멸망)가 이르러 풀려나게 된다.
그런데 이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유다뿐 아니라 이방 왕국들에도 각각의 거짓 선지자들이 있어, 바빌론이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겠지만(9절), 그러한 예언들은 거짓 예언들이다. 그들이 거짓 예언을 하는 이유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 거짓 예언에 안심하게 하여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지속하게 하려는 것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앞당기게 하려는 것이다(10절).
이것은 과거의 모든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며,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세상은 분명 더욱더 악해져 가고 있는데 모든 정치가들, 교육자들, 종교인들, 사회운동가들, 과학자들은 세상이 더욱더 아름답고 좋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의 행위를 그치지 않는다. 심판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 말하며 멸망해 버리는 것이다. 그 멸망이 곧 이 세상에 임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또 위대한 심판주로 이 땅에 임하실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레미야와 같은 참 선지자들이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여, 죄악을 그치고 회개하라고 소리치지만, 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평화만을 말하고 있다. 즉 심판을 앞당기고 있는 것이다.
멍에의 설교는 시드키야왕 앞에도 선포되었다(12절). 시드키야 때는 이미 두 번의 포로 됨이 있은 후였다(여호야킴 때와 여호야킨 때). 특히 여호야킨 때에는 대규모 포로가 잡혀갔기에 예레미야의 예언은 현실화되었고, 그가 참 선지자임은 증명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여전히 있어 "너희는 바빌론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14절)고 예언하며, 심지어 이미 빼앗겨 버린 성전의 기명들도 다시 찾아올 것이라 예언했다(16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포로 될 때 미처 가져가지 않은 성전의 남은 기명들마저 바빌론으로 옮겨질 것이라 말씀하신다(19-22절). 다시 말해 한 번의 포로 됨이 더 남았다는 것이다.
3. 거짓 선지자 하나냐(28장)
예레미야의 설교는 명확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이고, 나머지는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런 거짓 선지자의 전형이 여기 28장에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아술의 아들 "하나냐"이다(1절).
하나냐는 거짓 선지자답게 하나님의 선지자를 직접 대적한다. 예레미야가 표적으로 목에 차고 있는 멍에를 꺾어 버리며(10절), 하나님께서 바빌론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리셨다고 말한다(2절). 유다의 사로잡혀간 자들과 빼앗긴 성전 기명들과, 사로잡혀간 이방 민족들까지 2년 만에 모두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3-4,11절). 그러나 그 2년 안에 꺾여진 것은 느부캇넷살의 멍에가 아니라 하나냐의 목숨이었다. 하나냐는 바로 그 해에 죽게 된다(17절).
여기서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구분된다. 이 둘은 그들의 메시지로 구분되는데, 참된 선지자는 심판을 선포하고 거짓 선지자는 화평을 선포한다. 그러나 화평을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말이 이루어진 뒤에야 선지자임이 증명되는 법이다(9절). 따라서 하나냐는 그 2년이 지나기까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화평의 예언을 듣게 된다. 왜냐하면 그 예언이 "희망을 주는 예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증명되지도 않은 예언이라도 희망만 주면 좋아한다. 어떤 정치가나 과학자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면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열광한다. 그 비전은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지만, 그 "앞"은 멸망과 심판일 뿐이다.
반면 심판에 대한 예언은 예레미야 혼자만 한 것이 아니다. 예전부터 모든 선지자들은 재앙을 예언했다(8절). 시드키야 시대에 예레미야의 예언은 일부 성취되었기 때문에 참 선지자임이 증명되었지만, 그 전에도 그의 예언은 참된 예언이라 인정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이미 입증된 무수한 선지자들이 같은 것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멸망의 예언이 아니다. 그 백성의 죄들로 인해 멸망이 온다는 책망인 것이다. 이것은 모세 때부터 주어졌던 경고이다. 따라서 죄악을 범하는 백성은 아직 심판이 임하지 않았어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심판은 분명히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는 "긍정"을 예언하고 참된 선지자는 "부정"을 예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것"을 예언한다면, 그는 자신의 죄악을 살펴보고 돌이켜야 할 것이다. 돌이킴이 있을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부정적일 것이다. 돌이키게 되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위로와 힘과 희망을 주신다. 그러나 세상은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상태에서의 긍정을 말한다.
4. 포로 가운데 있던 거짓 선지자들(29장)
29장에서 예레미야는 여코냐 때 이미 바빌론에 사로잡혀가 있던 포로들에게 편지로 예언한다. 『너희는 집들을 짓고 거기서 거하며 정원을 가꾸어 거기서 나는 열매를 먹으라』(5절). 즉 당장 돌아올 생각하지 말고 바빌론에서 정착해 살라는 말이다. 『너희는 아내를 얻어 아들들과 딸들을 낳고 너희 아들들을 위해 아내를 얻고 너희 딸들은 남편들에게 주어 그들로 아들들과 딸들을 낳게 하며...』(6절). 즉 적어도 3대는 살 수 있는 준비를 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대대로 그 땅에서 살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70년이라는 기간은 3대 정도가 살 수 있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그 땅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이다. 심판은 회개를 통해서만 돌려질 수 있다. 그래서 70년 만에 회복된다고 말씀하시기는 하지만(10절),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12-13절).
그러나 사로잡혀간 자들은 헛된 희망을 주는 거짓 선지자들을 찾고 있다(15절). 콜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키야도 그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느부캇넷살 앞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 말한다(21절).
또한 느헬람인 스마야가 있는데(24절),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예레미야를 "미쳐서 스스로 선지자가 된 자"라고 비난한다(26절). 그리고 예루살렘에 편지를 써서, 예레미야를 감옥에 쳐넣으라고 말한다(26절). 이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스마야 가문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70년 후 유다가 회복될 때에도, 스마야의 자손들은 그 회복의 기쁨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32절).
스마야가 가진 불만은 이 포로 기간이 길겠다고 한 예언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이다. 이것이 모든 죄인들의 공통적인 모습이다. 과연 그 어떤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뒤바꿀 수 있겠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에 불만을 가진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그 심판을 조용히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까닭없이 심판을 주시지 않는다. 따라서 겸손히 심판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의 행위를 돌이키면 되는 것이다. 비록 그 심판의 기간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죄인들은 할 수 없으면서도 불만을 갖는다. 대환란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연 현상들을 가지고 심판하셔도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저주한다(계 16:9). 그러면서도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찾아다닌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은 징계를 받을 때, 겸허히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그 도우심이란 징계의 기간을 빨리 끝내 달라는 것만이 아니다. 그 기간 중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어 이끌어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온전한 성도의 모습을 우리는 미카서 7장에서 발견하게 된다. 『내가 그를 대적하여 죄를 지었으니 그가 나를 변호하시어 나를 위하여 심판을 내리실 때까지 나는 주의 분노를 감당하리라. 그가 나를 빛으로 인도하시리니 그러면 내가 그의 의를 보리라』(미 7:9).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그토록 와 닿는 것은, 그 시대가 멸망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민족에게 내리는 심판의 때, 그것은 세상의 끝을 향해 달리는 이 마지막 때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우리는 선지자의 경고의 메시지를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죄악 된 세상에 선지자의 마음을 품고 외쳐야 할 것이다. 죄악에서 돌이키라고 말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