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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9 -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예레미야 21-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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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9월호>
예레미야의 활동 시기를 정리해 보면 제1기(요시야왕 때), 제2기(여호아하스-시드키야왕 때), 제3기(예루살렘 멸망 후)로 나눌 수 있는데, 본문은 제2기에 해당한다. 이 기간은 왕들도 악한 왕들이고, 실제적으로 외적의 침입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예레미야는 부정적인 예언만 했으므로 많은 박해를 당하게 된다. 이때 예례미야의 예언은 바빌론 침공을 당연시한 가운데 바빌론에 복종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반면 왕들과 고관들은 어떻게 해서든 바빌론에게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했다. 그들은 왕국의 멸망이 그들의 죄들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왕들과 백성들과 심지어 그 백성을 오도한 선지자들에 대해서도 강하게 책망하신다.1. 왕들에게 주시는 멸망의 선포(21-22장)
21장에서 시드키야왕은 파술과 스파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낸다. 여기서 파술은 20장에서 예레미야를 박해했던 그 파술이며, 스파냐는 스파냐서의 저자와는 다른 인물이다. 여기서 시드키야 때의 예언이 나오는데, 예레미야서는 왕들과 관련된 예언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지 않다. 여호야킴에서 여호야킨을 거쳐 시드키야에 이르는 근 20여 년에 해당하는 예언들은 섞여 나온다. 본문 21장에는 시드키야의 상황을 말하지만, 22장에서는 오히려 그 앞선 왕들인 여호야킴과 여호야킨(여코냐)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다. 그러나 이 왕들은 공통적으로 악한 왕들이고, 바빌론 침공이라는 공통된 현안을 갖고 있으며, 그 모두가 심판을 받고 있으므로 그 예언들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시드키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인데, 이를 통해 본문의 상황이 유다의 멸망 직전임을 알 수 있다. 시드키야는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서, 느부캇넷살의 침공 상황에 대해 주께 물어 달라고 부탁한다(21:2). 그리고 『만일 주께서 그의 모든 경이로운 일들에 따라 우리를 다루시면』 느부캇넷살이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며, 주께 간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예레미야를 미워했지만 예레미야가 참 선지자인 것은 알았을 것이다.
이러한 간구는 열왕기하 19장에서 히스키야가 앗시리아의 산헤립의 침공에 맞설 때 이사야에게 부탁한 것과 같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산헤립이 물러날 것이라고 예언해 주었다. 그때는 주께서 "그의 모든 경이로운 일들에 따라" 그들을 다루셨을 때였다. 산헤립은 기적적으로 물러났다. 주의 천사가 앗시리아군 18만 5천 명을 하룻밤 사이에 멸해 버린 것이다(왕하 19:35).
하지만 이번에는 주님께서 어떠한 "경이로운 일들"로도 그들을 다루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되어진 주의 말씀은 『나, 바로 내가 펼쳐진 손과 강한 팔로 성냄과 분노와 큰 진노 속에서 너희를 대적하여 싸우리라.』(21:5)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느부캇넷살의 손에 넘기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며,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멸망시키겠다 하셨다(21:4-10).
8절에서는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8절)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신명기 28장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복과 저주를 백성들이 선택하라는 말씀이다. 그들이 신명기의 경고만 따랐던들 이처럼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은 백성들이 저주를 택한 결과이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칼데아인들에게 항복해야만 살게 된다고 말씀하신다(21:9).
10절에서는 『내 얼굴을 둔 것은 재앙을 위함이요, 복을 위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얼굴을 둔다는 것은 보통 이스라엘 위에 눈동자를 두어 그들을 살핀다는 말인데(시 17:8), 여기서는 재앙을 위해 무서운 얼굴을 두시겠다는 말이다. 반면 시편에서는 고난을 당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춰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데(시 80:7,19 등), 그것은 교리적으로 대환란 때 고난당하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이다.
이어서 11절부터 22장 전체는 유다의 마지막 왕들에게 주시는 심판의 메시지들이다. 그들의 잘못은 "공의를 행하지 않은" 것이다(22:3). 공의를 행했다면 왕국에서 그들의 보좌는 안정되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왕국을 빼앗기고 만다(22:4-5).
여기서 유다의 마지막 왕들 각각에 대한 책망의 예언이 선포된다.
1) 살룸(여호아하스, 22:11-12)
본문은 『자기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치리하다가 이곳에서 나간 살룸』(11절)이라 말한다. 열왕기하 23:30에 따르면 이 살룸은 여호아하스를 가리킨다. 여호아하스는 요시야가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후 왕이 되었다. 당시 요시야는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을 맞아 싸우기 위해 올라오는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가 유다 땅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가 전사했다. 이집트와 바빌론의 싸움에서 궁극적으로는 바빌론이 이겼지만, 이때 요시야를 죽인 이집트는 당분간 유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여호아하스를 3개월 만에 폐위하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엘리야킴을 여호야킴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왕위에 앉힌 것이다. 여호아하스는 이집트에 사로잡혀갔으며, 거기서 죽게 된다. 본문 예레미야 22:12에서 살룸이 사로잡혀갔다는 것은 이때 이집트로 끌려갔다는 것을 말한다(B.C. 609).
2) 여호야킴(22:18-19)
여호야킴은 예루살렘에서 11년을 통치하다가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에게 잡혀간다. 느부캇넷살은 여호야킴 4년에 한 번 침공해 와서 일부 귀족들과 백성들을 사로잡아간 적이 있었으며(B.C. 606/605), 수년 후 다시 와서 여호야킴을 사로잡아간다. 본문 19절은 『그가 예루살렘의 성문들 너머로 끌려가 던져져서 나귀와 같이 매장되리라.』고 말씀하는데, 그는 잡혀가는 도중에 죽임을 당한다(B.C. 587/586).
13절을 보면 그는 "불의로 자기 집을 지으며 불공평으로 자기 방들을 짓는 자"라고 묘사된다. 하나님께서는 왕들이 바로 이러한 죄를 지어서 멸망한다고 말씀하셨다. 왕들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신정국가를 통치하는 통치자이고, 그들은 공의로 그 일을 해야 했다. 15-16절에서는 『네 아비가 먹고 마시며 공의와 정의를 행하였더니 그가 잘되지 않았느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의 청원을 심판하였더니 그가 잘 되었도다.』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네 아비"는 여호야킴의 아버지 요시야를 말한다. 여호야킴은 요시야의 선행 때문에 유예가 되었던 하나님의 심판을 앞당기고 말았던 것이다.
3) 여호야킨(여코냐, 코니아, 22:24-30)
여호야킨에 대해서는 『또 내가 너와 너를 낳은 네 어미를 너희가 태어나지 않은 다른 나라로 쫓아내리니 거기서 너희가 죽으리라.』(26절)고 말씀한다. 느부캇넷살은 여호야킴을 사로잡아가면서 그의 아들 여호야킨을 왕으로 삼았는데, 그의 통치는 3개월밖에 가지 못했다. 느부캇넷살은 여호야킨을 그의 가족과 백성들과 더불어 사로잡아간다. 여호야킨 때 대규모의 포로 됨이 있었다(왕하 24:12-16, B.C. 598/597).
특이한 사실은 이 인물을 코니야(Coniah)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코니야란 여호야킨의 다른 이름인 여코냐(Jeconiah)에서 "여"(Je)가 빠진 변형이다. "여"는 여호와를 뜻하는 말이며, 여코냐는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는 이름이다. 그런데 그 "여"가 빠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코냐를 버리셨다는 상징적인 뜻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30절에서는 『그의 씨에서는 아무도 번성치 못하며 다윗의 보좌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자가 더 이상 없을 것임이라.』고 말씀한다. 여코냐는 자식이 있었지만, 보좌에 앉을 자식은 더 이상 없다. 즉 왕국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다.
물론 시드키야가 그 다음 왕이 되었지만, 그는 여코냐의 아들이 아니라 삼촌이다. 시드키야에 대해서는 21장 전체에서 그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시드키야 때 느부캇넷살의 침공으로 유다는 완전히 멸망한다. 성전도 파괴된다(B.C. 587/586).
2. 거짓 선지자들에게 주시는 멸망의 선포(23장)
23장은 『주가 말하노라. 내 초장의 양을 죽이고 흩어 버리는 목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23:1)는 말로 시작한다. 목자들이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기르라고(2절) 주신 지도자들이다. 즉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인데, 왕에 대해서는 21-22장에서 책망하셨고, 23장에서는 제사장과 선지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불경하니...』(23:11). 그 중에서 선지자에 대한 책망에 집중하시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양들을 인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멸망의 길로 오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이 얼마나 악했으면 예레미야는 『선지자들로 인하여 내 안에 있는 내 마음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니...』(23:9)라고 절규한다. 악을 보고 비통해 할 줄 아는 마음, 그것도 주의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행하는 치유받을 수 없는 죄악들을 보고 절규할 줄 아는 마음,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마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요, 하나님의 종들이 품어야 하는 마음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두시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고 인도하셨다. 심지어 다윗의 집에서 떨어져 나간 북왕국 이스라엘에도 선지자들을 두시어 그들로 주의 뜻을 알게 했다. 하지만 사마리아의 선지자들은 "바알로 예언"했다(23:13). 북왕국은 일찍이 우상 숭배로 나아갔으며, 유다보다 130여 년 전에 멸망했다. 그렇다면 유다의 선지자들은 어떤가? 예레미야가 보니,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은 간음과 거짓말과 여러 가지 행악들로 더럽혀졌다. 그곳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 소돔과 고모라 같다고 말한다(23:14).
그들은 얼마나 악한가? 무엇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마음의 환상"을 말하는 자들이다(23:16). 자신의 마음의 환상(vision)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들이 바라는 소망대로라는 것이다. 특별히 예레미야 당시의 선지자들은 바빌론의 위협이 항상 있고, 이미 일부는 포로 되어 간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바빌론이 물러가고 유다가 위대한 왕국이 되리라는 소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께서 말씀하시나니 너희가 편안하리라"... "재앙이 너희에게 오지 아니하리라."』고 자기 마음의 상상대로 예언한다(23:17).
하지만 이 소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환상(vision)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파괴의 환상을 주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많은 거짓 종교지도자들처럼 그들도 "비전"을 외치면서 백성들에게 헛된 소망을 불어넣어 준다. 그들의 징계는 죄 때문인데, 죄에 대한 회개도 없이 위대하고 찬란한 "비전"을 품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한 환상은 백성들을 "우쭐하게"(16절) 하겠지만, 그것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할 환상이다. 오늘날도 수많은 정치, 종교지도자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비전"들을 외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현실을 선포하지 않고 긍정적인 미래만을 제시하는 지도자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한다(23:21,32). "내가 꿈을 꾸었도다"라고 말하며 예언한다(23:25). 이것은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을 기억나게 한다. 그들은 마귀들이 주는 거짓 꿈의 예언을 신뢰한다. 결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꿈과 비전, 이 얼마나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말들인가? 하지만 그 꿈이 마귀를 통해 온 꿈이요, 그 비전이 "자신의 마음의 환상"일 뿐이라면 그것들은 거짓말들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헛된 상상만 심어 주어 멸망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긍정적 사고방식"이나 "사차원의 영성" 등으로 탈바꿈되어 있다.
이에 예레미야는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경청하지 말라.』(16절)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이 얼마나 그들에게 미움을 받았을지 생각해 보라. 같은 선지자 입장에서, 자기만 옳고 다른 선지자들은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가 박해받았던 이유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진리는 소수이고 백해받으며 때로는 지독히도 독선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라면, 우리는 그 진리를 따르고 또 선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장은 그 책망의 말씀 한가운데서도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비록 거짓 선지자들 같은 악한 목자들이 그 백성을 흩어 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목자를 보낼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내가 그들을 몰아낸 모든 나라에서 내 양떼의 남은 자를 모아서 그들을 그들의 양우리로 다시 데려오리니 그들이 다산하고 번성하리라』(23:3). 이 양우리의 목자는 누구인가?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그 날들이 오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리니 한 왕이 치리하고 번성하여 지상에서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리라』(23:5). 다윗에게서 일으켜지는 한 "가지"(Branch), 즉 "왕"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이 나타나시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실 때 유다는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거하게 된다(23:6). 하지만 이런 일은 그분의 초림 때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일은 그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그분께 불려지는 한 이름은 "주 우리의 의"(여호와체키누)이다. 이것은 의로써 이스라엘과 또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분께 걸맞는 이름이다. 이사야 11:5은 『의가 그의 허리띠가 되며, 신실함이 그의 옆구리의 띠가 될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이스라엘은 수많은 고난들을 당해야 할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예레미야 당시에 진행되고 있던 바빌론의 침공과 포로 됨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즉 이스라엘의 목자들의 죄악으로 야기되었다. 백성들도 어리석게 그들을 따름으로써 온 나라가 배교하게 되었다. 이처럼 총체적인 배교는 멸망의 지름길이다. 유다는 그렇게 멸망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귀중한 교훈이 되어야 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