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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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안 땅을 향하여 (여호수아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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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12월호>

하나님께로부터 확실한 약속을 받은 여호수아는 이제 본격적으로 카나안 땅을 정복할 준비를 한다. 이 일을 위해 그는 40년을 기다려 왔다. 하나님께서는 “삼 일 안에” 요단을 건너라고 말씀하셨다(수 1:11). 3일, 단 3일이다. 이 3일 동안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동시에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요단 강 서편으로 보낸다(2:1). 전쟁을 하려면 적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40년 전에 자신이 맡았던 임무를 두 명에게 맡긴다. 그때는 12명이 갔었지만, 어차피 선한 보고를 가지고 돌아온 사람은 둘뿐이었다. 나머지는 악한 보고를 내놓았었다. 이제 두 명에게 여호수아는 선한 보고를 기대하며 보낸다. 더 이상 40년 전의 악몽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


1. 정탐꾼들과 라합 (여호수아 2장)



『가서 그 땅, 즉 여리코를 엿보라 』(1절). 이 성읍, 저 성읍, 카나안 땅을 모두 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시간은 3일밖에 남지 않았다. 공격 목표는 여리코로 정해졌다. 여리코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둔해 있는 요단 동편 싯팀 지역에서 강 건너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성읍으로서, 이 길목에서는 카나안 땅의 관문 같은 성읍이다. 여기를 통과해야만 다른 성읍들을 정복할 수 있다.
그런데 여리코는 카나안 땅에서 가장 큰 성읍 중 하나였다. 고증에 따르면 2m 이상 두께의 성벽이 이중으로 싸여 있는, B.C. 15세기에 있었을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강한 성읍이었다. 이스라엘은 첫 공격 목표로 매우 힘든 상대를 골랐다. 그러나 이 성을 함락해야만 다른 지역들도 수월하게 정복할 수 있다. 물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에겐 이미 요단 동편에서 아모리인들의 두 왕,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정복한 경험이 있다(민 21장). 무엇보다 하나님의 확고한 약속이 있었다. 그들은 그 약속을 토대로 그 큰 성읍 여리코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누가 여리코 왕에게 보고하여 말하기를 “보소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들이 이 땅을 탐지하러 이 밤에 들어왔나이다.” 하니 』(2절). 두 정탐꾼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요단 동편에서의 큰 사건을 소문으로 들은 여리코인들은 이스라엘의 동향에 대해 민감했다. 그들은 이 낯선 사람들이 정탐꾼임을 즉각 알아보았다. 그들은 이들이 창녀 라합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도 봤으며, 그래서 라합의 집을 수색하러 왔다. 중요한 것은 라합 역시 그들이 정탐꾼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라합은 오히려 그들을 숨겨 주었으며(6절), 그 수색자들이 간 다음엔 안전하게 돌아가는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16절).
말하자면 라합은 자기 동족을 배신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여리코를 정벌할 것임을 알면서도 라합은 이스라엘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자기 백성을 버리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편”에 선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사탄의 편을 떠나서 하나님의 편에 섰다. 구원이란 그런 것이다. 사탄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택하는 것이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것을 듣고 과감히 하나님의 백성을 택했다. 반면 여리코 사람들은 하나님과 싸우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전해 준 말은 다음과 같다.
1) 주께서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음을 안다(9절).
2) 이 땅의 모든 거민이 이스라엘로 인하여 힘이 빠져 있다(9절).
3)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넌 것과 아모리인들을 멸한 것을 들었다(10절).
4) 이 일을 듣고 여리코인들은 마음이 녹고 아무런 용기도 남아 있지 않다(11절).
5)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 아래로는 땅에 계신 하나님이시다(11절).
라합의 이 말을 들은 정탐꾼들은 더 이상 다른 정탐 활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여리코인들에 대해 이보다 완벽히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말들은 그대로 정탐꾼들의 보고서가 되었다. 『참으로 주께서 그 땅 모두를 우리의 손에 넘겨 주셨으니 그 땅의 모든 거민들마저도 우리로 인하여 힘이 빠졌나이다 』(24절). 이 말을 들었을 때 여호수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저 말은 40년 전에 여호수아와 칼렙이 하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저 말을 여호수아는 40년간 기다려왔다. 그때 12명이 이러한 보고를 했었다면 상황은 일찍이 달라졌을 것이다.
특히 이 이방 여인의 입에서 발설되는 저 위대한 송축의 언어를 보라. 『주 너희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 아래로는 땅에 계신 하나님이심이라 』(11절). 이방인의 입에서 “너희” 하나님이 이처럼 위대하신 분이심이 증거되는데, 왜 그토록 이스라엘은 “우리” 하나님을 그렇게 높이지 못했던가? 그래서 라합의 믿음은 위대했다. 라합은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 앞에 엎드러져 그분의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분 앞에 자신들의 연약함을 고백했고, 그분과 맞서 싸우려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죄인은 자신이 멸망할 죄인이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 바로 그때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여기서 라합은 자기뿐 아니라 가족들도 구해 달라고 부탁한다(12-13절). “너와 네 집안이 구원”(행 16:31)받은 구약적 실례라 할 수 있다. 이에 정탐꾼들은 라합 집의 창문에 주홍실 줄을 매어 두고, 가족들을 모두 집으로 모으면 이 집에 있는 자들은 살려 준다고 약속을 한다(18-19절).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의 영적 진리를 발견한다.
1) 당시에 걸어 놓은 주홍실 줄은 창녀 라합의 홍등가에 어울리는 줄이었다. 그러나 주홍실 줄은 그 색깔에 대한 예표로 말할 때,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라합이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홍빛 보혈이 믿는 자를 구원한다. 라합은 사탄의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나온 구원받은 성도의 예표이다.
2) 라합의 가족들은 구원받기 위해 창녀의 집으로 들어와야 했다. 그들은 음행자들이 아니었어도 이 집에 들어감으로써 음행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다시 말해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사 53:12). 그 집은 격리된 장소였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그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다.
3) 정탐꾼들은 “우리가 이 땅으로 들어올 때”(18절), 즉 정복하러 올 때 그 줄을 걸어 놓으라 했다. 하지만 라합은 그들을 보내고는 바로 줄을 달았다(21절). 구원은 지체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요.”라는 말을 너무 잘한다. 하지만 그들의 “나중”은 지옥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라합의 구원을 우리의 구원에 빗대어 영적인 교훈을 얻고는 있지만, 라합이 구약 성도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되긴 하지만, 결코 신약 성도가 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받지도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야고보서에서는 라합이 “행위”로 구원받았다고 말씀한다(약 2:24,25).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편이시라는 사실을 믿었을 때, 이스라엘 편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고 정탐꾼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즉 그녀의 믿음에 실제적인 행위를 더했던 것이다. 이 행위는 동족으로부터 살해당할 위험까지 감수한 행위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라합 집의 위치를 통해 여리코의 도덕성을 알 수 있다. 보다시피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었다. 성벽 위에 집을 지을 정도니 여리코 성벽이 얼마나 두꺼웠는지 알 만하다. 그 성읍은 강했고, 매우 컸다. 다시 말해 주변 모든 성읍(도시 국가)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며 추앙받는 도시였던 것이다. 그 추앙받는 도시 성벽에 있는 것이 하필이면 창녀의 집이다.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곳에 창녀의 집이 있다. 오늘날은 아무리 번쩍이는 사창가라 할지라도 일단은 뒷골목에 있는 법이다. 그러나 여리코에는 버젓이 성문 위에 있다. 아이들도 볼 수 있는 곳에 말이다. 그리고 그곳은 여리코뿐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을 유혹한다. 아마도 그곳에는 여러 성읍의 남자들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정탐꾼들도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과 섞여 그 집으로 왔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리코의 도덕성이다. 환락의 도시며, 타락의 도시다. 소돔과도 같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멸망하도록 저주하실 만한 도시인 것이다(수 6:17).


2. 요단 강을 건넘 (여호수아 3장)



정탐꾼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여호수아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요단 강변에 섰다(1절). 행진은 하나님의 언약궤와 그 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섰다. 백성은 그 뒤 약 2천 큐빗, 즉 1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궤의 뒤를 따라간다(4절). 궤가 이처럼 앞서 가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주께서 길잡이가 되신다. 4절은 『너희가 가야 할 길을 알게 되리니 이는 너희가 이전에 그 길을 지나가 보지 못하였음이라. 』고 말씀한다. 둘째, 주께서 앞서 가서 싸워 주신다. 광야에서도 모세는 궤가 앞에 나아갈 때, 『주여, 일어나시어 주의 원수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로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민 10:35)라고 말했었다. 백성들이 싸움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싸워 주시고 제압해 주시는 것이다.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너희는 요단에 가만히 들어가 서 있으라 』(8절). 그렇다. 그들이 할 일은 "가만히 서 있는 것"뿐이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물에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옛날 모세처럼 막대기를 물을 향해 뻗칠 것도 없다. 이번에는 막대기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언약궤가 그들의 어깨 위에 있다. 이 큰 이적은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믿음이 요구되었다. 생각해 보라.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물에 잠기자마자, 상류에서 내려오던 요단 강 물은 그들의 자리에서 멈춰서 버렸다(15-16절). 그들 아래 있던 물들은 하류로 흘러 내려가 버렸고, 위에서 내려오던 물은 물무더기를 이루며 점점 쌓여져 갔다. 궤를 맨 제사장들 저 옆에서 물이 점점 쌓여 올라가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물 무더기가 더 높아져 간다. 그들은 단지 궤를 메고 요단 강에 서 있는 것뿐이지만, 그것은 큰 믿음을 요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 일은 40년 전에 일어났던 일과 같은 일이었다. 17절은 주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한가운데 있는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백성도 “마른 땅”으로 요단을 건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홍해 역시 그렇게 “마른 땅”으로 건넜었다(출 14:22). 이스라엘은 물을 통해 이집트와 단절되었고(홍해), 물을 통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요단 강). 이스라엘에게 홍해나 요단 강은 그 자체로 위대한 이적임과 동시에, 이전 것들과 단절된다는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요단 강을 건넘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성취되기 시작한다. 아브라함 이래로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약속”만 받았지만, 이제는 그 약속된 “내용”을 받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수아 3장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한편 요단 강을 건넌 것은 흔히 성도의 죽음에 비유되곤 한다. 성도들의 장례식장에선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이 종종 불려진다. 그도 그럴 것이, 성도들이 들어가는 셋째 하늘 아래에는 거대한 물층이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이 물 너머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창세기 1:6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 물을 분리하셨다. 하늘(창공) 위의 물은 저 우주(둘째 하늘) 위에 있는 거대한 물층이다. 사도 요한이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갔을 때 본 “유리 바다”가 바로 이것이다(계 4:6). 그래서 하늘에서 지상의 인간을 본다면 이 “바다”를 통해 보는 셈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간들은 물고기와 같다. 예수님의 첫 네 제자들이 “어부”라는 것과, 그들에게 “사람들을 낚는 어부”의 임무를 맡겨 주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마 4:19).
그러나 카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까지 성도의 죽음과 안식으로 비유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성도가 죽어서 셋째 하늘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인함인데(엡 2:8), 이스라엘은 전쟁을 통해 카나안 땅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10절은 『그분이 너희 앞에서 카나안인과 힛인과 히위인과 프리스인과 기르가스인과 아모리인과 여부스인을 반드시 쫓아내시리라. 』고 말씀한다. 이러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성경은 『온 땅의 주 』(11,13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온 땅의 주님이시기에 어떤 땅을 누구에게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마음이다. 주님은 카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고자 마음먹으셨고, 그렇게 약속하셨다. 『온 땅의 주 』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반대하는 자들은 죽음뿐이다. 여리코인들처럼 말이다.
여기서 카나안의 일곱 족속들이 제시되는데, 이는 창세기 15:19-21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열 족속과 조금 다르다(켄인, 크니스인, 캇몬인, 힛인, 프리스인, 르파인, 아모리인, 카나안인, 기르가스인, 여부스인). 이는 아브라함에서 여호수아까지 이르는 400년 동안 약간의 민족 이동이 있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된다.
여기서 카나안은 일곱 족속 중 하나로 취급되지만, 사실은 일곱 모두가 카나안의 후손들이다(창 10:6). 말하자면 나머지 여섯 족속들은 카나안의 후손이면서 별도의 이름으로 분화된 부족들인 것이고, 카나안인은 카나안의 후손이면서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부족인 것이다. 이들 일곱 족속들은 그 땅 전체에 퍼져 있었으며, 카나안과 힛과 히위와 아모리는 조금 큰 부족들, 프리스와 기르가스와 여부스는 작은 부족들이었다. 특히 여부스는 예루살렘 지역에 살았으며, 나중에 다윗에게 완전히 정벌된다.
이제 이어지는 여호수아의 역사는 이들 족속들을 멸하는 내용들이다. 그 일들을 이룸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살펴보자. <다음호에 계속>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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