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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Repentanc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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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11월호>
이번 호에서는 구원론(Soteriology) 중에서 회개의 교리를 다루겠다. “회개”는 성경에서 매우 일반적인 용어인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디에서 돌아서는 것” 혹은 “마음의 변화, 또는 어떠한 것에 대한 자세의 변화”를 의미한다. 율법과 제사의 구약 질서 아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계속 반복된다. 히브리서 10장에 나타나있는 것처럼 그들은 반복되는 일에 자신들의 양심을 돌렸다.복음에서의 회개는 죄에서 돌이켜서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20:21에 잘 나타나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노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11:18에서 『생명에 이르는 회개』라 한 것은 새로운 마음이 단순히 악으로부터 떨어지는 구약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 영생은 그리스도가 나타내기 전에는 보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바울이 『영생의 소망』이라고 쓴 것은 구약을 통하여 그들이 바라고 고대하던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디도서 1:3에서 때가 되어 나타내셨다는 말을 통해 볼 때 분명하다.
회개는 기본적으로 “무엇에서 돌아섬”을 의미하며, 특별히 어떠한 것에 대하여 생각이나 마음 자세의 변화를 의미한다. 신약에서 이러한 회개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은 구원을 위한 회개』(고후7:10)라고 했다. 이러한 회개는 반복적인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죄에 대하여 두 번, 세 번 돌아설 수 없다. 그것은 회개가 죄에 대하여 변화된 자세를 내포한다는 의미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당신이 한 번 구원받았으면 당신은 다시 회개하고 다시 구원받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것은 히브리서 6:4-6의 저자에 의해서 가정적인 길을 만들어 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다시 회개로 새롭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하여 걱정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서 그러한 죄를 범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종종 어떠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때 이러한 죄를 범하고 있다고 정죄를 한다. 그러나 구원받고 중생하고 성령에 의해 거듭난 우리는 유대인에게 십자가 이전에 주어진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구절에 대하여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받을 때 감정적인 경험을 추구하고, 다른 영을 받아들이고, 두 번째로 받은 영이 성령이라고 우긴다. 또 그가 구원받을 때 성령을 받았다는(갈3:2) 신약의 가르침을 거부하며, 항상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대하여 걱정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귀신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다. 그들을 조정하는 것은 더러운 영이다.
자, 고린도후서 7:10과 히브리서 6장에 대하여 오해가 없도록 하자. 당신이 말하는 것은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다시 돌이켜 회개하고 다시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한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이 구원받은 것은 구원받은 것이고 구원받지 않은 것은 구원받지 않은 것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회개는 소극적인 관점처럼 단순히 죄에 대한 슬픔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 없이 죄에 대하여 눈물 흘린다. 그리고 즉시 같은 죄로 돌아간다. 고행을 하는 것은 확실히 회개가 아니다. 이러한 것으로 죄인은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이며 이것은 참된 회개를 가린다.
유다 이스카리옷(마27:3-5), 에서(창27:38; 히12:16,17), 발람(민22:34), 사울(삼상15:24) 등은 거짓 회개를 잘 보여준다. 사람들이 사도행전 2:38에 의하여 구원받고자 할 때 그것은 구원과 회개에 대한 잘못된 계획을 수행하는 것이다. 에서가 그렇게 하려 했고, 유다 이스카리옷이 그랬고, 사울과 발람이 그러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발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말하기를 『내가 범죄했노라』했지만 그는 지옥에 갔다(유11-13). 사울도 『내가 범죄했노라』 했지만 거절당했고 지옥에 갔다(삼상15:23,24, 28:16). 유다 이스카리옷도 『내가 범죄했다』라고 하고 끝없는 구렁으로 갔다(행1:20,25; 계9:11). 바로는 『내가 범죄했다』(출9:27)라고 말하고 죽어서 지옥에 갔다(롬9:17,2 2). 이처럼 성경적인 회개와 사도행전 2: 38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메시아적인 메시지에 기초한 현대의 회개에는 차이가 있다. 사도행전 2:38에서 시몬 베드로는 메시아를 거부한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죄(행2:22,23)를 회개하도록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행2:5,14). 사도행전 2장에는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구속의 의 없이는 지옥에 가기 때문에 당신은 죄를 회개해야 된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다.
복음에 있어서의 회개는 결코 사람이 범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복음에 있어서의 회개는 사람 자체가 어떠한가에 대한 회개이다. 이러한 것은 시몬 베드로(눅5:8), 욥(욥42:6), 이사야(사6:5)에게서 확실히 나타난다. 회개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슬픔으로(고후7: 10) 사망에 이르게 된다. 구원을 위한 회개는 그것이 하나님의 슬픔이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 당신이 행한 것들에 대하여 후회하고 그것을 고백했을 때 그것은 세상의 슬픔인데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성경적인 회개는 당신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하여 슬퍼하여 당신 스스로가 선하지 않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당신의 존재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이사야가 하나님께 다가갔을 때 그 자신이 어떤 잘못을 범했던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불결한 입술을 가진 사람이요 내가 불결한 입술을 가진 백성 가운데서 거함이니...』(사6:5)라고 했다. 욥이 하나님의 신성을 마주대했을 때 그는 “내가 실수하고 잘못 말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므로 내가 나를 미워하고 띠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6)라고 말했다. 시몬 베드로 역시 옳게 말했다. 『나를 떠나 가소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회개에 대한 표식은 죄들의 고백이 아니라 죄에서 떠나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돌아서서 믿음으로 성령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약속이 결코 사도행전 2:38을 따라 한 번의 물침례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회개의 필요성에 대하여 살펴 보자.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유죄이기에 회개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13:5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이와 같이 멸망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침례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에 처음으로 한 설교에서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고 하셨다. 침례인 요한은 그의 첫번째 메시지를 전파한 후에 때가 가까왔고 메시아가 곧 오신다고 말했다. 그의 첫번째 메시지는 바로 『회개하라』(마3:1,2)이다. 회개는 믿음 이전에 온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회개는 용서 이전에 온다. 『회개와 죄사함이 선포되어야 하리라』(눅24:47). 단지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것이 시몬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할 때인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고쳐주려고 하셨던 이유이다. 시몬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의 유대인에게 적용되어야 할 공식을 고넬료에게 적용하려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주님께서는 설교를 방해하며 사도행전 2:38이 더이상 성령을 받는 방법이 아닌 것을 보여 주셨다(행1:44,45). 시몬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셨던 대로 사도행전 2장대로 하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가적인 것들을 그에게 보여 주셨다.
이것이 당신에게 익숙하지 않다면 앉아서 머리를 긁적이지 말고 성경을 공부해 볼 것을 권고한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다루심을 바꾸지 않으신다(말3:6).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심이니라』(롬11:29). 그러나 하나님은 자주 그의 방법을 바꾸신다. 그는 한 장님을 진흙과 침으로 고치셨지만 다른 장님은 눈을 만지셨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단지 말씀하셨다(요9:6; 마9:2 9; 막10:52). 또 어떤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를 떠나 그의 길로 가기 전에는 고침을 받지 못했다(요9:7).
자 이제 보자. 사도행전 2:38에서 시몬 베드로는 할례받고 안식일을 지키며, 성전에서 예배하며,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유대인 청중에게 설교하기를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받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누가복음 24:47의 명령에 따라 모든 민족에게 이것을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의 메세지를 막으시며 “나는 이방인들을 그렇게 다루지 않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역사상 어떠한 이방인들도 사도행전 2:38에 따라 구원받지 않았다. 신약에서 어떠한 부분도 이방인들에게 『너희가 죄사함을 받으려면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그렇지만 나는 그런 설교를 수없이 들었는데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당신은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에 살고 있고 이 시대의 설교자들은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다. 또한 말씀을 믿지도 않고 말씀을 설교할 때에는 말씀을 온전하게 전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말씀을 자신들의 신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혼란스럽게 한다. 당신이 살고 있는 시대는 부흥이 일어나거나 설교자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때가 아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들이 시몬 베드로가 한 설교를 통해서 구원받았을 때 그들은 물로 침례를 받기 전에 성령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았다(행10:44-48). 그리고 사도행전 2:38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전에도 지금까지도 없었다. 사도행전 2:38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시몬 베드로의 메세지에서 그는 메시아를 거절한 것에 대한 민족적 회개를 말하고 있다. 열방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이름(행10:43)으로 전파되는 회개와 죄들의 용서에 대한 것이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갈3:14)에 대한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