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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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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2월호>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며, 큰 계명이니라』(마 22:36-38).유대인 랍비들의 말에 의하면 “모세의 율법” 안에는 613개의 계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계명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 산에서 돌판에 직접 기록해서 주신 “십계명”으로 요약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계명을 다시 두 계명으로 요약하셨는데, 그중에서 “첫째며,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12:30에서는 여기에 『힘을 다하여』가 추가되었다. 똑똑히 알아 두라! “첫째 계명”은 우리의 이웃이나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둘째 계명”이다. 정치적 ․ 종교적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주객이 전도되어 있는데,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동일시하거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선다고 이야기하고, 또는 이웃만 사랑할 뿐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이다.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에큐메니칼 운동, 인종 간 화해, 게이 해방, 여성 인권 운동, 아동의 권리, 복지 국가 등 어떻게 불리든 간에 그러한 것들은 모두 인본주의이다. 곧 하나님 대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첫째 계명”은 가장 친한 가족이나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마 10:37-39).
나는 이 “첫째 계명”을 “불가능한 계명”(Impossible Commandment)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나 역시 지금까지도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성경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한다(엡 5:25). 교회 안의 나이 많은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에게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딛 2:3,4).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요 15:12,17, 요일 3:23).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고(요일 2:15-17), 오히려 위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골 3:1-3). 이 부분은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이곳 지상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
인간은 지상 생애 동안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시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일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람이 찾아낼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라고 말했다. 세상은 “아름답게”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세상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사랑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두신 세상은 눈에 보인다. 그러나 한 번도 보지 못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하늘나라보다 세상과 세상의 아름다움에 훨씬 더 쉽게 매료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새 예루살렘보다 눈에 보이는 현 세상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었던 유대인들은 피골이 상접하여 아사 직전에 이를 때까지는 어떤 형태로든지 몸을 움직였는데,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독일 군인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기 시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누워. 여기서 총을 쏘면 우리가 직접 옮겨야 하잖아.” 그러나 유대인들 대부분은 시체가 있는 곳으로 제 발로 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리차드 움브란트나 하랄란 포포프의 책들에서 다소 실망한 부분은 하늘나라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계속 고문을 당하고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으면 하늘나라를 염원했을 법도 한데 그런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다.
“설교”만으로는 사람들이 보고 느끼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는 이 세상이라는 요새를 무너뜨릴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날 세 시간 동안 성경공부와 두 번의 설교를 들어도,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월요일 아침을 맞게 되면 예전처럼 똑같이 생활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육신” 때문이다. 구원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관계없이 “육신”은 육신일 뿐이고, 그것은 현 세상을 사랑한다.
사랑은 “현재 무언가를 즐기는 것” 또는 “미래에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현재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거나 미래에 사랑하게 될 것이다. 옛말에 “사랑해 보다가 잃어버리는 것이 한 번도 사랑해 보지 못한 것보다는 낫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목표들에 집착한다. 내가 깨달은 것은 목표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비참해진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사람이 앞으로 고대할 것이 없게 되면 자살을 생각한다.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해 줄 무언가가 없으면 인생은 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당대의 모든 문명화된 세계를 다 정복하여 목표를 이루었을 때 우울해졌고, 더 이상 정복할 세상이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울었다. 결국 그는 술에 취해 살다가 뇌출혈로 죽고 말았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허해지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보다 더 나쁜 상태는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 중 하나는 퇴직하고 나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고 잃어버린 것을 대체할 무언가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나쁜 습관이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파괴적인 습관을 지속하는 이유 역시 그 습관을 그만두면 다른 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무언가를 갈망한다. 가장 심한 고통은 세상의 모든 것이 그 “맛”을 잃었을 때 찾아온다. 이것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의 전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엘비스의 문제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모든 것을 이미 다 경험했으니까요!” 그래서 엘비스는 자고 일어나고, 식욕을 돋우거나 감퇴시키고, 무대에 올라가거나 긴장을 푸는 등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계속 약을 먹어야 했다. 의사는 그를 가리켜 “걸어 다니는 약국”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죽었을 당시 체내에는 14가지 서로 다른 약물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 3년 동안 무려 19,000개의 알약을 복용한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인생이 너무나 지루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부녀 및 처녀들과 간음했다. 막대한 돈을 소유했지만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비싼 차를 사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고, 또 집 밖으로 나가서 빈둥대는 사람 중 아무나 붙들고는 비행기를 타고 콜로라도주 덴버로 날아가 바나나와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기도 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처는 정신을 소멸시키면 욕망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경지에 이르면 인간은 자살하게 된다. 왜냐하면 살 만한 가치를 부여해 줄 그 어떤 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욕망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항상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이다. 한 훌륭한 현자가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는데, 하나는 마음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갖지 못하면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과연 어떤 삶일까?’ 하고 궁금해하지만, 막상 갖게 되면 ‘이런 것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있었나?’ 하며 한탄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든지, 죽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지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든지, 위에 있는 것을 사랑하든지 해야 한다. 칼 메닝거는 <사랑과 증오>라는 책을 썼는데, 요지는 사람이 무언가를 적절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그는 증오를 품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그 증오가 죽음과 파멸을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지상에 있는 것들을 향한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성적인 사랑을 생각해 보라. 솔로몬은 1,000명의 아내를 두었지만, 그들 중에서 그의 혼의 갈망을 완전히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아내를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전 7:28). 그는 결국 우상 숭배를 자행하다가 이른 나이에 죽어야 했다. 공립학교들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목표들은 “동물적인 목표들”이다. 심지어 충족될 수 없는 목표들이다. 이 목표들은 동물적인 욕구들을 위한 것으로서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게다가 이런 목표들은 성취한다고 해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사람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가장 큰 자산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열정”이다. 열정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내가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열정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라고 말씀한다. 또한 『네 손이 찾은 할 일은 무엇이든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전 9:10)라고 말씀한다. 열정이 있으면 다른 것들이 없어도 그 일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열정은 올바른 것 혹은 올바른 대상을 향한 열정이어야 한다. 곧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사랑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새 예루살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해야 한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 땅에서 살아갈 동기를 부여하는 분이셔야 하며, 그렇게 되도록 그분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분이 되셔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보다 “그 무언가”를 더 사랑해야 하는데, 즉 마냥 인생을 살아가는 것보다는 “구원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는 옛 사람, 곧 옛 아담의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된다(롬 6:3, 갈 2:20). 한때 구원과 관련하여 “회개”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 의미에 대해 말해 보자면, 그것은 자신을 지옥에 보낼 옛 아담의 본성에 매달리기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여 그분의 아들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옛 생활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앞으로 살아야 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만큼 “그런 삶”을 원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구원받은 성도는 죽는 날까지 혹은 공중으로 들림받는 날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죄가 너무 혐오스럽게 느껴져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기도 한다.
정말이지 나는 나의 삶에 싫증이 나고서야 비로소 구원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로서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싶을 만큼 인생에 신물이 나 있었던 것이다. 구원받은 지금에 와서는 감옥에 복음을 전파하러 갈 때마다 여전히 세상에서 재미를 보려는 40대, 50대의 죄수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럴 때면 그들에게 이렇게 지적해 주곤 한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의 문제는 아직도 세상에 대해 신물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출소하고 나면 어떻게 재미를 볼까?’ 하고 계획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말에 중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이 겉으로는 내색 안 해도 내심 움찔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세상과 차단되어야 한다.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관심을 끌면서 우리의 주의를 흩뜨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따라서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고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이 사랑하는 것들은 이곳 지상에 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려면 세상과 차단되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정작 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구원을 값없이 주기 원하시는 구주 예수님은 멀리한다. 당신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종교나 교회, 성사, 공로 또는 희생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구주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한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이루신 일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요일 4:19). 그와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희생시키셔서 당신에게 베푸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 예수님보다 자신의 의를 더 의지하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기 마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구원받기 위해 오직 그분만을 전적으로 믿고 자신의 행위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요일 4:10).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롬 5:8).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