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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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지위와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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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1월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노예의 지위를 가지고 노예의 임무를 수행하며 살아야 하고, “왕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왕자의 지위를 가지고 왕자의 임무를 수행하며 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순간 그에 걸맞은 지위와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에 우리가 어떤 지위와 임무를 부여받았는지 살펴보고, 그 임무를 완수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자!

▣ 성도의 지위 ▣


1.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하늘의 부요함을 받았다. 『너희는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아벨의 피보다 더욱 좋은 것을 말하는 뿌리는 피에 이르렀느니라.』(히 12:22,24)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이미 무엇인가를 받았다. 아직은 “영광”이라는 정상에 이르지 않았지만, 그 “영원”과 견고하게 연결된 현재의 위치가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졌다. 앞으로 영원에서 누리게 될 기쁨으로 향하는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소유하며 사는 부류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유일하다. “땅의 것들”은 길어야 인생이 끝날 때까지만 빌려 쓰도록 허락받은 대상일 뿐이며, 한시적으로 사용하는 동안에도 그것들은 우리 속 사람의 본질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즉 소유자와 소유물이 항상 별개이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서로가 주체와 대상으로 대립할 뿐 절대 하나로 귀결되지 않기 때문에 땅의 것들은 우리의 진정한 소유가 아니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것들은 우리 속 사람의 본질이 된다. 일례로 우리는 빛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빛”이 되었고(엡 5:8), 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가 되었다(고후 5:21). 예수님께서 구원과 관련된 “하늘의 소유”를 각 성도에게 유기적으로 이식해 주신 것이다.


2. 성도는 영원에서 이루어질 “온전함”에 이미 도달해 있다. 곧 오늘의 우리는 내일을 가졌고, 이 땅에서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유한 셈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묻혔다가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으며(롬 6:3-6),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고 영적으로는 천상으로 옮겨졌다(엡 2:6). 그런 새로운 출생으로 하늘의 생명과 시민권을 받았기에 삶 전체가 하늘의 영향권 아래 있고 하늘의 속성을 지닌 기쁨을 누리며 생의 목표 또한 하늘에 둔다(빌 3:20).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분으로서 하늘에 계심과 동시에(빌 2:9; 엡 4:10) 이 땅의 성도와도 함께 계시듯이(엡 3:17), 성도 역시 하늘과 땅, 이 두 세계에서 동시에 사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이에 더하여 성령 하나님께서도, 부활하시어 위로 올라가신 분으로부터 내려오셔서(하늘에서 땅으로, 행 2:33)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땅에서 하늘로 인도해 주신다(골 1:27, 고후 3:17,18).


이런 원리를 선명하게 이해해야 우리 마음을 실제로 하늘에 둘 수 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하늘에서의 지위를 모르면, 땅의 것들이 집어삼키도록 자신을 내주거나, 위에 있는 것들을 붙들려 하다가도 율법에 얽매인 채 기쁨 없이 겉치장만 하다가 끝낸다. 성도는 은혜 안에서 받은 지위와 언제라도 쓸 수 있는 하늘의 자원에 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진정으로 하늘로 향하고 활력을 얻을 수 있다.


3. 성도는 영원이라는 “최상위 장소”와 그곳의 영적 존재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갈 4:26, 엡 2:18). 비록 이 땅에서는 무너져 가는 육신의 장막 안에 살지만, 우리 눈앞에는 하늘의 모든 풍요로움이 있다. 하나님과 그분 주위에 있는 영광스러운 존재들, 하늘에서 가장 중요한 구역들, 구원과 은혜라는 하늘의 자원들 모두가 우리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가장 높으신 분께서는 우리를 하늘의 변방으로가 아니라 탁월하고 영광스러운 영원의 장소로 부르시어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아벨의 피보다 더 좋은 것을 말하는 뿌리는 피, 즉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흘려지지 않았다면 그 모든 것들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은혜의 피”로 하늘이 열린 것이다! 찰스 스펄전은 영국 런던에서 주일마다 수천 명의 청중에게 복음을 담아 수십 년간 설교했고, 그 누구보다 더 다양한 은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놀랍게 일한 사역자였다. 그런 그가 열매로 가득했던 복된 생을 마치며 남긴 고백은 간명하기 그지없다. “나의 신학은 아주 단순해졌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라는 바로 이 네 단어면 충분하다.” 그렇다! 우리의 고백도 이와 같아야 한다! 지상의 골고다 언덕에서 구세주께서 완성하신 구속 사역은 하늘의 시온 산에서 성도들이 영원토록 감사하면서 드릴 경배와 찬송의 주제인 것이다.

▣ 성도의 임무 ▣


1. 부요함은 의무를 동반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하나님께서는 많은 복을 받은 우리가 더 헌신하고 더 거룩하기를 기대하신다. 바울은 복음 전파에 관한 자신의 임무를 말하는 대목에서 자신이 빚진 자라고 말했는데(롬 1:14)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구원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복음의 빚이 있고, 넘치게 복을 받은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빚이 있으며, 왕이 된 우리는 실제로 그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하는 빚이 있다. 목표에 도달하려면 그 목표의 속성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우리의 끝이 하늘과 영광으로 정해진 이상, 이 땅에서도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엡 4:1). 부요함이 클수록 의무도 더 많아지고, 은혜의 선물이 더 풍성할수록 더 진지하고 신실하게 다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라. 『이는 많이 받은 자에게서는 많이 찾게 될 것이요, 또 사람들이 많이 맡긴 자에게는 더 많이 달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라』(눅 12:48).


무엇보다 흔들릴 수 없는 영원한 왕국을 받게 될 결말을 앞둔 성도는 주님의 오심을 첫째로 기다린다. 이 땅에서 맡은 일을 성심껏 수행하면서도 진정한 목표는 하늘에 있다. 지상에서 올바름과 신실함과 신뢰의 본이 되면서도 주님의 오심을 기쁘게 고대한다(빌 3:20). 힘찬 걸음으로 전진하는 데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헐거워진 생각의 허리를 띠로 묶고 정신을 차리라(벧전 1:13). 우리의 마음은 한 가지 유일한 목적, 즉 영원으로만 가득 차야 한다. 거룩함에 집중하고 그것을 지속하며 흔들리지 말라.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바울처럼 전진해야 한다(빌 3:13,14).


2. 부요함은 자동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크게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영적인 삶을 시작했어도 지금은 비참하고 가난해졌을 수 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비추시는 햇살을 즐기며 기뻐했으나 현재는 패배의 어둠 속에서 쓰러져 있을 수 있다. 한때는 승리하는 삶으로 영광을 돌렸어도 이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수 있다. 전에는 용기를 내서 기꺼이 구세주를 전했지만 지금은 겁을 먹고 물러나 있을 수 있다. 과거에는 지체들을 사랑했어도 현재는 갈등하며 싸울 수 있다. 지난 시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마음에 주의 깊게 새겼으나 요즘에는 성경이 닫힌 책이 되었을 수 있다. 이 모두가 “첫사랑”을 저버린 결과들이다(계 2:4). 과거의 복된 경험이 오늘과 내일의 풍성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당신의 눈은 위를, 또 앞을 향해 있어야 한다. 성도는 순례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승점에서 면류관을 받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동시에 거룩하고 진지하게 살라.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을 두려워함, 기쁨과 신중함 등의 양면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진지함이 없는 기쁨은 얄팍하고, 기쁨이 없는 진지함은 비관으로 기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구원의 확신만 있는 사람은 형식적인 바리새인이 되기 쉽고, 구원의 확신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만 하는 사람은 율법주의에 빠져 불안의 노예가 된다. 한편 성도들 안에서 거룩함이 부족한 모습을 너무나 자주 본다. 예배 전에 나누는 대화는 일상을 주제로 한 잡담들이 대부분이고, 찬송도 그 의미에 집중하지 않고 생각 없이 부른다. 찬송이 주님께 드리는 기도라는 사실을 아예 잊은 듯하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다시 학업이나 진로, 사업, 정치, 가족 문제 등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사이 공중의 새들이 마음에 뿌려진 그 작은 씨마저 훔쳐 가 버린다(마 13:4,19).


3. 부요함은 실현되어야 한다. “은혜”는 헬라어로 그 어원을 살펴보면 “무엇인가 기쁨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의 의미가 있다. 또한 헬라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을 준 대상이 “아름다움”이었기에 “상냥함, 사랑스러움”의 뜻도 가지며(눅 4:22, 엡 4:29), 기쁨을 주는 사람의 태도인 “호의”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된다. 특히 권한을 행사하는 데 제한이 없었던 동양의 왕들이 기꺼이 베푸는 호의는 노력해서 얻는 대가와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은혜를 잘 보여 준다. 자격이 없음에도 분에 넘치는 호의를 입은 사람은 영광, 기쁨, 행복으로 충만함과 동시에 그것을 베푼 사람에게는 감사로 반응하기 때문에 호의 역시 감사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처럼 “은혜”는 한편에서는 받는 사람에게로 향하는 “주는 사람의 친절한 마음”이, 다른 한편에서는 주는 사람에게로 향하는 “받는 사람의 반응”이 담긴 독특한 단어이다.
“은혜”에서 출발한 “감사”는 이제 그 시선을 받은 선물에서 선물을 준 대상으로 옮기게 한다. 그래서 흔들릴 수 없는 왕국을 받은 성도는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뻐하고 온 마음을 다해 그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 한다. 감사드리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며, 선물을 주시고 여전히 풍성하게 복 주시는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신실하게 섬기기를 원하는 것이다.


기쁨이 가득하고 거룩하게 된 결과, 은혜는 우리 위에서 빛나고, 감사는 우리 안에서 빛난다. 은혜가 위에서 내려오고 감사가 아래에서 올라가는 선순환의 원리에 따라 감사하는 성도는 매번 은혜를 새롭게 받는다. 주님께서는 후히 그리고 기꺼이 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가 복을 받는 정도는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헌신하는지에 달려 있다.

신실한 성도로서 임무를 완수하려면 무엇보다 엄중한 말씀을 있는 그대로 유념하라! 믿음의 생활에서 실패한 것들로 인해 구원을 잃지는 않지만, 신실하지 못하고 불순종한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낳는지 깊이 생각하라! 스스로 안전하다고 믿는 육신적이고 종교적인 자세를 버리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과 살아 있는 교제를 하라!


주님의 말씀은 능력의 근원이고, 명령이자 선물이며, 지켜야 할 수칙이자 약속이고, 마땅히 행해야 할 임무이자 장비이다. 주님께서는 생명이시고 진리이시며 승자이시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거룩하고 순결하게 하시는 구원자이시다. 과거를 청산하시고 현재를 빛으로 밝히시며 미래를 보장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촉구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BB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가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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