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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타락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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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8월호>
『마음이 타락한 자는 자기의 행위로 채워지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 행위로 만족하리라』(잠 14:14).우리가 “타락”을 말할 때,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어버리고 지옥에 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 교리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성추문으로 목사직을 박탈당한 지미 스웨거트는 그가 사고 치기 수개월 전에 “나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그런 저주받을 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에 그의 믿음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지미 스웨거트와 태미 베이커 같은 자들은 아무리 크게 죄를 지어도 자신의 구원만큼은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희대의 아이러니이자 난센스이다.
이제 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마주치는 현실은 자신이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끔찍한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를 짓고 나서는 자신의 구원을 의심한다. “내가 구원받았다면 어떻게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지?”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이 확실한 만큼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명령들에 저항하는 반대자가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기록된 찬송시는 “주여, 내가 타락하기 쉬움을 느끼나이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내가 떠나기 쉽습니다.”라고 노래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우리가 타락하기 쉽다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를 숙연하게 하는 사실이다. 당신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우리 자신을 “봐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양심이 고백한다. 만일 우리가 매번 잘못할 때마다 대가를 치러야 했다면, 우리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어떤 일에도 용서받을 필요가 없어!”라고 여기는 극도로 “영적인” 사람들만큼 상종하기 싫은 자들도 없다. 성경은 각 사람이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비롭게 선대해 주신다. 우리가 심은 것을 다 거두지 않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뿌린 것들을, 심지어 뭘 뿌렸는지조차 몰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의 과오들을 그분의 은혜로 해결해 주신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설교해서 거둔 헌금은 3달러 33센트였다. 그것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면 『내가 적절한 대가를 주리라.』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았다(마 20:4). 그러나 현재 우리 교회는 빚이 없고, 내 집도 빚이 없고 내 차들도 더 이상 갚아 나가야 할 할부금이 없다. 이 정도면 정말 하나님께서 선대해 주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선대해 주신다면, 어떤 성도라도 절대로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지 않은가? 실로 복음 전파하는 것도 거르지 않고, 기도도 쉬지 않고 성경의 약속들을 주장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고 그럴 것 같다. 고백컨대 그렇지 않다. 나는 감사하지 않은 적이 있었고 하나님을 여러 번 실망시켜 드렸다. “주여, 내가 타락하기 쉬움을 느끼나이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내가 떠나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징계하심에도 쉽게 타락한다. 다윗은 『주의 겸손하심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시 18:35)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겸손하심으로 다윗을 위대하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받았어야 마땅할 방식으로 그를 대하셨다면 그는 결코 위대하게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웃사를 대하셨던 것처럼, 혹은 아나니아와 삽피라를 대하셨던 것처럼, 또 오난을 대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대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비로 대하시고 선대해 주시면 그리스도인들이 감사하며 절대로 타락하지 않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락한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과 선택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 한 것이다.
즉 우리는 경험상 많은 교훈을 배웠음에도 타락하기 쉬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신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지, 또 어떤 일이 잘못된 일인지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일이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잊어버리고는 다시 문제에 봉착하고,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그리고는 또다시 문제에 봉착한다. 아, 이를 어찌해야 할까? “주여, 내가 타락하기 쉬움을 느끼나이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내가 떠나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증표들을 보여 주셔도 쉽게 타락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구세주의 대속 사역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인 면에서 접근해 보려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의 아기를 데려가신다. 혹은 아기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혹은 아직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에게서 부모를 데려가신다. 그럴 때면 인간은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심성은 주님께서 여전히 자신을 돌보신다는 증표를 보여 주시길 원하는 것이다.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본모습이 대개 그렇다.
주님께서는 아닌 게 아니라 때때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작은 증표들로 보여 주신다. 오래전에 나는 혼자서 4명의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그런데 성도들이 우리 가족을 위해서 일주일에 두 번씩 식사를 대접해 주기도 했다. 또 한번은 집회를 마치고 공항에서 돌아오면서 배가 고파 프라이드치킨을 사서 온 적이 있는데, 막상 집에 도착해서 부엌에 갔더니 성도들이 해 놓은 요리가 프라이드치킨을 포함하여 다섯 접시나 따뜻한 상태로 식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또 어떤 성도는 내 서재에 책꽂이를 만들어 주었고, 어떤 성도는 내가 출타한 동안 내 차의 앞바퀴와 뒷바퀴 타이어를 갈아 끼워 주었다. 목자로서 양들을 먹였더니, 양들이 목자를 먹여 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도에게 증표들을 보여 주시면, 그리스도인이 결코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지 않은가? 그처럼 사랑을 보여 주시는 주님께 어떻게 실망을 안겨 드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쉽게 타락하고 만다.
미군 장교로 도쿄에서 복무할 때, 나는 도쿄 라디오의 방송을 검열하는 “음악 장교”였다. 당시 나는 “요코”라는 통역사와 친하게 지냈는데, 오케스트라 단원인 한 건장한 일본인이 요코를 대동하고 와서는 오케스트라가 맥아더 장군과 장병들을 위해서 「메시아」를 연주할 수 없다고 내게 열변을 토했다. 이유인즉 상부에서 새로운 지휘자를 세웠는데 그 지휘자가 전쟁 기간에 일본을 떠나 영국으로 도망간 변절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더러 상부에 이 사실을 말해서 지휘자를 바꿔 달라고 청원하러 온 것이다. 나는 그의 요구대로 나보다 계급이 높은 대령에게로 가서 이대로는 「메시아」 연주가 엉망이 될 테니 지휘자를 바꿔 주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대령은 “그 지휘자가 그대로 지휘할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는 실수하는 것이라고 호소했지만 사무실 밖으로 쫓겨나기만 했다. 나는 일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2주 동안 하와이로 피신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메시아」 공연이 엉망으로 끝난 뒤였고, 나는 상관들에게 정말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들어가며 혹독하게 추궁을 당했다. 지휘자가 맘에 안 들었던 연주자들이 일부러 박자를 틀리게 하고, 일부러 음을 조금 낮춰서 연주하는 등 정말 음악회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비록 내 능력으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없었지만,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내게 부탁을 했던 그 건장한 체구의 일본인으로부터 5년 동안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다. 거기에는 “당신의 친절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부터 받은 친절과 은혜를 잊지 않는 반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오늘날 미국에는 수많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지 실제로는 썩은 통나무 같은 사람들이다. 속이 텅 빈 것이다. 어릴 때 나는 나무를 잘 타고 놀았다. 때로는 3미터 이상 되는 나무들도 타고 놀았는데 거기서 두 번 정도 떨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다음에 타고 올라갈 나뭇가지가 확실하게 무게를 지탱해 주지 못할 것 같으면 지금 의지하고 있는 나뭇가지를 결코 놓지 말라”는 교훈을 배웠다. 당시 나는 3미터 높이의 나무에서 떨어졌는데 뼈가 부러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3분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겉은 멀쩡했지만 속은 흰개미가 다 파먹은 나뭇가지를 붙들었던 것이다. 겉모습만 멀쩡한 타락한 그리스도인이 바로 속이 텅 빈 나뭇가지와 같다.
그렇다면 타락에서 회복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자신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타락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지 못한다. 경배도 예전처럼 기쁘게 누리지 못하고, 기도하는 것도 무거운 짐으로만 느껴지고 기도가 간절하지도 않다. 둘째, 외적인 기준을 지키지만 영적인 면을 잃어버렸다면 타락한 것이다. 성경을 계속 읽기는 하는데 성경을 읽고자 하는 원함 자체가 없을 때에는 이미 타락해 버려서 성경 읽기가 즐겁지도 않고 진리에 목말라 하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내가 그의 입의 말씀들을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더 귀히 여겼도다.』라는 욥의 고백이 나오지 않는다(욥 23:12). 또 『많은 전리품을 찾아낸 사람처럼 내가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라고 한 다윗처럼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다(시 119:162). 성경을 읽는 재미가 없으니까 차라리 신문을 읽거나 TV를 본다. 이럴 때 당신은 타락한 것이다.
타락에서 회복되기 위해서는 또한 자신이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기만하기를 좋아한다. 같은 병들인데 거기에 다른 이름을 붙이고는 다른 병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처럼 자기기만을 좋아한다. 타락했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 자신이 타락한 상태인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보좌로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또한 무엇 때문에 타락하고 탈선하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당신은 원인이 세상 음악, 마약, 나쁜 친구들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때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화가 나 있기도 한다. 어떤 일로 하나님께 화가 나서 위에 언급한 탈선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복수와 같은 일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탓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보통 자신이 쓴 뿌리를 품고 기도도 중단하고 성경 읽기도 중단하게 된 것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탓이라고 여긴다. 목사나 집사, 자신의 아내, 자신의 남편 탓으로 여기는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이런 성향이 있다. 물론 일부 그런 요인도 있겠지만 사실 문제는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가 아니다. 그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긴 일이 문제이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풀어야 올바로 푸는 것이다.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가서 그 문제를 끄집어내라.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에 가지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으라. 주님께서는 “아들아, 이제 일어나 가자. 여행을 마쳐야지!”라고 말씀하신다. 성도는 때로 멈춰 서서 더 이상 전진하기를 원하지 않고 여행길을 그만두기도 한다. 그러다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구원받은 내 안에 이런 타락한 본성이 있다고?” 그렇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안에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 8:13). 이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 곧 그리스도인에게 쓰신 말씀이다. 당신이 타락했다면 자신이 타락한 원인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끌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으라. “럭크만 형제님, 저는 가망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다시는 제게 기회를 주시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래 배 속에 있는 요나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셨고, 간음한 다윗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셨다. 성결을 망쳐 버린 삼손에게는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삼손을 완전히 버리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욕하며 맹세했던 베드로를 회복시켜서 오순절에 3,000명의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셨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베드로는 자기 죄를 자백하고 있는 그대로 그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번성하지 못할 것이나, 죄들을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누구나 자비를 얻으리라』(잠 28:13). 타락한 상태 그대로 머무르라는 법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타락하게 된 그럴듯한 계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런 상태에 계속 있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자신을 타락으로 이끈 그 원인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해결하라. 해결하기에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지금이 가장 빠른 때임을 잊지 말라!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