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원히 보존하신 말씀 분류

“고해성사”를 지지하는 “개역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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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1월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그리스도인”도 죄를 짓는가? 『주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으로 씻음을 받았고』(고전 6:11), 십자가의 제단 위에 드려진 “화목제물,” 곧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심으로... 거룩하게』(히 10:10)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한 번의 제사로써... 영원히 온전케』(히 10:14) 된 그리스도인이 과연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은 “그렇다!”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도 죄를 짓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두 구절”과 모순되는 것 아닌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거함이요, 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라』(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는 자신을 지키나니, 그 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못하느니라』(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요 1:13)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데, 왜 “요한일서” 두 구절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또 죄를 지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는 것인가?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구속받지 못한 “몸”에 있다. 정확히 말해 이 “몸”은 『죄의 몸』(롬 6:6)이자, 『옛 사람』(롬 6:6)이다. 『죄의 몸』이 근본적인 문제인데, 바로 이 『옛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일서” 두 구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무엇” 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구원받은 성도의 “거듭난 영”이다! 바로 이 “거듭난 영”이,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우리 안에 새롭게 형성된 『새 사람』(골 3:10)이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엡 4:24)으로 죄를 짓지 않고, 또 죄를 지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새 사람』은 “주님과 합해진 거듭난 영”이기 때문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몸”이라고 하지 않았다. “한 혼”도 아니다! 분명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말씀한다.

이렇듯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새 사람』으로서, “성령”을 통해 “거듭난 영”을 가리킨다. “거듭난 영”은 죄를 짓지 않으며, 또 죄를 지을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의 “몸,” 곧 지긋지긋한 이 “죄의 몸,” 죄만 짓고 문제투성이에 말썽만 일으키는, 그래서 결국 죽을 수밖에 없고 썩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의 몸』은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 여전히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죄의 몸』은 “언제”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게 되는가? “휴거 때” 태어나게 된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공중으로 오셔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우리의 귀로 듣는 순간, 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 뵙기 위해 “즉시로” 이 땅에서 솟구쳐 올라갈 것인데, 바로 그때 우리의 “몸”은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몸으로 『눈깜짝하는 순간에』(고전 15:52) 변모될 것이다. 구속받은 그 몸을 입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어도 못 짓게 될 것이다. 죄를 짓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이다. 죄가 더 이상 건드릴 수 없는 “완벽한 자유”와 “완벽한 승리”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몸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구속의 날』(엡 4:30)이 올 때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몸” 안에 갇혀 살면서 “죄의 몸”과 “끊임없는 사투”를 벌여야 한다. 사투를 벌이다가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 때도 있지만, 때로는 육신의 힘으로 해 보려다가 죄에게 굴복하여 패배의 쓴맛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죄의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지었다 해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근거로 “죄들을 자백하고” 버려야 한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번성하지 못할 것이나, 죄들을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누구나 자비를 얻으리라』(잠 28:13).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자백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들을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주의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눈을 여시어 이제 주 앞에서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는 주의 종의 기도와 우리가 주께 대하여 범죄한 이스라엘 자손의 죄들을 자백하는 것을 들으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모두 죄를 지었나이다』(느 1:6). 『내가 내 죄를 주께 시인하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내 죄과들을 주께 자백하리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시 32:5). 『오 하나님이여, 주의 자애하심을 따라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의 온유한 자비들의 풍성함을 따라 내 죄과들을 지워 버리소서. 나의 죄악으로부터 나를 철저히 씻으시고 나의 죄로부터 나를 깨끗하게 하소서. 내가 내 죄과들을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주, 주만을 거역하여 내가 죄를 지었으며 주의 목전에서 이 악한 행실을 행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시고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리이다』(시 51:1-4).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9).

이에 반해 “로마카톨릭”은 성경 말씀을 거슬러 “사람” 앞에서 죄를 자백하라고 가르친다. 특히 모든 죄들을 “사제”(신부)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카톨릭의 거짓 교리들 중 하나인 “고해성사”이다. [아래 내용은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 1994>에서 인용했다.] 「하나님과 교회와 화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양심을 정직하게 살펴본 후 고백하지 않은 모든 중대한 죄들을 기억나는 대로 사제에게 고백해야 한다」(제1493항). 「사제에게 고백하는 것은 고해성사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제1456항). 「이것은 고해성사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사제에게 죄들을 폭로하고 고백하는 것이 이 성사의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제1424항). 「교회[“가짜 교회”인 로마카톨릭 - 필자 주]의 명령에 따르면, 분별력을 갖게 된 이후 신실한 성도들은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중한 죄들을 고백해야 한다는 속박에 묶여 있다」(제1457항).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교황이나 사제들에게 죄들을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권위로부터 죄들을 용서할 허락을 받은 사제들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들을 용서할 수 있다」(제1495항). 로마카톨릭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사제”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 2:5)라고 말씀한다.

결국 로마카톨릭은 “고해성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변개하기까지 했는데, “변개된 성서들”은 모두 여기에 편승해 버렸다. 곧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잘못들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라는 말씀에서, 『잘못들[faults, 파랍토마타(παραπτώματα)]』을 “죄들”[sins, 하마르티아스(ἁμάρτιας)]로 변개시킴으로써 “고해성사”의 정당성을 지지해 준 것이다. “뉴킹제임스성경” 역시 “trespasses”(죄과, 허물들)로 변개시켰다. “변개된 한글 성서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개역개정판).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개역성경). 「서로 죄를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해 주십시오. 의로운 사람이 기도할 때,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쉬운성경).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병이 낫도록 서로 기도하십시오. 의로운 사람의 기도는 능력이 있고 효과가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새번역). 심지어 변개된 성서들은 『효과적이고 열렬한[effectual fervent]』 부분도 삭제해 버렸다.

“잘못들”(faults)은 “죄들”(sins)이 아니다. 두 단어는 서로 다른 단어다. “미키 카터”(Micky Carter) 목사는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데, “서로 다른 것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때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고 제멋대로 성경을 변개시키게 된다. 성경은 분명 “서로 잘못들을 자백하라”고 말씀하지, “서로 죄나 죄들을 고백하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잘못”이란, “신체적 결함”이나 “행위로 범한 죄,” “악한 행위” 등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받기 이전부터 그 사람 내면에 잠재해 있던 일종의 “성질”이나 “기질,” “성벽”(性癖, 굳어 버린 성질이나 버릇) 등을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게으른 성향, 부실한 판단력, 사리 분별의 부족, 중독적인 취향, 특정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예민한 반응, 무례함, 무관심, 쉽게 불만을 터뜨리는 성향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성질”이나 “기질”은 언제라도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 죄로 연결될 수 있기에, 죄를 범할 소지를 다분히 갖고 있는 이 “내면적 결함”을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절히 통제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이런 “잘못들,” 곧 “내면적인 결함”을 서로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면, 특히 효과적이고 열렬히 기도하면, “역사하는 힘”이 많게 된다.

전직 로마카톨릭 신부였다가 회심한 “찰스 치니키”(1809-1899) 목사는 “고해성사”가 행해지는 밀폐된 방, 곧 “고해실”을 가리켜 “현대판 소돔”이자, “여신도들의 고통의 장소”라고 적시했다. 왜냐하면 매혹적이고 정욕을 부추기는 여인들이 “남성,” 그것도 결혼하지 않은 “독신 남성”인 “고해 신부”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찾아와, “자기가 은밀하게 저지른 죄들,” 특히 낯부끄러울 정도의 성적인 죄들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고백할 때, “어떤 남자”라도 하루 종일 그런 식의 고백을 듣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추잡한 상상”과 “성적 유혹”을 떨쳐 버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해”는 “고해를 하는 신도”나, “고해를 듣고 있는 신부”나, 모두 괴롭기는 매한가지다. “리용”의 대주교 “드 보날드”는 “신부들”을 위해 쓴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림이나 어떤 표현들을 계속 보다 보면, 그것이 은연중에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고, 그 상상이 곧장 죄의 유혹과 통탄할 죄들의 긴 터널로 연결될 수 있다. 이처럼 신도들이 그들의 죄를 털어놓을 때, 그것을 듣고 있는 ‘고해 신부’는 그와 동일한 과정을 겪게 된다. 따라서 ‘고해 성사’를 듣는 중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유혹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국에는 순결의 가치를 영원히 잃어버릴 것이다.” 과연 언제까지 이런 가증한 “고해 성사”를 지지하는 변개된 성경을 쓸 것인가?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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